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체는 성장해야 합니다. 또한 성장을 하여야 하되 균형있게 성장을 하여야 합니다. 몸이 자람과 함께 지식도 자라고 영도 자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육체는 자랐는데 내면의 인격과 도덕성, 즉 내적 존재가 여전히 미숙아로 남아 있다면 그야말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어릴 때에는 다분히 이기적이고 자기본위적입니다. 구심점이 나에게 있습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에는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는 나에게 젖을 먹여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젖이 둘인 것도, 하나는 나에게 먹이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지고 놀라는 것이므로 둘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금 더 크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제는 주위 사람들도 돌아볼 줄 알게 됩니다. 흔히 철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상대방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고 그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어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주위에는 어지간히 나이가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철이 덜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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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사회 문제를 보면 평소에는 멀쩡하던 사람이 충동적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그 다음에 있을 결과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못합니다.
나이만 들었다고 어른이 아닌 것입니다.
한심한 사람들을 봅니다. ‘내 감정, 내 기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라고 당연한 것처럼 말합니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정말로 감정은 무방비상태입니까? 기분은 이렇게 마음대로 내버려두어도 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고로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 감정에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순간적인 기분의 표출에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 점을 잊지 맙시다.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나는 어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빌립보서입니다. 바울 서신에는 옥중서신이 넷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옥중서신이란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네 개의 편지를 말하는데,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편지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자 빌립보 교인들은 급히 헌금을 모아서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에바브로디도에게 헌금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로마에 남아서 감옥에 갇힌 바울을 돕도록 합니다. 바울에게 요샛말로 사식과 담요를 넣어주며 여러 가지로 시중을 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중들던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들어서 그 자신은 물론 빌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에게까지 큰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나름 걱정을 합니다.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인들은 얼마나 걱정을 할까, 바울은 얼마나 괴로워할까?
바울도 걱정을 합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시중들다 병을 얻게 돼서 미안해 할 까봐 걱정합니다. 이렇듯 모두가 자기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남을 걱정합니다. 근심 위에 근심의 뜻은 이것입니다.
내 마음만 편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근심할까봐 더 큰 근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부가 이타적이고 봉사적이고 희생적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아픔과 괴로움과 억울함을 생각하시기보다 십자가를 지우는 사람들을 걱정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걱정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받을 심판과 그 운명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심성입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누가복음에 보면 여러분들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놓고 유명한 신학자 ‘리차드 니버’란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비유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등장한다. 하나는 오직 자기 밖에 모르는 강도라는 사람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자기공동체에 충실하게 살겠다고 하는 레위인, 제사장 같은 사람도 있고, 마지막으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 같은 책임적인 인간이 있다고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을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강도 만난 사람이 누워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죽습니다. 외딴 곳입니다. 그런데 레위인, 제사장들이 지나가다 보았지만 이 사람들은 자기공동체에 충실해서 자기 일이 아니라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이 사람을 봅니다. 이때 사마리아 사람이 ‘지금 강도가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을 돕는다고 어물어물하다가는 내가 죽게 될지도 모른다. 저 사람은 어차피 죽을 사람이다. 죽을 사람 돕다가 나 죽을 것 없잖은가?’ 이렇게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도망가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돕지 아니하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의 중심이 나 자신에게서 이웃에게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 사마리아 사람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날 문제는 ‘이기주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기주의로 살면 나에게 이익이 될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습니까? 이 이기주의가 얼마나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고 산다는 데에 있습니다. 더 큰 문제입니다. 나를 자꾸자꾸 불행하게 만들 따름입니다.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남을 섬기는 데에 있습니다.
반기문 총장 이후에 유엔에 진출하고픈 한국의 청년들이 많아졌다고.
그런데 언어는 다들 잘 한다고 해요. 제가 볼 때는 스펙을 쌓으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 이웃을 돕고 싶은 마음.
오늘 본문의 마지막을 보면 하나님이 에바브라디도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의병을 고쳐 주십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를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냅니다.
지금처럼 전화가 있으면 ‘에바브로디도가 다 나아서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오랫동안 그를 데리고 있고 싶었지만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해서 급히 보내는 것은 빌립보 교인들의 걱정을 빨리 덜어 주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28절 내게 필요한 사람이지만 너희들의 기쁨을 위해서 빨리 보낸다고.
근심 위에 근심, 남의 마음을 내 마음보다 더 생각하는 여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기주의가 판치는 이 각박한 세상에서도 주변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힘 닫는대로 도우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