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가정의 달이고 기독교는 가정적인 종교입니다.
왜?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창조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창조 역사의 클라이맥스(Climax)로서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나게 하시고 가정을 이루게 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창조 역사의 마지막은 가정을 이루는 데에 초점을 두고 전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맨 처음 이적을 나타내신 곳도 가나의 혼인잔치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만든 공동체는 가정과 교회 두 개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회사를 설립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학교를 세우신 적도 없으시고 국가를 세우신 적도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복의 비밀을 이 가정과 교회 안에 숨겨 두셨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과 교회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담의 갈비뼈가 뽑혀진 다음에야 가정이 만들어졌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다음에야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가정과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희생, 즉 헌신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현대인의 이혼사유 중 가장 많은 것이 성격 차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느냐 하면 희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포기란 있을 수 없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행복은 ‘얼마나 좋은 배우자를 만났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좋은 배우자가 되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행복한 부부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독창이 아니라 합창입니다. 목표를 하나로 맞추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부단한 자기희생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부부는 ‘마음과 뜻을 합하여 함께 살아가는 부부’일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그랬습니다.
이들은 로마에서 살다가 로마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에 의하여 강제 이주를 당해 고린도까지 쫓겨 오게 됩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졸지에 보따리를 싸고 만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사업 터를 잃고 떠돌이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낯선 외지인 고린도까지 오게 되었고 거기서 장막 만드는 일을 하다가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직업도 tent maker.
그 후 사도 바울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 나섭니다.
어디든지 바울을 따라다니다가 나중에는 바울보다 먼저 로마에 들어가 세계 선교의 비전을 함께 이룹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 부부를 “나의 동역자”라고 자랑스럽게 부릅니다.
함께 수고하고 함께 헌신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가정생활과 신앙생활은 헌신하는 만큼 성숙하고 성화되는 것입니다.
헌신하는 만큼 하나님께 고귀하게 쓰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헌신하지 않는 한 결국 무용지물이 됩니다.
건강, 재물, 재산, 재능, 실력, 사회적 신분, 수준 높은 학력과 지식, 기술,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그런 마음을 잘 표현한 찬양 한 곡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오늘 읽은 본문은 다섯 절 밖에 되지 않는 적은 분량이지만 의미상으로는 세계역사를 바꾸어놓는 엄청난 사건, 유럽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어 놓은 전환점(turning point)이 되는 사건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미개하던 유럽은 오늘 본문 이후로 기독교를 접하게 되고, 그 후 지난 20세기 동안 세계를 주도하는 시구 문명의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이후에 서양의 운명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의 연구’를 쓴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 때 드로아에서 바울을 태우고 마게도냐로 가고 있었던 그 배가 바로 유럽의 역사를 바꾸는 배이었으며, 유럽의 문명사의 미래를 안고 가던 배었다고 증언합니다.
바울이 전도를 하는데 자꾸만 막혀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드로아, 트로이에서 마게도냐 사람이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하는 환상을 보게 되고 건너가서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이 11절을 보니 네압볼리.
2004년에 교회를 개척하고 교인 분들과 같이 성지 순례를 세 번 갔는데
그 첫 번째가 2008년 4월에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간 것이었고,
두 번째가 2010년 5월에 그리스, 터키를 다녀 온 것이었는데, 그 두 번째
성지 순례 마지막 지점이 그리스의 ‘까발라’(Kavalla)라는 도시였는데, 인구 약 8만 명의 자그마하고 아름다운 항구 도시입니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밤중에 그 아름다운 항구를 거닐었던 기억이 납니다만 이 작은 항구도시는 기독교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까발라가 바로 사도 바울이 유럽에 최초로 발을 들여 놓은 항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6장 11절에는 ‘네압볼리’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이 네압볼리에 가보니 그리스 정교회가 세운 ‘바울 도착 기념교회’라는 것이 있는데 이 교회 정면에는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선교의 방향을 바꾸어 네압볼리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그 앞에는 사도 바울이 처음 디뎠던 발자국이 찍혀 있는 바위 돌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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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인도하기 위해 쓰시는 가이드가 바로 성령입니다.
본문을 잘 관찰해 보면 바울이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성령이 그의 진로를 인도해 가심을 알 수 있습니다. 6절, 7절, 10절. “6 성령이 ... 7 ... 예수의 영이 ... 10 ... 하나님이 ... ”
하나님은 성령의 음성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여기서 인정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분별력(Spiritual Sensibility)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45:1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의 눈이 열리니 하나님이 하셨다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영의 눈이 열린 사람에게는 원수도 사랑으로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이걸 인간적으로 하려고 하니까 되지를 않고 위선.
성령의 능력으로야만 고레스가 적군이 아니라 하나님이 쓰는 도구로 보이게
10절에서 바울이 환상을 본 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환상을 본 후에 곧, 바로 떠나려고 힘썼습니다.
곧 바로 순종했다는 말씀입니다.
환상 본 후에,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서 준비하고 제 할 일 마칠 때까지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곧 바로 떠났습니다.
하나님 잠깐만요,
사도 바울이 전도하려고 했던 지역은 ‘소아시아’(Asia Minor)라고 부르는 오늘날의 터키 지방입니다. 선교학적으로 보면 사도 바울은 주로 대도시 중심의 선교를 했는데 당시 상황에서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일단 다른 곳은 바라보지 말고 소아시아만 집중해서 선교하자, 그리고 인구가 많이 모이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선교하자, 두 가지 전략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렇게 좋은 계획인데도 사도 바울의 전략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사야 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이 과정에서 성령님이 사도 바울의 길을 막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과 7절을 보면 바울은 성령이 막으신다는 것을 깨닫고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브르기아와 갈라디아를 통과해 무시아에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라는 항구도시에 머물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은 간혹 일어납니다. 내가 계획대로 가려고 하는데 모든 환경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분명 기도하고 하는 일인데, 아무리 봐도 크게 잘못된 계획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뭐가 잘 안 되고, 자꾸 일이 꼬이고, 환경이 어려워지는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럴 때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럴 때 영적으로 예민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두 번이나 성령님이 막으시자 드로아에 머무르고 있는데 과연 성령님의 분명한 지시가 내려옵니다. 밤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환상 속에 나타나 바울에게 요청합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이 때 복음이 유럽으로 안 넘어가고 바울의 계획대로 소아시아에만 머물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바울이 성령님이 막으시는데도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거나 환상을 본 후에도 개꿈이라며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소아시아에서만 선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바로 그 때,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았을 때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고 순종하여 유럽으로 건너가지 않았다면 복음은 이 지방에만 머물렀을 것이고 나중에 이 찬란한 기독교 유적, 그러나 자취만 남은 유물들처럼 기독교는 결국 몰락하고 이슬람의 땅 속에서 사라져가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와서 우리를 도우라’ 이 음성이 들리십니까? 그 현장이 어디입니까?
바로 나의 이웃이고, 나의 삶의 현장에서 매일 매일 만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붙여 주시는 영혼들일 것입니다.
이제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귀울여서 도와 달라는 마음의 울부짖음을 들읍시다. 이제는 마음을 더 넓게 열어서 그들을 품고, 또 손을 더 넓게 펴서 돕는 자가 됩시다. 그리고 천국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돌아온 탕자를 품듯 그 마음으로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