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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창세기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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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행복론에서 행복에 대하여 이렇게 설파하였습니다. “행복이란 소유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성취감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자원해서, 자발적으로, 스스로 선택해서 ‘온 몸으로 함께하며 동참할 때, 행복이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행복합니다. 

그러나 연주하는 사람이 더 행복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귀한 성가대의 찬양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들어서 행복합니다마는 성가대원들은 부르면서 행복합니다. 

그런데 누가 더 행복할 것 같습니까? 저분들이 훨씬 더 행복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선한 일을 할 때, 의로운 일을 할 때 그거 좋지 하고 말만 하지 말고 몸을 바쳐서 봉사하라, 이것입니다. 

거기 진정한 행복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돈 버는 것을 생의 목적으로 삼고, 돈만 있으면 모든 행복이 다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돈을 번 부자가 있었습니다. 소원대로 돈을 많이 벌었는데 그만 유감스럽게도 몹쓸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분들 살만하면 죽게 됩니다. 

이 많은 돈을 두고 갈 생각을 하니 너무너무 가슴이 아파서 이걸 어떻게 할까 하다가 다만 얼마라도 가지고 가야 하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믿을 사람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세 사람을 지목했다고 합니다. 

목사, 의사, 변호사가 그들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세 사람 중의 하나는 제대로 해주겠지, 하고 세 사람을 불러서 백만 불씩 현금을 주고는 “내가 죽은 다음에 관에다가 이거 좀 넣어 주세요”라고 부탁을 했답니다.

장례식 날 세 사람은 약속대로 관에다가 돈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먼저 목사님이 마음이 좀 괴롭다고 하면서 참회를 합니다. “사실을 제가 십일조를 떼었거든요” 그게 좀 마음에 걸린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의사는 “나는 지금 캄보디아 선교를 위해서 병원을 건립하고 있는데 고인도 선교에 뜻이 많았기 때문에 50만 불을 떼었습니다.”

그랬더니 변호사가 펄쩍 뛰면서 “아니, 그게 어떤 돈인데 그걸 뗍니까? 

나는 전액을 다 관에다 넣었소. 현금은 내가 갖고 어음이긴 하지만”

여러분, 생각할 바가 많습니다. 못 가지고 갑니다. 

 

창세기 12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 여호와 하나님이 지시하는대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납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이었습니다. 동으로 가든 서로 가든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선택하고 그가 인도하시는대로 살아가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사람이란 어쨌건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에게는 주어진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추구하고 사느냐,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사느냐,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하여 내가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선택할 때도 기도, 돌이킬 때도 기도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롯이라는 조카가 있었습니다. 

그 조카 롯은 삼촌이 좋아서 그리고 그가 가는대로 따라갔습니다. 

동으로 가면 동으로, 서로 가면 서로, 애굽으로 가면 애굽으로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벧엘로 돌아옵니다. 

어쨌든 그는 아브라함이 선택한 길을 그대로 따라 갔습니다. 

아브라함을 좋아했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땅이 좁아서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소와 양이 많이 있었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삼촌네와 함께하기에는 땅이 좁으니 두 가정이 갈라져야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말합니다.

‘나를 떠나라. 이제는 네가 그만큼 컸으니 나를 떠나라’

이래서 두 가정이 갈라지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 시간에 또 다시 택함받은 자의 모습으로 중요한 선택을 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 하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지혜 중에 가장 큰 지혜가 우선순위(priority)의 분별입니다. 

무엇이 중요하냐, 그것을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생각했습니다. 

화목이 중요하다. 화평이 중요하다. 우리 다투지 말자, 그래서 그는 조카에게 양보를 합니다. 무릇 양보 없이 화평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화평은 상당한 대가를 필요로 합니다. 아파트 살면서 깨닫게 됩니다.

내가 손해 보지 않고 화평은 없습니다. 화평을 원하고 화평해야겠다고 하면서도 양보하지 아니하고 내 잇속을 차리려고 하니 화해가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많은 사람들이 단결해야 되겠다, 하나 되야 되겠다, 하면서도 하나가 안 되는 것을 봅니다. 

조금도 양보할 마음이 없으니 하나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은 크게 양보합니다. 

이렇듯 크게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너 가지고 남는 거 내가 가지마‘ . 

이 마음이 참으로 복된 자의 마음이요 선택받은 자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양보, 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다른 사람 다 좋은 거 가지고 나서 남는 거, 궂은 일, 그거 제가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사무엘의 하나님의 계시의 음성을 듣고는 이새의 집에 방문해서 아들들을 선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다윗은 형들이 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사무엘 앞에 나아가고 있을 때 혼자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 마음이 복 받는 마음입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 주차장 봉사, 은혜 받고 입구에서 교인들에게 인사를 열심히 했습니다. 장로님이 본인이 하겠다고, 그 후 사람들 잘 안 가는 유대인 주차장으로, 거기서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쓰겠다!

 

오늘 아브라함이 이렇게 양보하고 있습니다. 

‘네가 가지고 나서 남는 거 내가 가지마’ 

 

그런 아브라함에 비해서 롯은 어떠했습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이 조카 좀 얌체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삼촌이 그렇게 

말하면 ‘무슨 말씀입니까, 삼촌 먼저’ 이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세상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이 사람, 그런 말이 없습니다. 그 너그러운 삼촌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요쪽을 내가 갖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물이 넉넉하니 비옥하여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고 성경이 말씀하는 그 쪽을 넙죽 선택합니다. 

이 선택하는 기준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오직 부요함만 생각했습니다. 삼촌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이라고 했습니다. 

보는 것 중요합니다. 무엇을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화려함을 보는 것, 외형을 보는 것, 겉을 보는 것, 안됩니다. 

사람도 겉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속을 보아야 합니다. 

겉만 보다가 많은 실수를 하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계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오늘 롯은 화려한 것만 보고 풍요만 보았습니다. 물질적인 세계만 보았습니다. 거기서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결국 13절을 보면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동성애자들을 뜻하는 소도마이트,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데, 믿기는 믿는데 돈밖에 몰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도 그저 부자 되게 해 주십사. 였습니다.

부자되게 해달라고 몇 년을 기도했는데도 부자가 못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설교 시간에 목사님이 기도는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백만불만 주세요, 백만불만 주세요”

그런데 몇 년 기도해도 또 응답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고쳐서 기도합니다. “백만불을 주시면 십일조를 바치겠습니다. 그러니 백만불 주세요”

그런데 그것도 응답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먼저 십일조 떼시고 남는 거만 나 주세요”

시종일관 그저 돈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가치관의 기준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 관이 문제입니다.

 

오늘도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끌어안고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해서 문제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도 그러했습니다. 

몸은 애굽에서 나왔으나 마음은 애굽을 떠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는 모두 성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콩밭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은 그리스도인인데 그 중심에는 아직도 세상 것에 연연하는 욕심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때문에 깨끗하고 시원스러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어중간하게 지낼 것입니까? 

열왕기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좀 더 시원하게, 화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겠습니까? 

 

지난 주일 예배 후 진이 엄마가 다빈이 엄마에게 여름 YWCA 캠프에 대하여 물어봅니다. 진이가 캠프를 가고 싶어 하는데 다빈이는 어떻게 했어요?

다빈이가 좀 반항은 했지만 안된다고 했다고. 

진이도 좀 실망했지만 자기도 안 가겠다고.

 

오늘 말씀을 보면 참으로 기막히고 충격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12절 “롯은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자기 장막에 머물지 않고 소돔과 고모라, 그 죄악의 도성으로 자꾸 옮겨 갔습니다. 이처럼 일단 세속 문화에 발을 들여 놓은 롯이 점점 죄악의 깊숙한 세계로 빠져 들어 갔듯이, 보이는 현실의 풍요와 화려함에 눈이 먼 자는 마치 부드럽게 집어 삼키는 수렁과도 같은 죄의 심부로 빠져들어 가고 맙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이렇게 말합니다. “롯은 장차 낙원 속에서 살 것이라고 상상했으나 지옥의 심연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사람의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이 뭐냐하면 불행할 줄을 알면서도 그쪽으로 계속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한 번만 더, 딱 한 번만 더, 금년까지만, 한탕만 더... 잘못된 길인줄 알면서 그쪽으로 계속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잘못된 선택이 멸망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롯은 멀리서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았지만 그 속은 보지 않았습니다. 

그 죄악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뒤에 깨달았어도 그는 돌이키지를 못했습니다. 이 땅은 망할 것이다, 생각하고 벌떡 일어나서 나와야 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죽어버렸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그는 선택을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선택을 수정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나는 무엇을 선택하고 살아왔습니까? 내가 한 선택이 바로 된 선택이었습니까? 끊어야 할 것은 빨리 끊고, 돌이켜야 할 것이라면 지금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하고 환경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행복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바른 선택을 해나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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