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설교말씀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누가복음 17:11-19)

목사님 0 1,356

   

 

       ‘윌리엄 로우’라는 분이 기독교의 성자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기독교의 성자는 기도를 많이 했다든가, 금식을 많이 했다든가, 혹은 자선을 많이 베풀었다든가 한 사람이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한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신앙의 깊이를 알 수 있는 기준은 ‘그 사람이 생활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는가?’라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능력이 내 삶에 임하게 하는 통로입니다. 그런데 은혜 받지 않으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절망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은혜를 모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고난과 역경을 하나님을 만나게 해 준 통로, 선물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죽음을 알아야 부활을 압니다. 죽음을 모르는 사람은 

부활의 축복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감사는 감사를 낳고, 원망은 원망을 낳습니다. 감사하느냐 안하느냐는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감사를 선택하면 계속해서 감사와 축복이 나오게 되고 원망하고 불평을 선택하면 모든 일을 할 때마다 원망과 불평만 눈에 보이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10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분도 하나님,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라는 찬양입니다. 

이 찬송을 계속 부르게 되면 숙연해집니다. 

내 부족함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게 됩니다. 감사란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보답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감동입니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은 돈을 벌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오로지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 생명의 위협을 극복하고 대서양을 건너 갔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 모든 고난을 헤치고 신세계까지 간 것입니다. 

그래서 최초의 청교도들은 첫 번째로 교회를 지었고 그 다음으로 학교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은 것이 자기 집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미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내 교회를 발견할 때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생깁니다. 정말 교회가 천국과 같은 곳임을 알게 됩니다. 내 생애에 만날 수 없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배 드릴 수 있는 교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이 이런 우리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에 문둥병자 열 명이 멀리 서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소리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호소했습니다.

12절 “멀리 서서” 문둥병자들은 사람들 곁에 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하시기를 14절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레위기 14장에 보면, 문둥병자가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자기 몸을 보이고 확인을 받아야만 비로소 정상인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문둥병자들의 부르짖음에 예수께서는 그 자리에서 화끈하게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증세는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기도한 사람들의 느낌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해도 문제는 

그대로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보입니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은 믿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상에서는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말 기도의 내용을 믿는다면 행동도 거기 맞추어서 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영의 세계에 영향을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마음의 자세로 기도하느냐가 기도 응답의 가장 큰 조건입니다.

성경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나병환자들나 제사장에게 가다가 어느 시점인지는 몰라도 병이 나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얼굴을 만져보니 감각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도 나병환자는 사회에서 소외당하지만, 과거에는 문둥병에 걸리면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죽은 자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둥병의 흔적이 말끔하게 사라지고 깨끗해 졌으니 그들의 감격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침을 받은 10명 중에서 아홉 명은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우리가 그렇듯이 “우리가 나을 때가 되어서 회복된 것인지 몰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1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성령훼방죄

오직 한 사람 감사한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B.C. 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끌고 가고 앗수르 사람들을 그 곳에 이주시킨 앗수르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아니라 앗수르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아홉 사람한테 감사를 못 받아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 아홉 명의 영혼이 불쌍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찬양하지 않으면 돌들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자연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서 찬양받고 싶어하십니다. 

 

아홉 사람은 이제 병을 고침 받은 마당에 더 이상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이 경우에, 예수님은 병을 고침받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지팡이(clutch)에 불과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즉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지팡이처럼 필요할 때만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지팡이를 의지하듯 예수님을 의지하다가 더 이상 필요가 없으면 지팡이를 버리듯 예수님을 등한시합니다. 

 

우리 모두가 칭찬받은 사마리아 나병환자처럼 감사를 표시해야 합니다. 

감사는 우리 신앙의 초석과도 같습니다. 감사가 없는 신앙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감사가 없는 신앙이 기복 신앙. 그래서 시편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16절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감사하니”

예배를 뜻하는 히브리어 샤카와 헬라어 프로스쿠네오는 ‘엎드린다’ ‘무릎을 꿇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발 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예배드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은 예배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카인과 아벨의 제사, 노아의 제사, 그리고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제사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예배를 금지 당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부르셨는데 그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면서 이 점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12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리기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예배 받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신자에게 의무요 특권입니다. 기쁨입니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못 옵니다.” “우선 급한 일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멀고 시간 많이 걸려 못 옵니다.” 9명의 환자들이 한 말과 같은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의 사람에 속하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볼 때 확률은 10대 1입니다.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감사의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면 우리의 영이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당면한 문제가 해결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열 사람이 문둥병을 고침 받았을 때 아홉 사람은 제사장들을 찾아가서 병 나은 것을 확인받고는 예수님께 감사의 표시없이 각자가 원하는 길로 갔습니다. 사실, 먼저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하여야 했지만 그들에게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방금 전만해도 그들은 큰 소리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쳤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병이 말끔히 나았을 때 발걸음을 돌려 주님을 찾아와서 감사를 드려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아홉은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 아홉 사람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셔서 큰 이적과 기사로 그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홍해를 갈라서 육지처럼 걸어서 건너게 하시고, 뒤 따라 오던 애굽의 마병들을 수장시키셨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께서는 매일 같이 일용할 양식으로 만나를 내려주셨고, 반석에서 생수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광야를 가노라면 때로 험한 길도 만나고 먹고 싶은 음식도 먹지 못하고 고생이 많은 법입니다. 때로 행진을 하다보면 마실 물을 얻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목말라 죽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세에게 몰려와서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고 대들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출애굽 일 세대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수없이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다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 때 즉시로 감사를 실천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건 적절한 때가 있는 법입니다. 이는 감사하는데도 마찬가지입니다. 농부가 씨 뿌릴 때를 놓치면 농사를 망치듯이, 감사도 때를 놓치면 감사다운 감사를 드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할 일이 있거든 즉시로 “하나님, 감사하나이다”라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의 찬송을 부르십시오. 우리가 입을 열어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할 때, 그 찬송이 하나님께 열납되는 감사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사람은 깨닫는 만큼 감사하게 됩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감사하지 못합니다. 다만 한 날, 한 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체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만이 진심으로 감사를 깨닫게 되고 풍성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15절 문둥병을 고침 받은 사마리아인은 많은 사람이 다 듣도록 큰 소리로 그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을 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또한 그는 돌아와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멸시 당하던 사마리아인이었지만 진실한 감사를 드림으로 주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육체적인 치유 뿐만 아니라 영적인 구원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릴 일이 생각나거든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이 사마리아인처럼 즉시로 감사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나오는 열 사람은 육체의 문둥병을 고침 받았지만, 우리들은 영혼의 문둥병을 치유 받은 사람들입니다. 

나병균은 외부 자극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그리하여 뜨거운 것도 뜨거운 줄 모르고 만지고, 추운 겨울에도 손발이 어는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체 부위가 망가지는 결과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나균인 죄에 감염되면 영적 감각이 마비되어서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을 알지 못합니다. 

나병균은 사람의 육신을 망가뜨리지만, 죄는 사람의 영혼을 파멸시킵니다. 

열 명의 문둥이가 예수님을 만나 깨끗함을 받았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영혼의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감사 찬양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지금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쪽박집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뭄 속에서도 살아 남는 식물이 있듯이 대박집은 분명히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절망이라고 외쳐도,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감사의 조건을 찾아내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감사를 통하여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주님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아 더 큰 은혜를 받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