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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을만한 믿음 (사도행전 1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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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 사회는 참 재미있습니다. 미국이지만 한국인들의 사회.

제가 있을 당시에 LA 이민사회 남자는 연대, 여자는 이대.

“나는 내가 일하는 주유소 사장인 Mr. Kim을 미워한다. 매일 아침 교대 시간에 3, 40분 늦게 오고도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 3, 40분을 부려먹는 것이 자신의 순이익이라고 생각하는 그 잔꾀를 나는 미워한다.  

한 번도 보수를 제날짜에 주지 않아 참다 못한 내가 며칠 후에 채근할 때에야 돈을 던져줘서 일하고 정당한 보수를 받는 나를 괜스레 초라하게 만드는  Mr. Kim을 나는 미워한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나가는 교회에 함께 가자고 조르는 이 사람을 나는 더욱 미워한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Mr. Kim 같은 사람이 그래도 

그리스도인입니까? 그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겠습니까?

여러분, 무릇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그의 말, 그의 행동, 그의 생활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배어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짜게 먹으면 물을 반드시 찾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이 들어갔는데 어떻게 변화가 안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복음이 들어가니 그의 목적도, 그의 사는 방법도, 그의 돈씀씀이도, 그의 생활 전반이 자꾸 달라집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을 그 분이 기뻐하실까 아닐까가 삶의 기준이 되어 갑니다. 그 전에는 나한테 이익인가 아닌가?

그래서 모든 사람과 점점 더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2, 23절에서 

이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아홉 가지 덕목을 놓고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고, 겸손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면 이같이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말로만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거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에도 변화가 생기고, 얼굴에도 변화가 생기고, 그의 행동거지, 모든 일에 변화가 옵니다. 그 복음의 능력이 내게 임하여 이 기쁜 소식이 내 속에 들어와서 내 인격을 바꾸어 놓습니다. 

곧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씨뿌리는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종자를 땅에 심어놓으면 그 겨자씨같이 작은 씨앗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이 생명이 딱 떨어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고 일어나면 싹이 나고 점점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이 생명적 역사가 반드시 우리들에게도 있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기독교 윤리는 한마디로 ‘마땅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럴 뿐입니다.

주께서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셨으니 내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고, 

복음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이 마땅하고, 모든 일은 한 마디로 ‘마땅하다’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윤리요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고린도전서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들의 죄를 다 용서하셨다, 과거형.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 용서받음을 믿고 용서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구를 온 인류를.

그런데 용서받는 사람이 이것을 수락하지 않으면 그 효력은 발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절대적 은혜도 우리가 수락해야만 효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죽을 죄인이지만 ‘사하노라’하실 때 이것을 아무 조건없이 그대로 발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전적인 수락,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없이는 그 엄청난 은혜가 아무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효력은 바로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은 믿는만큼 살아갑니다. 그가 믿는만큼 자유할 수 있습니다. 

믿는만큼 행복할 수 있습니다. 믿는만큼 능력있는 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제일의 불행은 의심입니다. 아무리 크고 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일단 사랑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 귀한 사랑은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을 깨닫지도 못하고, 사랑을 느끼지도 못하고, 사랑의 기쁨도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불행해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란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그릇입니다. 사랑을 받는 그릇, 능력을 받는 그릇, 은사를 받는 그릇입니다. 믿음은 수신기나 전화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아무리 귀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 우주에 가득찼다고 해도 수신기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라디오를 자주 듣습니다.

방송국에서는 계속 방송을 보내는데 듣고 안 듣고는 내 수신기가 결정합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내 수신기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도 내 수신기가 시원치 않으면 찌직거리면서 깨끗하게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 내 믿음은 어느 정도입니까? 이에 따라서 주시는 은혜를 내가 다 받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못받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왜곡해서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 가운데는 제 정신으로 살기 보다는 차라리 체념과 포기를 통해 모든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본문의 주인공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루스드라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앉은뱅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받은 삶의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주변에 있는 부모님이나 가족들 또한 그가 앉은뱅이라는 사실 때문에 많은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서기 위해서 온갖 노력도 기울여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는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고 점점 더 절망과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지속되었을 때, 그는 인생의 모든 소망을 포기하고,  체념이 가장 좋은 치료제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사도 바울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이 인정을 받아서, 놀랍게도 그가 뛰게 되는 놀라운 사건이 생겼습니다. 

먼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앉은뱅이가 말씀이 선포되는 그 현장으로 나아갔다는 것, 이게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 만남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분들, 내 부모가, 내 자식이, 우리 집사람이 잘 믿어서 나는 하늘 나라 간다고 생각.

 

어떤 청년이 한 여인을 보는 순간 반함. 그래서 자기 친구에게 편지 심부름. 

1년 동안 편지를 했는데 이 여인한테 답장이 없슴. 

1년 뒤에 청첩장, 자기 친구와 그 여인과의 결혼.

face to face. 이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간접적인 관심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만나야 합니다. 그 현장에 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어머니. 

본문에 나오는 이 앉은뱅이는 사도 바울을 만나서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듣는 자세가 참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거지에다 앉은뱅이인 이런 사람이 회중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멸시와 소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듣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주목하여 듣고, 집중적으로 듣고,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아마도 가까이에서 들었을 겁니다. 

오늘 그 듣는 모습에 사도 바울이 주목을 합니다. 

9절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그 듣는 자세, 거기서 믿음이 평가된 것입니다. 듣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수업시간에 집중하여 듣는 것입니다. 집중력이 문제입니다. 

인생은 집중력에서 판가름납니다. 듣는 순간에 열심히 들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신명기 6장을 보면 자녀 교육의 기본을 설명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시작이 4절 “쉐마, 이스라엘아 들으라”입니다. 

그런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2000년 전의 이야기로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바로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교회에 오셔서 예배드릴 때에는 여러분들의 가면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해도 은혜 받는 것만큼은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의 이 앉은뱅이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는 그 시간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렸습니다.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저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 아멘’ 하고 고개를 끄떡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일어서라’하니까 벌떡 일어섰습니다. 자기가 앉은뱅이라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처지나 형편을 전혀 생각지 못하고 그대로 따라가며 순종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다가 바울이 ‘일어서라’하니까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일어선 것입니다. 그러자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자기 생각으로, 자기 지식으로, 자기 방법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수십 년을 기다린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그 속에 씨로 뿌려지고 내 심령이 믿음으로 반응할  때 비로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한 여자라도 혼자서는 절대로 임신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절대로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 속에 뿌려지고 내가 그것을 접하게 될 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에 보면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라고 합니다.   말씀은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입니다. 

그 말씀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에너지가 있습니다. 

움직이는 것입니다.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의 육체를 새롭게 만드는 기적을 실제로 일으켰습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에 그 사람은 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는 과거의 노예상태, 그 얽매임과 그 부족함, 모든 허물 싹 잊어버리고 그대로 말씀의 은혜를 받아드렸습니다. 

오늘 이 구원의 역사는 바로 믿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도 “네 발로 일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어서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는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바울처럼, 

말씀을 듣고 자기발로 벌떡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던 그 앉은뱅이처럼,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 각자 가지고 있는 인생의 문제를 딛고 일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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