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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벤에셀의 하나님 (사무엘상 7: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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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들어 첫 번째 주일은 부활절이었고 특별감사헌금으로는 

군산 금암교회를 도왔습니다. 

 

군산 금암교회 동영상과 편지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에 편작이라고 하는 명의가 있었습니다. 

그는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고 하는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삼 형제 중 막내였는데 그의 두 형 모두 의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형들은 도대체 의원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소문이 나지 아니하고 오로지 편작만이 유명할 따름이었습니다. 

어느 날 왕은 친히 이 편작을 불러서 물어 보았습니다. 

“그대의 형님들도 모두 의원이라고 했는가?”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삼형제 중 누가 최고로 훌륭한 의원인가?”

“그야말로 큰 형님이 최고로 훌륭한 의원입니다. 작은 형님 또한 저보다 휠씬 훌륭한 의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사실 저는 삼 형제 중에서 가장 낮은 수준입니다.”

그러자 왕이 묻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편작이 조용히 설명합니다. “저의 큰형님은환자의 얼굴빛만 보고도 그가 

무슨 병에 걸릴지를 미리 아십니다. 그래서 병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치료하시지요. 반면에 환자는 자기가 아프지 않으니까 고마운 줄도 모르고 형님의 훌륭함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또 작은 형님은 환자의 증세가 미미하게 나타났을 때 그 병을 알아채고는 거기에 맞는 방법으로 치료하십니다. 

그래서 환자들이 고맙게 여기기는 합니다마는 누구나 고칠 수 있는 병인가 보다 생각하고 형님을 높게 평가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병이 커지고 환자가 아주 큰 고통을 느끼고 죽을 지경이 된 다음에야 압니다. 그래서 수술도 하고 독한 약을 써 가면서 치료를 합니다.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저를 정말 좋은 의원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대로 두 형님, 그 중에서도 큰형님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의원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평범한 중에 일상 생활에서 받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별로 의식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주어지는 것처럼, 자연히 주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니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메스컴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큰 일이 터질 뻔하고 무사히 넘어가면 그것은 뉴스거리가 되지도 않습니다. 꼭 무슨 일이 터져야 한동안 뉴스거리가 됩니다. 

그리고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일이 그 속에 있고 충분한 원인이 있는데도 무너지지 않고 있는 동안은 사건이 되지 않습니다. 무너진 다음에야 큰일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련의 그 많은 사건들이 벌써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비단 오늘의 이야기만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이것을 가지고 다 망했다느니 어떻다느니....  그렇게만 생각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미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환난을 막아 주시기도 하시고, 환난을 피해 가게도 하시고, 환난을 비켜 가게도 하실 때에 이것을 은혜로 깨닫지 못합니다. 꽝하고 부딪쳐야만 압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운전할 때 얼마나 많은 위험이 있습니까?

내 차를 몰고 갑니다. 그런데 저 앞에서 꽝하고 부딪치는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갑니다. 내 차가 부딪쳐야 비로소 지금까지 사고없이 산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구나 하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사하다는 것, 평범함 속에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건강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항상 건강하게 살면 제가 잘나서 건강한 줄 압니다. 사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하루 하루 건강을 지켜 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제 건강에 대하여 감사하느냐 하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서야 비로소 건강했을 때가 얼마나 고마웠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큰 사건에 깜짝깜짝 놀랍니다. 

그러나 사실은 평범한 중에 주신 은혜가 훨씬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것을 의식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올 한 해 동안도 수 많은 사건에 시달렸습니다. 

충격, 충격, 너무도 엄청난 충격이 잇달았습니다. 한 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은 올해는 참 다사다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하기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사다난하지 않은 때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험악한 세월을 얼마나 수용하고 믿음으로 극복하며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상황이라는 것은 그 처지를 대처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보람을 느낄 수도 있고, 힘들어 하며 살아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회심 후 핍박과 고문, 그리고 멸시천대의  험난한 세월을 살면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말하길 고전 15:10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고백하며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2018년 1/3을 보내면서 힘든 삶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려고 애쓰며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 영혼이 평안하고, 삶도 은혜가운데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억합시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셔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오늘 성경 본문은 이스라엘이 숙적 블레셋을 믿음으로 물리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3-4절, 우상제거

 

현대인들의 대표적인 우상은 완전히 하나로 굳어졌습니다.

돈이라고 하는 우상입니다. 돈을 믿고 교만하고, 돈 없다고 절망하고 자살하고... 참으로 별꼴입니다. mammon이라고 하는 우상 앞에 꾸벅꾸벅합니다. 돈 섬기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제거하십니다. 내가 제거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내려치십니다. 내가 못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래 내가 해줄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와서 가나안의 우상을 섬깁니다. 

이에는 여러 가지 곡절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정치적인 타협입니다. 

이곳 가나안의 정착민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마찰이 났을 때에 그들이 섬기는 것을 안 섬기고 자기네들은 하나님만 섬긴다 하게 되면 서로 부딪치게 되거든요 그래서 굳이 그러지 말고 별 것도 아닌데 같이 우상 좀 섬기면 어떠냐 해서 하나님과 우상을 겸해서 섬기게 됩니다. 

그래서 하루는 우상 섬기고, 그들의 종교 행사에 같이 따라가면서 적당히 타협합니다. 소위 안정을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우상을 제거하라고 하십니다.  

먼저 우상을 제하라, 그 다음에 오는 책임은 하나님께서 지신다, 너희는 쓸데없는 정치적 타협이나 종교적인 타협을 하지 말고, 깨끗하게 모든 우상을 다 진멸하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라, 하십니다. 

그 후에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아서 저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하고, 이렇게 결혼해야 하고, 이렇게 농사지어야 하고, 이렇게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하나님 법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마땅히 행할 일에 대하여 강론을 합니다. 지난 날의 잘못된 것은 회개하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다, 하고 저들을 안정시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스바에 모여 있는 바로 이 순간을 기회로 해서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 옵니다.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의 형국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모여 있고, 그 속에 군사들은 없습니다.

신앙 생활 좀 잘하려고 하면 사단이 공격해 옵니다. 

이번 신유은사집회 때에도 안하던 도로 공사를 해서 시끄럽고 급기야

3층이 이사를 해서 얼마나 어수선했습니까?

은혜를 받으려고 하니 별일이 다 생깁니다. 

여러분 그럴 때는 그냥 진행하는 겁니다. 못 들은 것처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는 블레셋 군이 저들을 포위하고 다 없애 버릴 생각으로 의기양양해서 쳐들어 옵니다.

그래서 7장을 읽어 보면 미스바에 모인 이 사람들이 벌벌 떱니다. 

두려워 합니다. 낙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안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아 놓으시고는 사무엘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시킵니다. 

이웃 나라를 걱정하지 말아라. 정치, 경제, 문화, 재난 따위의 걱정은 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다 하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친히 우레를 내려서 블레셋 사람들을 다 흩으시고, 저들이 흩어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가서 치라’고 하십니다. 

비록 훈련 받지 못한 이스라엘 사람들이지만 도망가는 사람들을 따라가서 치기는 쉽지요.

그래서 모두가 나가서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셨습니다. 회개하는 사람들, 신앙대로 살려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이 확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건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이 중요한 상징적 사건 앞에서 사무엘은 기념비를 세웁니다. 큰 돌을 세워 놓고 ‘에벤에셀-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이라 부릅니다.

이 이야기가 본문의 내용입니다.

12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

지정학적으로 오늘 여기까지 도와 주셨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간적으로 오늘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그런 이야기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다시 말해서 애굽에서부터 여기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했고, 우상을 섬겼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스바에 모여서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그래서 에벤에셀,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고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인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오래도록 우리를 참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절을 보면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하나님께서는 오래 오래 참으십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나의 구원이 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오래 참아 주십니다. 

현대인들은 대개 잘 참지를 못합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리모콘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옛날에는 텔레비전 채널을 손으로 돌렸는데 요새는 대개 리모콘으로 누릅니다. 광고 나오는 것도 못 참아서 금새 다른 채널로 돌리지 않습니까? 이리 저리 왔다 갔다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도대체 참지를 못합니다. 라면도 끓이는 걸 못 참아서 ‘3분라면’을 먹습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됐습니까? 초조하여 인내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래오래 참으십니다. 그 인내로 인하여 우리들의 오늘이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금년에도 참아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잘나서 오늘까지 살아왔습니까? 얼마나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았습니까? 우리 민족이 바른 길을 갔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셔서 우리가 있고,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의식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바른 평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조용한 기적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 바로 그 은혜에 대한 기념비적인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먼저 내 우상을 제거하고, 이제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께서 저기까지 도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남은 생을 새롭게 살아가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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