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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손에 있는 것 (출애굽기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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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노총각이 장가도 못가고 고달프게 살아가는데 문득 아 나도 세 가지 소원을 정해 놓아야겠다. 결혼, 여자, 돈

어느 날 TV를 보는데 알라딘의 요술램프가 나오더랩니다. 그런데 문지르니까 어떤 거인이 나와서 주인님 분부하십시오.

아 나도 저 요술램프가 있으면 좋겠다 하는데 어느 날 이 요술램프를 줍게 됩니다. 소원을 이루고자 계속 문질렀다고 합니다.

“주인님, 한 가지 소원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한 가지 소원, 그거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도 최소 세 가지인데. 

결혼, 여자, 돈 그런데 딱 한 가지 소원.

그 사람의 머리 속에는 이 세 가지가 머리 속을 맴돌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은 다가 오는데 이 우유부단한 청년 결정을 못하고 있는데

결국 이 청년의 소원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돈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를 얻으려면 나머지는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 하나의 가치를 진정 알게 되면 나머지 버리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데 우리들의 문제는 믿음이 중요한 건 알겠는데 그 가치가 그렇게 크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선택도 때를 놓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할 수 있을 때에 하지 아니하면 하고자 할 때에 할 수 없게 됩니다. 

할 수 있을 때에 해야 됩니다. 아무 때나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며칠 전 노인 분들이 나와서 아이돌 노래를 부르고 춤추고 하는 것을 보았는데 제 또래들이니까 말씀드리는데 정말 추할 뿐입니다.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름 생기면 생기는가 보다 하고, 흰머리 생기면 생기는가보다 하고, 그러려니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난리들입니까? 

있을 일이 있는 것입니다. It is normal. 자연 현상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단과 싸우는 일도 이길 수 있을 때에 이겨야 합니다. 간단하게 이길 수 있는 것도 한번 때를 놓치고 나면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운동이 좋다고 해도 그것은 건강한 사람의 이야기지, 병든 사람에게 운동하라고 하면 그 사람 운동하다 죽습니다. 될 일이 아닙니다.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할 수 있을 때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버트란트 러셀은 그의 ‘행복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힘을 겸허하게 평가하고 자신의 존재를 겸허하게 평가하는 것이 행복의 근본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자기 성공에 놀란다고 합니다. 

‘아 나는 이만한 사람이 못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복이...’ 자기 앞에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스스로가 놀라면서 삽니다. 

배우자를 바라볼 때도 자기를 아주 낮추고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좋은 남편, 아내를 만나게 해 주시다니’ 감격입니다. 

그런가하면 자기를 스스로 높이며 사는 사람은 자기의 실패에 대해서 놀라며 산다고 합니다. ‘내가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하고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배우자를 바라볼 때에도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어쩌다 저런 인간을 만났단 말인가. 내가 저런 인간하고 살 사람이 아닌데... 이거 하나님이 실수했나 내가 실수했나?’ 이러고 삽니다. 이것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자신이 처한 처지의 의미나 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 가지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거기에다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서 욕망지향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행의 원인이 되고 병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 “이것만 이루어지면 나는 행복해질 것이다” 하다가 그런데 ‘이것’이 이루어지고 보면 이번에는 또 방향을 바꿉니다. “저것만 이루어지면...” 

이 사고방식이 바로 불행의 씨앗인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자 하면 그전에 갖추어야 할 요건들이 많습니다. 

건강도 있어야 하고, 지식도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 더 근본적인 것은 믿음입니다. 어려서는 부모를 믿어야 합니다. 

만일 부모를 전적으로 믿지 못한다면 그 아이는 참으로 불행한 아이일 것입니다. ‘엄마가 좋다고 하면 좋은 것이고, 나쁘다고 하면 나쁜 것이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반대로 ‘엄마가 달다고 하는 것은 쓰고, 맛없다는 것은 맛있더라’ 이렇게 되면 곤란한 것입니다.

부모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있을 때 그 아이가 정상적으로 자라나 행복한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배우자를 믿고, 자녀를 믿고, 목회자를 믿고, 대통령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에 바로 그 믿음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하나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같은 값이면 모세가 좀 더 나이 젊었을 때에 부르셨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을 해 봅니다. 한 40세쯤 되었을 때 즉 바로의 궁전에서 공부도 많이 하고, 공주의 아들로서 권세를 행사하고 있을 그때에 불러서 쓰셨더라면 어땠을까? 왜 하필이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 처갓집 더부살이하며 양치기로 살아가는 80세의 무기력한 목동 모세를 부르셨을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기력도 없고, 의욕도 없고, 욕망도 없는 양치는 현장에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쓰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힘이 빠져야 쓰십니다. 

뭐든지 힘 빼는 게 기본, 안마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너무나도 엄청난 일입니다. 

430년 동안 노예생활에 길들여진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내는 일입니다. 노예로 태어나, 노예생활에 익숙하고, 노예적인 사고 방식에 젖어 버린 사람들, 이 노예 근성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건지라는 것입니다.

노예 근성, 사대주의, 태극기 집회에 왜 성조기는 같이 흔드는 겁니까?

한국 교회의 십일계명 미국 없으면 죽는다. 

그것도 건져서 바로 이웃으로 옮겨 놓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 시내 광야를 지나, 저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인도하라, 

인간적인 상식이나 능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게다가 그것이 된다고 쳐도 모세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이 나를 통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너무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나이 많아 늙었고, 애굽에서 사람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다혈질이라서 성미가 급하고 불같습니다. 허점투성이의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의 구원의 엄청난 역사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나를 통해서 될 일은 아니라고 모세는 거듭거듭 사양을 되풀이 합니다. 

그래서 변명하는 말이 백성들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1절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게다가 10절 이하를 보면 모세는 말을 할 줄 모른다는 핑계까지 댑니다. 

학자들은 그가 아마 말더듬이었을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언지하에 나무라십니다. 

11절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도대체 누구 앞에서 그따위 변명을 늘어놓느냐는 겁니다. 

12절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하나님께서 할 말을 다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궁극적 관심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가 하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그 무엇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묻지만 하나님은 미래를 보십니다. 

그 분은 인간의 부족과 허물을 묻지 않고 부르십니다. 

이미 다 알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나보다도 더 나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며, 나의 약한 것 부족한 것을 다 알고 부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겸손히 아멘하고 화답하는 것.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점이 얼마나 됩니까?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정말 오십보 백보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전반전은

실패했지만 그 실패를 교훈 삼아 후반전을 멋지게 살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오묘한 섭리 중에 사람을 부르십니다. 

도망자되어서 처갓집 더부살이를 하며 살아가던 모세를 이제 들어 쓰시고자 하십니다. 모세가 있고나서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큰 역사 속에 포함된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부족하든 말든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하니 쓰임 받을 뿐입니다. 

이제 모세는 아무 말도, 아무 변명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모세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이런 부탁을 합니다. 

1절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게 굉장하고 깜짝 놀랄만한 능력과 표적을 주세요’ 

굉장한 것, 초자연적인 것, 기적적인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뜻밖입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야기가 그렇게 돌아갈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기대하고 있던 바와는 너무나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아마도 모세는 적이 실망하며 대답했을 겁니다. “지팡이니이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니이다” 

“됐어! 그것이면 됐다.” 지팡이 그 이상의 것을 주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기사와 이적을 행하실 때에는 멀리 있는 것을 가지고 이적을 행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네가 평소에 잘 쓰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다윗이 사용한 무기는 평소에 사용하던 물매돌 다섯 개.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보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능력은 크나 작으나 별 

차이 없습니다. 모세가 능력이 많아서 출애굽의 대역사를 이루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룬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1절을 보면 복된 사람이 되는 조건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가 복되리라,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뿐만 아니라 네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 모든 짐승까지도 복을 받으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복받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네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삼가 듣고’ 무슨 말씀입니까? 행여 놓칠세라 조심스럽게 듣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성공하는 비결로 지능, 지식, 기술, 자세를 듭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attitude, 

듣는 자세, 예배하는 자세, 기도하는 자세, 공부하는 자세...

거기에 운명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듣는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말씀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아 여호와의 지혜가 내 지혜가 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나의 권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듣고 나서 그 들은 것이 다 내 마음에 들 수는 없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 안 드는 것도 있고, 이해되는 것도 있고 이해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이성적 비판을 누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된 길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똑똑한 것 같지만 병든 이성이라 제대로 작용을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 경험과 내 지식이 내 결단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다 버립시다.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귀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역사하실 때에 내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에서 재미있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던지라, 잡으라, 취하라, 치라, 건너라...’

아주 간단한 문장들입니다. 던지라 하시면 던지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던지라 하십니다. 모세는 두 말 않고 던집니다. 그랬더니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다시 잡으라 하셔서 잡으니 도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마술 같은 일입니다. 

보십시오. 손에서 놓으니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다스리지 못하고 놓으면 뱀이 됩니다. 원수가 되고 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4절에 보면 그 꼬리를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무서워도 잡으라 하실 때에는 잡아야 합니다. 

잡으면 나를 돕는 지팡이가 됩니다. 

평범한 지팡이지만 모세는 그 지팡이로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았고, 그 지팡이로 홍해를 갈랐고, 그 지팡이로 반석에서 물을 내었습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내게 있는 것을 그대로 내어 놓는 것 뿐입니다. 

던지라 할 때 던지고 바치라 할 때에 바칠 뿐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들어도 잡으라 할 때 잡는 것이요, 가라 할 때 가는 것 뿐입니다. 그리할 때 기적이 있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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