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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요한일서 2: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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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artFragment-->예수님의 윤리를 담고 있는 결정판이 마태복음 5-7장에 등장하는 산상수훈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윤리의 기준을 제시하면서 우리들에게 기도의 원문인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십니다. 6:9-13

주기도문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것.

반면에 사도신경은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서 하나님께 바친 것.

주기도문대로 사는 것이 성도의 진정한 삶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입술에는 주기도문이 있는데 

삶에는 주기도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탄은 우리가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되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우리를 미혹하거나 방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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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하는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지 마라. 

하나님의 아들, 딸로 살지는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더 원하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를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 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고 하지 마라. 

아직도 누구에겐가 미움과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라고 하지 마라. 

욕심에 이끌려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는 내지도 않으면서... 

     

세상 사람들은 흔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무슨 재미로 사느냐?”

예수 믿는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비정상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마음이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 말은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절대로 행복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사랑에 눈이 어두워진 연인에게는 둘만 있으면 됩니다. 

초가삼간이어도 괜찮습니다. 가난해도 괜찮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두 여자를 한꺼번에 사랑하는 남자치고 행복한 사람을 보셨습니까?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여자치고 행복한 사람을 보셨나요?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두 여자를 사랑하고 싶어도 둘을 한꺼번에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진짜 사랑은 한 쪽에게만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쪽을 다 가슴에 품고 마음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해 보십시오. 갈등과 고통만 있을 뿐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내 마음을 채울 때는  행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중심이 되실 때에는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을 세상에 주기 시작하면 그 마음에는 갈등과 고통 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 말씀을 보아도 그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왜요? 마음이 나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두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징계를 당했습니다. 

하나님도 믿고 바알도 믿고. 하나님도 믿고 재물도 믿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 3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저는 오늘 설교를 듣는 모든 분들이 영적인 눈이 뜨여져

사탄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바다.

     

인간은 세월이 흐르게 되면 누구나 나이를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이든 모든 사람들을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미숙한 사람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연륜이 더해지고 교회에서 보낸 세월이 길어지면 영적으로 성숙해 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발견합니다. 왜 그럴까요?

영적 성숙과 영적 미숙의 차이를 만드는 근본적인 요소의 하나는 바로 가치관입니다. 오래한 신앙생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경이 가르치는 성경적 가치관을 얼마나 붙들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적 가치관과 비성경적 가치관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비성경적 가치관의 핵심은 한마디로 세속성이요 순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떤 분이 교회 생활을 오래 했어도 그가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순간적인 가치에 붙들려 살고 있다면 그는 여전히 영적으로 미숙한 성도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런 세속적 가치에 붙들린 인생과 반대로 영원한 가치를 지향하는 인생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 세속지향적 인생과 영원지향적 인생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세속지향적 인생이란 한마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런데 이 세 가지 세상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사단 마귀가 인간을 유혹하고 파멸시키고자 태초부터 사용해온 무기임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첫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금지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보고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게” 느끼게 한 것입니다. 

먹음직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요, 보암직이 바로 안목의 정욕이요, 이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만큼 지혜로와 진다고 함이 바로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자랑의 공통점은 감각적이고 순간적인 충동에 기초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욕구 그 자체를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구가 남용되고 과용될 때 그것이 바로 성경이 경계하는 정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이런 세속적 가치의 욕망에 빠지는 순간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그리고 이런 욕망의 출처는 결코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욕망의 공통점을 본문 17절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그것은 지나가는 일순간적 가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가치를 추구한 종말은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인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세속적 가치 지향의 인생을 살것인지-그것은 우리의 선택의 몫입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단어들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과 그 정욕, 하나님의 뜻 그리고 지나감과 영원히 거함

이 세상과 정욕은 지나가는 것이라고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12:3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키에르케고르는 인간 실존을 3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욕체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

심미적 실존이란 감각적 쾌락과 원초적 욕망을 따르는 실존이고, 누구나 인생을 이 단계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단계가 필연적으로 가져다주는 범죄와 죄책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도덕적인 실존의 단계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내면의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이것이냐 저것이냐/선이냐 악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우리의 평생은 이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선택을 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도덕은 우리를 죄책의 자리로 인도할 수는 있어도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종교적 실존의 자리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적 실존의 단계에서 우리는 비로소 순간의 가치가 아닌 가장 높은 절대 가치, 영원한 가치를 붙들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겠다고 고백한 바울, 

로마 카타콤에서 생활하였던 로마 기독교인들 그들의 흔적은 성경으로 기독교 역사로 그리고 전승으로 그렇게 거룩하게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의 결론 부분에서 이런 성도들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라고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면서 체험하며 사는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세상의 매력 앞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펼쳐 나가시는, 그래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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