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크리스찬들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스피노자의 지구가 내일 멸망하더라도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
우리도 우리 할 일 제대로 하고 건강을 잘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애국입니다.
‘말씀과 순명’이라는 목회자들의 기도모임이 매주 수요일 아침에 있습니다. 모여서 좌, 우로 갈라진 대한민국과 코로나19 사태를 놓고 기도하는데
50명 이하라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 40명이 참여합니다.
저희 교회는 50명이 되지는 않지만 예배 시간에는 양 옆과 앞 뒤를 띄어서 마스크를 꼭 착용해서 앉아주시기 바라고 예배 후 공동식사 시간에도 4인씩 짝을 이루어 옆의 자리와 거리를 좀 두고 식사 시간에도 침이 튀지 않게
말을 너무 많이 하지 않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대형 교회에서는 구역 별로 모여서 영상 예배를 드리는데 개인 집에 모여서 20, 30명이 예배를 드립니다. 지난 주 수요일에도 저희 교회에는 저를 포함해서 8인이 예배를 드렸는데 구청에서도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돌아갔습니다. 저희가 훨씬 나은 환경이라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흔들리지 마시고 쓸데없이 남을 비방하거나
가짜 뉴스에 넘어가지 말고 평온한 마음으로 잘 넘기시기를 바랍니다.
No pain, no gain. 만고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희생없이 되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시간을 희생해서 돈을 법니다.
놀고 싶은, 게임하고 싶은 것을 희생해서 좋은 대학을 갑니다.
희생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신앙 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목회를 하면서 점점 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투자 중에 가장 좋은 투자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입니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21절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해답을 얻었지만 많은 재물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더 나은 것을 위해서, 때로는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비로소 새로운 생명의 역사,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다가 시장하시어 무화과 나무에게 열매를 얻으려고 갔지만, 아무런 열매도 없자 그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는 예수님께서 저주를 하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19절 말씀을 보세요. “길 가에서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주님의 저주로, 그 자리에서 그 무화과나무는 말라 버렸다고 했습니다.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11:13을 보면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주님이 하신 일을 보게 되면, 어떤 면에서는, 좀 너무하신 것 아니냐?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의 공생애 사역 중에 이렇게
극단적인 반응을 보인 예는 두 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 두 번의 모습을 마태복음 21장에서 다 나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사건은 12절 이하에 나타난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공관복음에 나오는 성전 정화 사건은 공생애 말기, 고난 주간 중 월요일에 행해진 사건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기 위해서 택하신 장소가 성전입니다.
성경에는 세 개의 성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문 성전,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
성전은 천막으로 지었든지, 아니면 돌이나 황금으로 지었든지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 지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전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느냐 아니 계시느냐 하는 것이 진짜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올바른 예배와 기도가 드려지지 않는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시대마다 그 사회를 지배하는 정신적 가치체계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두 가지 정신적 가치체계는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두 가지 기둥은 율법과 성전이었습니다. 율법은 유대인의 삶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크고 작은 삶의 원리가 모두 율법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요, 속죄 받는 장소로서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먼 외국에 가 있어도 일 년에 한 차례
이상은 성전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성전이, 장사치들이 모이는 시장터가 되어 있었습니다.
소를 팔고, 양을 팔고, 비둘기를 팔고, 또 이런 거래를 하기 위해 돈을 바꾸는 환전을 하는 등, 성전에서 해서는 안 될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들도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흠없고 정결한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먼 지방에서 오는 자들이 온전한 짐승을 가져 오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불편을 덜어 주기 위하여 성전에서 짐승을 팔고 사게 허락하였습니다.
또한 만 20세 이상의 유대 남자들은 반세겔의 성전세를 납부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를 위하여 로마나 헬라의 화폐를 세겔로 환전해 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선의의 목적에서 비롯된 관행이 점차 부패하고 말았는데,
제사장들이 상납금을 받는 조건으로 특정 장사치들의 독과점 행위와 폭리 행위를 묵인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바친 제물들을 다시 파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고 행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성도들을 섬기고자 시작했던 것들이 필요가 본질을 삼켜버려, 거룩한 예배와 삶이 아니라 경제적 이윤 추구가 주된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묻고 또 물어야만 합니다.
나는 지금 바로 가고 있는가?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옳은가?
만일 그리스도인에게 매일 이런 질문이 없다면 스스로에게 속고, 세상에게 속는 삶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날마다 순간마다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지 않으면, 곧 바로 ‘지금 나는 모든 부분에서 잘하고 있다.’라고
착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여름 단기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인솔자가 비행기에서 내릴 때 선교단원들에게 기내에 비치되어 있는 담요를 잘 챙겨 내리라고 당부를 합니다. 팀장이 담요를 잘 챙기라는 이유는 ‘선교지에서 몇 시간씩 리무진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한데, 버스 안의 에어컨이 너무 강해서 담요가 없으면, 감기 들기가 십상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남의 물건을 도적질하라고 권면.
저희 교회에서 불가리아에 옷을 모아서 보낸 적이 있었는데 세관에서 은근히 뇌물을 요구하면서 까다롭게 굴더랍니다. 김영중 선교사님이 연락이 왔는데 제가 그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통과가 안되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겠지요. 그냥 안되면 포기합시다.
그리고 기도했더니 세관원이 찾아가라고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에 대해서, 공동체에 대해서, 끊임없이 지금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질문해야만 합니다.
이때 주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진노하셨다는 겁니다.
환전상을 둘러엎으시고, 소와 양과 비둘기들을 채찍으로 때리며 다 쫒아내셨습니다. 평소의 주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평소에는 온유하시고, 인자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분으로 비춰졌는데, 성전에서 보여 준 주님의 모습은, 이와는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이처럼 성전에서 진노하셨던 것입니까?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장사하는 집’이 되어버렸고, ‘강도의 굴혈’이 되어
성전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처럼 진노하시며, 그들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진노하셨던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무화과나무의 저주 사건입니다. 주님이 시장하셔서 그 나무에게 열매를 구했지만 열매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열매가 없을 때, 그 나무는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말라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두 가지의 사건이 연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이 두 가지의 사건이, 연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왜이겠습니까? 여러분 이 두 사건은, 따로 구분되어진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어떤 의도 속에, 서로 맞물려져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런 사건을 동시에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 우리 또한 주님으로부터 이런 진노하심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교훈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제사장들이 섬겼던 예루살렘 성전과
사도들이 섬겼던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적인 차이점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미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 앞에 아무 쓸모없는 껍데기 교회로 변모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로 19절의 말씀을 통하여 지적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종종 이스라엘을 상징하곤 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무화과나무는 여기서도 패역한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즉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종교적 의식만 번창하고 참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 저주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급박성을 알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결과 그 잎이 마른 사건은 A.D. 70년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의 직접적인 예표였던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통하여 의식과 형식에만 치우쳐 실제는 신앙적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 무화과나무에는, 잎만 무성할 뿐 그런 설익은 열매조차 없었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시고, 이를 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볼 때는, 주님 말씀 한 마디에 나무가 그렇게 말라 버리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게 여겨졌을 겁니다.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그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 21절과, 22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생각할 때는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과 주님이 말씀하신 기도에 대한 교훈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성도들의 축복에 대한 열쇠가, 바로 이 말씀 속에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도가 곧 모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축복의 열쇠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기도가 아니지요? 어떤 기도입니까?
주를 확실히 믿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이 믿음의 기도, 바로 이것이 예루살렘 성전과,
예루살렘 교회와의 차이점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은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회당 문에 서서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인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니 결국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아니한 채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는 달랐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섬겼던 사도들의 기도에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고, 또 골방에서 기도할 때마다 성령님과의 교통함이 있었습니다.
교회 내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누구랄 것도 없이 무조건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은 우리 대한민국을 위하여 온 교회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코로나19의 퇴치를 위하여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온 성도들이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문제보다, 형제와 자매들이 당하고 있는 문제를 위해 더욱 더 간절하게 기도에 힘썼던 교회가, 바로 새 예루살렘 교회, 초대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정말 예루살렘 교회에 어떤 역사들이 나타났습니까?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실제로 가능하게 나타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질병이 나았습니다.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소경이 눈을 뜨게 되며, 앉은뱅이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인생에 나타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이, 다 기도로 해결되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초대교회 안에서 나타나고 있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가 바로 이런 기도의 응답이 일어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모든 능력의 시작은 기도입니다.
다니엘 9:23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분들이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힘써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뜨거운 기도를 통해서 우리 대한민국의 어려운 일들이 해결되고 또한 여러분들이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기도 응답을 받게되는 그래서 우리 새하늘교회 아름다운 성전이 채워지고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