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 가운데 하나가 보상심리입니다.
모든 영역,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가정과 교회에서까지도 보상을 통하여 떳떳하고 당당해지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결코 우리가 갚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상심리에 익숙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나설 때도 그러한 태도로 나서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을 행함으로써 그 죄책을 보상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보상심리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그들을 받아주지도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의 전반도 보상심리에 물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멸망으로 향하던 유다 백성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보상심리에 물들어 여전히 불순종과 타락의 길을 걷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어려움이 다가올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무엇과 어떤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보상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무엇과 어떤 일”을 받아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어떤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갚을 것인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우리들의 삶의 태도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에 관심을 두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가에게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포로로 지내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제사를 지내면 좋겠습니까? 일 년 된 송아지 하나를 잡아서 번제물로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일 년 된 송아지의 의미는 가장 귀한 것. 동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바치면 되겠느냐고 묻는데,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같은 기름, 많은 양의 재물.
“그렇다면 맏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면 되겠습니까?”
사람을 불태우는 방법은 몰렉 신 숭배에서 등장하는 제사 방법.
신체의 일부분, 자해하는 행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나안의 문화에 얼마나 젖어 있는가.
하나님은 그것도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그 어느 것을 바쳐도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 이래로 이스라엘은 율법에 따라서 항상 무언가를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아무것도 받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번제물이 없으면, 이스라엘의 성전예배는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심각한 질문에, 미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받고 싶은 번제물은 정의를 실천하고 나의 사랑을 실천하고, 나와 함께 겸손히 행하는 것이다.”
정의를 실천하고, 사랑을 행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이 세 가지 제물만 받겠다고 미가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예배 속에 정의와 사랑과 겸손이 빠져 있을 경우에는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신다면, 그것은 우리 예배에 정의와 사랑과 겸손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신앙생활도 형식과 겉치레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질보다는 비본질적인 것이 그 중심에 자리 잡을 수가 있다는 것을 지적해 줍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간단히 말하면 신앙생활의 본질을 되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형식과 겉치레가 아니고 본질 그 자체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본질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의 문제는 한 마디로 요약해 보면 6절에 기록된 대로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라는 잘못된 신앙적 열심에 있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 무엇을 바칠까, 얼마나 많이 바칠까, 무엇을 할까 라는 문제에만 골몰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것인가를 고심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주일마다 성수 주일하는 것이 귀하고, 정성을 다해서 십일조를 드리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봉사를 하는 것도 참 귀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빠지면 안 됩니다.
봉사를 해도 하나님이 빠진 봉사, 하나님이 없는 선교.
하나님의 이름이 없는 선행.
받은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없이 행해지는 열심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생활이 하나의 일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신앙생활의 본질인 믿음에 대한 관심보다는 신앙생활의 형식인 일에만 신경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점점 본질은 간 데 없고 껍질인 형식만 남게 됩니다.
이사야 1:11을 보면 형식만 남은 신앙생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너희의 무수한 재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믿음 없이 드리는 예배, 믿음 없이 행하는 봉사, 믿음 없이 드리는 헌금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이 허사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28을 보면 제자들이 주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주님의 제자들도 온통 관심이 일에 쏠려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29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일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일보다 믿음이 우선이라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신앙생활의 본질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줍니다.
8절에서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1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우리는 내가 가진 그 어떤 것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드리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받고 싶어 하시는 우리의 믿음의 삶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첫째가 정의를 행하는 삶입니다.
정의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의 도를 행하는 것을 의미.
정의란 히브리어로 미쉬파트라는 말인데, 이 단어는 재판에서 쓰여 지던 말입니다. 재판장이 공정하게 판결한 것을 가리킬 때 미쉬파트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 한 복판에서 살 때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옳고 바르게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정의의 진정한 의미는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는 사회.
사람사는 세상, 사람 위에 사람없고 사람 밑에 사람없는 세상.
둘째, 인자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인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이 말은 은혜, 사랑, 긍휼, 인자라는 뜻으로 두루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 이웃의 어려움을 돌아볼 줄 아는 삶, 이웃의 아픔과 함께 할 줄 아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특별히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받았고, 또 지금도 그 헤세드를 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태양 빛을 받아 지구에 그 빛을 반사하는 달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그 헤세드를 이웃에게 나누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한국 보수의 문제점, 나누질 않는다.
미국 보수인 공화당은 기부를 많이 하나 우리 나라 보수들은 어떻게 하면 내 걸 지킬까, 없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다.
잠언 19:17에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꾸어드리면, 하나님은 원금에 이자, 그리고 누르고 넘치게 하여 안겨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겸손히(짜나)”란 단어는 낮은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 5:5에서도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은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고 지시하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는지 여부를 하나님께서 살펴보십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역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한 보상심리로 무엇인가를 드리며,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먼저 세상 속에서 삶의 태도를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예배의 본질은 바로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고,
신앙의 본질은 바로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입니다.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