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어려워서 잊지 못할 2020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코로나 19는 우리들이 지금까지 당연하게 누리던 많은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창궐,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제 바로 우리 옆에 침투한 느낌입니다.
다들 경계심을 가지고 조심들 해야.
오늘도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하여 동영상이 동시에 나가고 있기 때문에 장소는 다르지만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들 잘 이겨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목회자로서 바라는 것은 신앙이 후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한 세상 살아가노라면 여러 가지 일을 만납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승승장구할 때가 있습니다.
반면에, 질병으로 고생할 때도 있고, 경제적인 위기를 만날 때도 있고, 가정적으로 혹은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어제까지 형통하다가 오늘 와서 형편이 반전되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생은 내가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듯이, 믿는 우리들도 때로는 곤고한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고, 고난이 중첩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항상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한시라도 잊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시편 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하나님의 자녀됨을 얼마나 실감하며 사느냐가 우리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오늘은 2020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매번 연말이 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세월이 빠릅니다.
순식간에 1년이 지나가버린 느낌입니다.
여러분, 왜 연도수가 중요하고 연말연시가 중요할까요?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연도가 바뀐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뭐가 달라지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연도수가 바뀌는 것을 중요시 여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주한 일상의 삶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던 우리가 잠시 멈추어서 인생을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연말이 있고 송년주일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기 때문.
교회적으로 보면 새하늘 교회형 성경일독표 신약편을 만들어서 1년 동안
통독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성경일독표 구약편을 나누어 드릴텐데
한분도 빠짐없이 참여해서 2021년은 전교인이 성경일독을 같이 함으로
신앙이 자라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시니라.” 참으로 장엄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믿어지면 믿음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경이 태초라는 말로서 전하고자 하는 바는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있음이, 또 너의 있음이, 우리의 관계가 시작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언제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삶이 제 아무리 비루하고 남루해 보여도 우리의 '있음'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존재하게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삶이 소중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의 삶은 성실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함부로 다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속담 가운데 “시간은 그 앞머리로 잡아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을
뤼지푸스란 조각가가 동상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동상 발 밑을 보면 날렵한 날개가 달려 있고,
앞머리는 풍성한데 뒤는 매끈한 민머리, 대머리라고 합니다.
이 동상 밑에는 이런 문답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왜 그대는 발 밑에 날개를 달고 있는가?”
“빨리 날아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앞 머리는 왜 그토록 풍성한가?”
“내가 다가 갈 때엔 누구나 붙들 수 있도록.”
“왜 뒷머리는 대머리인가?”
“내가 떠나고 나면 아무도 날 붙들 수 없도록.”
이것이 바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똑같이 주신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잘 붙잡은 사람들.
기회는 여러 번 오지 않기 때문에 왔을 때 붙잡아야 합니다.
신앙도 그런 면에서 선택과 결단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멋진 피날레로 인생을 마친 인물, 모세가 등장합니다.
모세는 흔히들 모세오경의 저자라고들 합니다.
모세가 받은 감동이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후대에 가서 쓰여진 책.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오늘 신명기 34장은 모세오경의 마지막 부분, 피날레입니다.
그는 이제 120세에 도달해 있습니다.
한 마디로 파란만장했던 일생이었습니다.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바로의 압제로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우신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애굽 공주의 양자로 궁궐에 들어가 40년 동안 애굽의 왕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히브리 민족이 핍박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그후 40년 동안은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으로 처갓집 더부살이를 하면서 살다가 어느 날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40년 동안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하여 진군하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온 120년 세월이 마치 주마등처럼 모세의 눈앞에 스쳐갔을 것입니다.
이제 그가 떠날 날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하고 홀로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이 느보 산 중에서도 가장 높은 최고봉인 비스가 봉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합니다.
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눈으로만 보게 하셨습니다. 신명기 34:4
인간적으로 보면 아쉽고 섭섭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는 거기까지,
모세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수긍하고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입니다.
34: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그때 모세가 120세였는데도 기력이 쇠하지 않고 정정했습니다.
34:7 그는 기력이 쇠해서 죽은 게 아니었습니다.
사명을 다해서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고 모세는 그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처럼 모든 사명을 다 마치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여호수아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의 생애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34: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이래서 모세를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슬람에서도 모세는 예수와 같은 반열의 존경받는 선지자.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는가 하는 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성경은 복된 죽음을 요한계시록 14:13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결코 복되다고 말하지 않지만 ‘주 안에서 죽는 죽음’은 복되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살다가 죽는 죽음, 예수 믿고 천국을 소망하다 죽는 죽음은 복되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영원한 안식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얼마나 많이 수고하고 애쓰며 살아갑니까? 그런데 그 모든 수고를 마치고 안식하게 되었으니 복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믿음으로 수고하고 애쓴 결과 천국의 상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정말 이 말씀대로 오랜 세월 수고한 모든 삶을 마치고 이제 천국의 안식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모세처럼 죽은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바울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해 치열하게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순교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적 서신이 디모데후서인데, 그 중에 마지막 부분에 그의 최후 고백이 나옵니다.
디모데후서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그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천국에 들어갈 것과 주님 앞에서 상을 면류관을 받을 것을 당당히 선언합니다. 마라톤 선수가 완주를 하고 결승점을 통과할 때의 모습과 비슷한 장면입니다. 얼마나 멋진 장면입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다 이 세상을 떠나는 그 날은 하나님을 뵙는 날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 살 동안에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을 보면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가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 당시 거울은 청동.
그 때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을 뵈올지 생각하면서 마치 결혼 날짜 받아놓은 신부처럼 나 자신의 모습을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면 즉시 천국 갈 수 있지만, 아직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 사명이 남아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는 시간을 두고 성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겁니다. 마치 안경알을 닦듯이 우리의 영혼을 맑고 투명하게 갈고 닦으며 수련을 해야 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면 다윗의 귀중한 깨달음이 나오는데 그는 내가 가치가
있기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비로소 내가 인간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평가해 볼 때 내가 쓸모가 있어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아직 멀었습니다.
다윗의 고백은 구제불능인 인간을 하나님께서 먼저 엄청나게 사랑해 주시고 또한 깊이깊이 사랑해 주시기에 내가 오늘날 가치있는 존재가 되었다, 또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성화의 과정은 심은대로 거둔다.
이 엄연한 진리 앞에 우리는 좀 더 숙연해져야 합니다.
내가 심은대로 거둔다 이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고로 우리는 부지런히 심어야 합니다.
또 심었으면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오늘 심고 오늘 당장 거두는 게 아닙니다. 오늘 심어 놓고 10년 후에 거두기도 하고 20년 후에 거두기도 하고 때로는 나 죽은 후에 거두기도 합니다.
모세도 죽은 후에 거둡니다. 여호수아가.
반드시 거둡니다. 그런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고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조급해하며 당장 눈 앞에 있는 사건 하나하나로 울고불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쓸데없이 조급하게 판단했다가 뒤늦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부끄러워 하지는 않았습니까?
기다리되 낙심하지 말고, 초조하지 말고 느긋하게 기다릴 것입니다.
언젠가 반드시 결과가 올 것입니다.
모세에 대한 평가를 10절에서는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라고 합니다. 그는 늘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래 함께 하면 닮기 마련입니다. 모세는 세월이 가면서 점점 더 하나님을 닮아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어떤 사람이 됐습니까?
민수기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는 사람을 때려서 죽인 사람, 다혈질의 사람이었지만 온유해진 사람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고린도후서 4:16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의 성화 목표는 예수님의 모습 딱 거기까지,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정진해야 합니다.
모세는 아름다운 작별로 멋진 피날레를 장식합니다.
모세가 떠날 때, 그리고 떠난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십시오. 백성들이 얼마나 슬피 울며 애도했는지 모릅니다. 34:8
여러분, 모세와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성경을 통해 더듬어 보십시오.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습니까? 백성들의 반역과 핍박, 심지어 모세를 죽이려고 달려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끊임없이 그들을 사랑했고 그들을 섬겼습니다. 고운 정 미운 정 다 들었습니다.
백성들은 떠나가는 모세의 모습을 보면서 울며불며 30일 동안이나 애곡합니다. 아름다운 작별의 장면입니다.
여러분, 송년주일을 보내면서 1년을 마무리하는 가운데 내 인생의 피날레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족하지만 다행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2021년이라는 기회를 새롭게 주십니다.
부디 이전보다 더 잘해서 한 해 한 해 변화된 모습으로 살다가 언젠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모세처럼 멋진 피날레를 장식하며 천국에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