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 요한복음 9:1-12, 534장
여호수아 15-21장
여러분, 여러분 앞에 바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앞에 있는 바위를 치워달라고만 기도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나 바위가 문제가 아닙니다.
넘치는 은혜가 있기만 하면 시험을 이기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나이가 들었습니까? 젊은 사람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나이는 이 나이대로 즐기는 것입니다.
현재를 즐길 줄 아는 것, 그것이 인생을 바로 사는 비결입니다.
여러분, 끝이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쓸데없이 오래 살겠다거나 계속 젊어지겠다고 몸부림치지 마십시오.
저도 처음부터 다시 돌아가서 살라고 한다면 거절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살던 것을 다시 똑같이 되풀이해서 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생의 종말이 있어서 끝을 낸다는 것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끝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내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일을 완성하고 난 뒤에 끝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그 시간이 곧 끝나는 시간이요 완성되는 시간입니다.
다시 말하면 미완성 중에 완성의 시간이 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모르는 것이 우리들에게 유익하므로 ‘너희의 알 바가 아니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끝이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이라고 반드시 더 살다가 가라는 법은 없습니다.
올 때는 순서대로 왔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어느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태어났습니다. 세상의 온갖 귀한 것들을 바라보고 감격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로 태어났습니다. 흔히 말하는 기쁨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나서,
40년 동안을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로 살아왔습니다.
이 책임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적어도 본인 잘못은 아닙니다.
스스로는 아무 책임도 잘못도 없이 평생토록 이 고생을 해야 합니다.
왜 나만 장님이어야 하고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희망도 없습니다.
뭇사람이 추구하는 욕망과 꿈이 이 사람한테는 다 쓸데 없습니다.
누군가가 던져주고 가는 동전 한 닢, 그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렇습니다. 살 이유가 있으면 무슨 수로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에 의미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무의미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순간순간 당하는 멸시가 전부입니다.
게다가 이 사람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그를 동정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적 논쟁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태어났을까? 이렇게 된 불행의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죄 때문에 병이 생긴다고 하는 질병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병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 부모의 죄인가 혹은 본인의 죄인가를 따져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안 그래도 괴로워 죽겠는데 남들이 내 불행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추상적인 논쟁이나 벌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한 마디 대꾸조차 없습니다. 왜입니까?
억울한 소리를 워낙 많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칭찬을 하든, 흉을 보든 자기 손 위에 떨어지는 동전 밖에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누구 죄냐’를 따지기 전에 꼭 해야 할 말은 ‘예수님,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이렇게 불행하게 사는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습니까?’
이런 말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는 그런 말이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좋은 말은 한 마디도 없이 엉뚱한 생각들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괴로워할 때에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렇습니다. 고통이 고통되는 까닭은 철저한 상실에 있습니다.
물질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잃은 것이 아니요, 건강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잃은 것이 아니라,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용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고 계시는가를 살펴 봅시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십니다.
우리들은 문제를 보고 분석하려고 하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경륜을 먼저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이 소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신앙 고백 가운데서 늘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골로새서 1: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사람들의 판단으로는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귀중한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 불행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이 현실을 통하여 큰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경을 보면서 과거의 원인 분석에 급급했으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나타내실 미래적 의미를 생각하십니다.
여러분, 과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합시다.
누구 때문이었는지, 무엇 때문에 불행해졌는지 아무리 두고두고 시비해 보아야 이 추상적인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이제 쓸데없는 변론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미래적인 하나님의 그 신비한 경륜, 그 구속사적 의미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이란 추상적이던 생각이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clear하게 변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 고난을 창조적인 기회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로 만드십니다. 고난은 기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기회는 성공으로 오기보다 실패로 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닥친 역경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아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는 모든 형편, 모든 상황이 다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롬팔이팔
아무리 불행한 여건이라도 이 소경이 예수님을 만났기에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만남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속에서 창조의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나는 순간 예수께서 그에게 믿음을,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을 읽을 때마다 늘 감격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4절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합니다.
절실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여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응답을 받으면 보통 끝이라고 생각들 하고 샴페인을 터뜨리지만 그때부터 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려면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정복, 하나님의 방법으로 했을 때 승리.
우리들의 문제는 응답은 하나님께 받는데 문제 해결은 내 방법대로.
제가 어렸을 때 벌레에 물리거나 하면 그 부은 부위에 침을 바르고 흙으로 문질렀습니다. 그렇게 하면 해독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하신 방법이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침을 뱉아서 흙을 이겨 가지고 이것을 눈에다 바르십니다.
바르고는 이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십니다.
이 사람은 순종합니다. 눈을 뜨고 순종한 것이 아니라 눈 먼 채로 순종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믿음이요 순종인 것입니다.
여러분, 순종의 덕을 몸에 배우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순종이 주는 내 영혼의 자유, 참 자유를 경험하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마’입니다. 이 말의 원뜻은 ‘듣는다’입니다.
사무엘은 곧 ‘샤마엘’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이것이 사무엘입니다.
우리도 그 사람 참 말 잘 듣는다 하면 그냥 청각으로 듣는다는 얘기가 아니지요, 그 말을 들어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말 잘 듣는다, 안 듣는다는 행동이지 귀로 듣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듣는 마음, 인생을 바로 사는 철학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또한 듣기는 듣는데 듣기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걸 알아야 합니다. 순종하면 나를 순종케 한 자의 권세와 능력과 지혜를 다 내 것이 됩니다.
얼마나 멋진 생입니까? 얼마나 자유한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내게 주어진 현실,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 이 현실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유를 아는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까? 회개합시다.
이유를 모르는 많은 실패를 당하고 계십니까?
이제 묵묵히 믿음으로 기다립시다.
지금 당하는 역경이 아무 의미없는 고난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하나님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나아옵시다.
그리스도와의 바른 만남이 있는 순간 엄청난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바른 만남과 온전한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