오늘의 본문은 어느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이 됩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태어났습니다. 세상의 온갖 귀한 것들을 바라보고 감격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로 태어났습니다. 흔히 말하는 아름다움, 화려함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게 태어나서 살아 온 사람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나서 쭉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자기 잘못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유를 모릅니다.
아버지가 잘못한 것인지, 어머니가 잘못한 것인지, 이유를 모릅니다.
이렇게 불행하게 출발해서 한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스스로는 아무 잘못도 없이 평생토록 이 고생을 해야만 합니다.
누군가가 던져주고 가는 동전 한 닢, 그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남이 던져주는 동전에 의지해서 생각없이 살아 갈 뿐입니다.
그런데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철학자 니체가 말했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렇습니다. 살 이유가 있으면 무슨 수로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무의미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그를 괴롭히는 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평가입니다. 사람들이 수근거립니다.
사람들의 그의 고난, 눈 못 뜸을 보고 신학적 토론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는 대로 ‘뉘 죄 때문입니까? 본인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왜 이사람은 불행해 졌습니까?’ 까닭을 묻는 것입니다.
자, 이 불행한 사람을 앞에 놓고 이것이 할 말입니까?
여러분, 안 그래도 괴로워 죽겠는데 남들이 내 불행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추상적인 논쟁이나 벌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까?
그래서 더 비참한 사람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보면 저들은 구체적인 대책은 없고 추상적인 토론만
할 뿐입니다. 무익한 논쟁만 벌입니다. 부모의 죄인가, 본인의 죄인가, 본인의 죄라면 나기 전에 무슨 죄가 있었겠는가, 부모의 죄라면 그는 억울하지 않느냐, 이런 추상적 토론을 밑도 끝도 없이 벌입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고난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예수께서 병 고치시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예수께서 능력 있으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주여, 이 사람을 고쳐 주시옵소서.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하고 말해야 되겠는데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없고 토론, 시비만 하고 있습니다. 참 맘에 들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예나 오늘이나 이 사회의 문제입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문제가 닥치면 조용히 주님 앞에 나아와 무릎 꿇고 간구해야 하는데,
왜 그 문제에 그렇게들 집중하십니까?
교회에 왜 나오십니까? 예수님이 지금도 무덤에 그냥 머물러 계십니까?
그 분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살피시고 우리들을 위해서 중보하시고 직접 돕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내 문제만큼은 내가 먼저 해결하려는 우를 범하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고 계시는가를 살펴 봅시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철학적 난제가 아닌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우리들은 문제를 보고 분석하려고 하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경륜을 먼저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이 소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신앙 고백 가운데서 늘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골로새서 1:25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보십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큰 경륜이 있다,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다, 하십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의 불행의 원인을 과거에 묻지 않고 미래에서 해답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부모 때문입니까, 본인 탓입니까... 이것은 전부 과거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괴로워할 때에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렇습니다. 고통이 고통되는 까닭은 철저한 상실에 있습니다.
물질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건강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잃은 것이 아니라
소망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용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당하는 이 현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경을 보면서 과거의 원인 분석에 급급했으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나타내실 미래적 의미를 생각하십니다.
우리는 과거에 매입니다.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라고.
여러분, 과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합시다.
누구 때문이었는지, 무엇 때문에 불행해졌는지 아무리 두고두고 시비해 보아야 이 추상적인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이제 쓸데없는 변론은 버리시고 미래적인 하나님의 그 신비한 경륜, 그 구속사적 의미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이 현실을 통해서 앞으로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그 경륜을 깨닫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나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고,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요셉이라는 사람은 17세에 형들에 의해서 팔리어 노예로 갑니다.
노예생활, 감옥생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치렀지만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어 가정을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하고 영광을 얻게 됩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가 사자굴에서 나올 때 얼마나 영광스럽게 되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억울하게 빌립보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서 나올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합니다.
얼마나 통쾌하고 멋진 happy ending 입니까!
예수 믿는 재미, 기대됨.
오늘 예수님은 이 고난을 창조적인 기회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로 만드십니다.
인생의 기회는 성공으로 오기보다 실패로 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고난은 기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닥친 역경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는 모든 형편, 모든 상황이 다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무리 불행한 여건이라도 이 소경이 예수님을 만났기에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만남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속에서 창조의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나는 순간 예수께서 그에게 믿음을,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저는 본문 4절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를 읽을 때마다 늘 감격합니다. 우리가 하여야 하는데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그렇습니까?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
수단이 올바르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찬들의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가나안 정복, 하나님의 방법으로 했을 때 승리.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죄를 인정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명합니다.
이것 때문이다, 저것 때문이다, 변명하기도 하고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지 죄는 죄입니다.
죄는 죄다, 하나님 앞에 죄다,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인정한 때에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고 진정한 회개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절실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여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응답을 받으면 보통 끝이라고 생각들 하고 샴페인을 터뜨리지만 그때부터 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려면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응답은 하나님께 받는데 문제 해결은 내 방법대로.
자, 여러분들 예수님께서 그를 붙잡고 오늘따라 참 이상한 일을 하십니다.
보통은 눈을 만지시며 눈을 뜨라고 하시는데 오늘은 그게 아닙니다.
침을 뱉어서 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십니다. 그리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십니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이 사람 눈에 진흙을 으깬 채로 더듬더듬 실로암까지 내려갑니다.
마음 속에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말씀에 순종해서 갑니다. 저는 이 사람의 믿음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런데 실로암까지 가서 자기 손으로 눈을 씻자 눈이 떠지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믿음입니다. 그는 모든 불합리한 것을 참았습니다.
모든 비난도 참았습니다. 모든 의심도 극복했습니다. 오직 조용하게 위대한 믿음으로 위대한 순종을 했습니다. 그러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신앙생활 좀 잘하려고 하면 옆에서 얼마나들 비아냥 댑니까?
누군 안해봤나? 뭐 그렇게 유별나게 굴어.
그런 말 다 무시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대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순종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마’입니다. 이 말의 원뜻은 ‘듣는다’입니다.
사무엘은 곧 ‘샤마엘’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이것이 사무엘입니다.
우리도 그 사람 참 말 잘 듣는다 하면 그냥 청각으로 듣는다는 얘기가 아니지요, 그 말을 들어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말 잘 듣는다, 안 듣는다는 행동이지 귀로 듣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듣는 마음, 인생을 바로 사는 지혜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각장애자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눈이 떠지는 기적을 경험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각지도 않은 고난을 당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고난이라고 하는 현실은 있습니다.
지금 당하는 역경이 아무 의미 없는 고난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나는 그 의미를 모르고 있으나 하나님께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목적 없는 고난을 당하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대책이 없으나 하나님께는 대책이 있습니다.
주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나아갑시다.
그리스도와의 바른 만남이 있는 순간 우리는 다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언젠가는 다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바른 만남과 온전한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상 9-15장
9장
1-4절 암나귀를 찾는 사울, 2절
5-17절 사무엘을 찾는 사울, 16-17절
18-27절 왕으로 소명을 받는 사울
10장
1-8절 기름부음 받는 사울
9-16절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울, 12절
17-27절 왕으로 선출되는 사울, 20절, 21절, 27절
11장
1-5절 길르앗 야베스의 위기, 5절
6-11절 암몬죽을 쳐서 부스는 사울, 6절
12-15절 왕으로 즉위하는 사울, 15절
12장
1-5절 사무엘의 양심 선언
6-18절 백성들에 대한 책망과 경고, 16절
19-25절 사무엘의 마지막 권면, 23젉
13장
1-7절 사울의 모험적 군사 행위
8-14절 사울의 범죄, 9-10절
15-23절 이스라엘의 전력, 19절
14장
1-15절 요나단의 신앙과 승리, 6절
16-23절 이스라엘의 대승
24-46절 사울의 망령된 맹세
47-52절 사울의 업적과 그 가계 49절
15장
1-9절 사울의 불순종, 9절
10-23절 사무엘의 책망과 사울의 변명
24-35절 사무엘과 사울의 결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