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은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석은 조상을 생각하며 햇곡식과 햇과일을 먹는 날로서 온 가족이
모이는 즐거운 날입니다.
추석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하는데 ‘한’이라는 말은 크다는 뜻이고 ‘가위’라는 말은 가운데라는 뜻을 가진 옛말로 8월 15일인 한가위는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입니다.
추석은 아주 오래 전부터 조상 대대로 지켜 온 우리의 큰 명절로 일 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이웃들과 서로 나눠 먹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떡을 빚어 나눠 먹었다고 해서 속담 중에 “일 년 열두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도 생겼습니다.
우리 나라에 추석이 있다면 미국에는 추수감사절이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추수감사절
미국에서의 최초의 추수감사절은 1621년 가을에 플리머스 정착지에서 청교도들에 의하여 지켜졌습니다. 그들이 영국에서 가져온 씨앗들은 미국 땅에 적합하지 않았고 영국에서 쓰던 농사 기술 또한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혹독한 겨울을 보낸 다음 해 봄에 그들은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옥수수, 콩, 보리 등을 재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좋은 수확을 거두자 윌리엄 주지사는 감사의 날을 정하여 인디언들을 초대하고 축제를 벌였습니다.
초대받은 인디언들은 필그림 청교도들에게 크랜배리와 다른 여러 가지 요리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영국에서는 명절 때에 큰 거위를 구워 먹는 습관이 있었는데 신대륙에서는 거위 대신에 칠면조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의 잔치 음식은 칠면조를 중심으로 해서 크랜배리소스와 호박 파이로 이루어집니다.
이 추수감사절은 서서히 다른 지역들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고, 1863년에 링컨 대통령이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공포하였고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추석과 같아서 고향으로 감.
한국에서의 추수감사절
한국에서는 1904년 제4회 조선예수교 장로회 공의회에서 서경조 장로의 제의로 감사일을 정해 지키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다 1914년 회의를 거쳐 11월 마지막 수요일을 감사일로 정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기로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신 사건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오병이어의 사건만이 유일하게 4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병이어’란 보잘 것 없는 보리 떡 다섯 덩이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신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물고기에 해당하는 단어는 ‘옵사리온’인데 보통 물고기를 의미하는 ‘익투스’와는 차이가 납니다. ‘옵사리온’은 아주 작은 송사리 같은 고기를 의미합니다. ‘익투스’는 헬라어로 물고기라는 뜻.
초기 기독교 시대에 대표적인 이단이 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란 영혼만이 중요하기 때문에 육체는 무시합니다.
두 극단 쾌락주의와 금욕주의(고행)
그러나 기독교는 영, 혼, 육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쓴 C.S 루이스의 저서 중에 스쿠르테이프의 편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동물인 것을 잊어 버립니다. 따라서 육체가 반드시 영혼에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는 점을 자주 잊고 삽니다.”
종종 우리가 믿음생활을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상적인 가르침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개인적인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와 보상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한 사람이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것을 누리며 사는 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은 건강치 못한
사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청부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독교는 언제나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섬김과 배려에 대하여 끊임없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고아, 과부, 나그네, 베드윈 족.
성경은 밭의 네 귀퉁이를 남기는 것과 떨어진 나락과 볏단을 줍지 말고 버려두어 가난한 사람들이 주워 가게 하는 것 등을 말씀함으로 구체적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에 대한 배려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개인의 성공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거기서 끝을 내지 않습니다. 정당한 성공을 인정하면서도 그와 같은 성공을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대한 배려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들을 함부로 무시하거나 깔보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정당한 누림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시지만 그것을 성공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보시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성공의 궁극적인 목적을 나눔과 섬김에 둡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섬김은 우리가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 왔던 유교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유교는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을 언제나 강한 자, 높은 자로 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정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26,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가장 작고 가장 낮고 가장 불쌍한 사람을 섬겨야 함을 천명하셨습니다.
오늘 같이 나누고자 하는 내용도 그것입니다.
참으로 미미하기 짝이 없는 작은 떡과 물고기를 기꺼이 내어 놓았을 때
바로 그 현장에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벳세다 광야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도 오 천 명이나 되었던 사람들이 좇아 왔습니다. 제자들이 오늘은 그만 말씀하시고 이제 저들을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라고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아주 엉뚱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저들에게 먹일 떡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때에는 하나님을 계산에서 뺍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면 할 수 있는 일이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면 당연히 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단정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오병이어 기적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없다고 모든 것이 다 안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모든 것이 다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8절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적은 자원, 바로 이것을 가져오라고 명하십니다. 우리 쪽에서는 그 자원이 사용되어 나타날 결과에 대해 미리 계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 같은 얕은 계산, ‘이것 주님께 바친다 해도 얼마나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나?’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나타날 길목을 미리 막아 버리는, 실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단순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져 오라고 하면 그냥 가져 오시면 됩니다.
오늘 본문의 어린 아이처럼 예수님의 손에, 하나님의 손에 올려 지면 우리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가 먹을 점심인 오병이어를 내 놓은 아이처럼, 우리도 그렇게 한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오늘도 일어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기적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입니다. 보리 떡 다섯 개와 물 고기 두 마리로 오 천 명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와 같은 기적이 일어났을 때 가장 기뻤을 사람이 누굴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구보다도 자기의 도시락을 내 놓은 어린 아이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시락을 내어 놓는 그 작은 헌신을 귀히 보시고 오 천 명이 먹고도 남는 기적을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아이의 헌신이 없었다면 기적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이 풍성히 넘치기 위해서는 감사해야 합니다.
19절을 보면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는
그 음식물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고 (give thanks)
만 수천 명이 모인 그 자리에 겨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밥상에 올랐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두고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오병이어가 엄청난 양으로 불어난 후에 감사드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직 오병이어에 불과한 상태에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오병이어 위에 축복하신 후에 그것을 나누어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도록 거두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기적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 기적을 구경한 사람들이 있고 그 기적의 중심에 선 기적의 당사자들도 있습니다.
저는 우리 새하늘 교회 교우들이 기적의 구경꾼이 아닌 기적의 당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저는 오병이어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첫 번째 이적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그 기적을 행하시기 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종들에게 미리 한 말은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종들은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빈 포도주 항아리에 물을 가져다가 부으라고 하셔도 그렇게 했었고. 그 물을 떠다가 주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오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병이어 보잘 것 없는 것으로는 오 천 명을 먹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에 그 것이라도 들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순종이 기적을 낳았던 것입니다.
그 진리를 깨닫고 함께 실천하는 복된 공공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에 도전하여 하나님의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찬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