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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립보서 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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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한 해를 또 보내면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필요한 것도 많았고, 소원도 많았고, 뜻대로 안된 일도 많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감사하다는 생각, 참으로 고맙다고 하는 은혜의 느낌이 먼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부모님께도, 심지어는 자식에게도, 혹은 그 누구에게도 ‘참 고마웠습니다’하는 마음가짐으로 이 한 해를 마감하여야 할 것입니다. 

 

시편 40:1, 2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다윗이 일생을 회고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지은 시입니다. 이 시편을 읽어가노라면 가장 크게 인상 받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감사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들어주셨다’라는 것입니다. 

내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내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하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어서, 출세를 해서, 잘되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왜요? 그는 자기의 죄인 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허물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그 허물에도 불구하고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도에 응답하신 바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라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들여다 보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당한 적이 두 번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장인인 사울 왕이요, 두 번째는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입니다. 

사울 왕은 자기의 신하이지 사위인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죽이려고 군사를 몰아 쫓아다닙니다. 다윗은 숲속으로 동굴로 동분서주 피해 다니는데 어찌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야말로 기가 막힐 웅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되고 나서는 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아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잘 난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더욱이나 자기에게 충성을 다하던 신하들이 이제 그 아들 편에 붙어서 다윗을 죽이겠다고 군사를 몰고 쫓아다닙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수렁 아닙니까?

모름지기 다윗이 제일 괴로웠던 시간이 언제였을까 생각해 볼 때에 바로 이 시간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기서도 건져주십니다.

마침내 그는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하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깊은 수렁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그리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걸음을 견고케 하신 하나님, 나를 인도하신 그 하나님께 그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찬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하면 

귀를 기울이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네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주시고 

나의 발을 반석위에 세우시사 나를 든든히 하셨네 

 

(후렴) 새 노래로 부르자 라라라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새 노래로 부르자 하나님 사랑을 

 

주를 의지하고 교만하지 않으면 

거짓에 치우치지 아니하면 복이 있으리라

여호와 나의 주는 크신 권능의 주여 

그의 크신 권능으로 우리들을 사랑하여 주시네

 

우리는 지금 1년의 마지막인 12월에 와 있습니다. 

땅이 꽁꽁 얼어붙고 매서운 겨울 추위가 닥쳐 왔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12월은 아닙니다. 성탄절이 오고, 새해가 되고, 다시 봄도 올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확실히 알고 하나님의 가치, 절대가치를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상대가치에 매달려 허덕이며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우상이란 상대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돈이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돈이 우상이 될 때에는 해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이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자녀가 나의 우상이 될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승진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만 승진이 우상이 될 때 승진하려고 하는 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돈, 자녀교육, 승진 그 자체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닌데 내게는 해로운 뿐입니다. 내게 약점이 있기 때문에 해로운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7절의 말씀은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전제’란 피를 제물 위에 쏟아 붓는 의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내가 너희를 위해서라면 나의 피를 쏟아 부을지라도 기뻐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생명도 기꺼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가치와 생의 의미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그 분을 위해서라면 비록 완전하게 이루지는 못할망정 기쁜 마음으로, 죽어도 좋다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좋아하는 대상이 변하고 마음이 자주 변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유아기의 아이들에게는 어머니면 그만입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입으로는 젖을 빨고 손으로는 다른 한쪽의 젖가슴을 만지면 그만입니다. 더는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만족해 합니다. 유아기에는 그것이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유년기로 접어들면 장난감이 중요해집니다. 어머니가 불러도 노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가장 큰 체벌은 장난감을 빼앗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지금 이 시간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무엇이 first priority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이대로 죽어도 좋다 싶은 절대가치를 발견하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혜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산다는 것일까요? 

남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자신에게 닥칠 재난을 미리 막는 것, 이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역사에서 배워야.

어리석은 사람들의 특징을 제 나름대로 정리해 보면  

 

먼저 어리석은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생각도 다른 사람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차 있어서 매일 누구네 집, 누구네 집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하면 나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이 싫다고 하면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종속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를 먼저 반성합니다. 

남의 집 불난 것을 보면 빨리 돌아와서 내 집 불 단속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았을 때에 나에게 그런 실수가 없는가를 묻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과거에 집착해서 삽니다. 

족보 찾고 학벌 따지면서 ‘내가 그래도 왕년에는...’ 

혹은 지난날의 괴로웠던 일을 자꾸 생각합니다. 과거에 섭섭했던 일, 과거의 실패, 여기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그 마음과 생각이 과거에만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못하고 점점 더 무기력해집니다. 

이런 과거 지향적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가 어떠하든지 그것을 딛고 떨치고 일어나 

미래 지향적으로 승화시킵니다. 

오늘이 있기 위해서 어제가 있었다. 미래가 있기 위해서 오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앞을 바라보며 10년 20년 후, 아니 세상을 떠난 뒤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사는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일에 지나치게 마음을 씁니다. 세상에는 반반의 가능성을 지닌 일이 많습니다.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일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만에 하나’,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는’ 일들에 얽매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만일 그렇다면’ 하고 ‘만일’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때문에 항상 고민입니다. 

일본에 지진이 났다는데 한국에도 지진이 나면 어떻게 하나, 인도네시아에 쓰나미가 났는데 한국에도 나면 어떻게 하나, 땅이 꺼지면 어떻게 하나, 하늘이 내려앉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한도 끝도 없이 만일, 만일, 만일의 일들을 상상하며 걱정에 사로잡힙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삽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가장 고상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위페레콘’이라고 하는 이 말은 영어로 ‘excellency, the best’입니다.  

가장 귀한 것, 탁월한 것,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고상한 것을 알고나니 전에 좋아하던 것, 유익하게 여기던 것이 다 

시시해져서 그만 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물려받은 소중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서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언약의 백성이요 순종 유대인인 것입니다. 

게다가 베냐민 지파입니다. 남유다는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정통 유대인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특별히 경건하고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파였다고 합니다. 적어도 일반 사람들의 수준보다 높고 거룩한 인격의 소유자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배반하고 훼방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여야 한다는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과거요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고 추구하였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알고 보니 그 모든 것이 다 소용없어졌습니다. 

지식적인 교만, 도덕적인 교만, 종교적인 교만을 다 내어버리고 주님만을 알고 주님만을 따르며 주님만을 소유하는 인격으로 바뀌어 살아 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기 위해서 전에 좋아하고 유익하게 여기던 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잃어버린다’라는 말은 헬라어 원뜻대로 보면 ‘잘라버린다’가 좀 더 정확한 의미일 것입니다. 

여러분, 잊어버릴 것은 빨리 잊어버립시다. 다 지난 일인데 잊지 못하고 매여 있는 것을 봅니다. 잃어버린 것은 하루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능동적인 행위가 필요합니다. 내 스스로 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너무도 소중한 것을 얻었기에 전에 좋아하던 모든 것을 내버립니다. 436장. 2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둘째로 배설물로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나를 더럽게 하는 것이다, 가까이 두면 오염된다, 이렇게 여기고 멀리 버렸습니다. 

가까이 가시면 안됩니다. 술집에 가서 전도.

 

오늘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이 지식은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살기에 나는 행복하고 기쁘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만이 나의 자랑이요 그리스도만이 나의 기쁨이요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만이 나의 행복입니다. 

이 기쁨 외에 아무런 기쁨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설명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의’ ‘디카이오스’ 이것으로 인하여 구원받고, 이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적자냐 흑자냐를 따지며 살아갑니다마는 어떠한 것을 지불해서라도 예수님을 얻었으면 그것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때로 물질을 손해보면서 믿음을 얻습니다. 명예를 손해보면서 신앙을 얻습니다. 좀 더 큰 것, 좀 더 귀한 것, 좀 더 영원한 가치의 것을 얻었기에 그 밖의 것을 미련없이 내던집니다.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었기에 다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했기에 세상을 다 알았다고 만족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살기에 영생 안에서 현재를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얻었기에 모든 것을 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예수를 알게 되고 예수를 알아가는 기쁨, 이 감격으로 

이 힘들고 거친 이 세상을 이겨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가랴는 학개 말라기와 더불어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의암울한 영적 상태를 보여 주고 그들로 하여금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질을 회복하라는 권고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서는 메시야 초림과 재림으로 인하여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에 대한 많은 예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7-13장

7-8장 금식 문제에 대한 질문과 하나님의 4가지 답변

벧엘 사람들은 70년 바벨론 포로 기간 동안 행하였던 금식을 이미 포로 

귀환이 이루어졌고 성전 재건이 진행되는 당시에도 계속 시행되어야 하는지를 물었고, 이에 대해 스가랴는 위선적인 형식주의적 신앙 태도와 모든 죄악된 행위들을 버리고 실생활에서 의를 실천하는 참된 회개의 삶을 사는 것이 선민의 바른 삶과 신앙 자세임을 강조하였습니다. 

 

7장 금식에 대한 질문과 이에 답변으로서 위선과 불순종에 대한 질책

첫 번째 답변 7:4-7 위선적인 의식주의에 대한 경고

두 번째 답변 7:8-14 하나님의 말씀을 실생활 가운데서 실천할 것

 

세 번째 답변 8:1-17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에 대한 축복과 순종을 실생활에서 생활화 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네 번째 답변 8:18-23

영광을 회복한 예루살렘에서는 슬픔의 금식이 기쁨의 절기가 될 것과 

영원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9-11장 메시야 초림에 관한 예언

9장과 10장은 만왕의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거역하는 자들과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거짓 목자들을 심판하심으로 이들에 의해 고난받던 주의 백성에게 궁극적 승리와 하나님의 축복을 보장하는 소망과 기쁨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반면에 11장은 선한 목자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모진 수난을 당하는 암울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9:1-8 택한 백성들을 괴롭히던 원수들에 대한 심판

9:9-17 오실 메시야의 겸손과 구속 사역

9:9 마태복음 21:5

 

10장 악한 자에 대한 심판과 유다와 이방에 대한 구원 역사

 

11:1-17 메시야의 수난과 거짓 목자에 대한 심판

 

12-14장 하나님 백성의 궁극적 승리와 성령 강림을 통한 대회개 운동

 

12:1-9 하나님께서 영적 이스라엘 백성에게 승리를 주실 것을 기록

10-14 구약 시대가 종결되고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대회개 운동.

 

13장 하나님 백성들의 영적 정결과 연단을 통해 이루어질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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