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방역 수칙에 따라 19명만 모여 예배드리는 마지막 날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좌석 수의 50% 그러니까 우리 새하늘 교회는 전교인이
백신 접종 여부에 상관없이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예배 후 각 셀별로, 드보라셀, 베드로셀, 여호수아셀
점심 식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제 위드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예배도 이전으로 돌아갑니다.
오늘은 504번 째 맞이하는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04년 전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그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종교개혁가하면 정의감이 아주 강하고, 굳센 의지와 힘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종교개혁자인 루터를 보면 그는 아주 두려움이 많고 연약한 인간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에 독일의 작은 마을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하면서 득세한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었는데 아들을 법률가로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아버지의 소원대로 법과 대학에 입학하였고, 장래가 촉망되는 법학도로서 열심히 학업을 닦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22세 되던 해에 여름방학을 맞아 친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에 인생의 목표를 바꾸게 되는 커다란 계기를 맞게 됩니다.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면서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내리친 벼락에 잠시
전까지도 청운의 꿈을 이야기하던 친구가 목숨을 잃고 맙니다.
벼락을 맞아 새까맣게 타 죽은 친구의 처참한 몰골을 보는 순간, 루터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광부들의 수호성인인 안나를 불렀습니다.
“성 안나여, 저를 살려주시옵소서.” 정신없이 기도합니다.
그날의 충격으로부터 헤어날 수가 없었던 그는 마침내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서도 남달리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을 하는 등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고 무단히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가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돌아오는 것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뿐이었습니다.
그는 줄기차게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문제가 해결이 되질 않습니다.
죽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싸우며 세월을 보내던 그가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로서 로마서를 강의하다 로마서 1:17절에서 은혜를 받아 그를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괴롭혀 왔던 심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심판의 하나님이 해방의 하나님, 자유의 하나님으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3대 기치가 그 때 만들어 집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Sola Fide, Sola Scriptura, Sola Gratia’
중세 유럽 사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종교집단이었습니다.
그 신앙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순순한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미신과 신비주의가 혼합된 정체불명의 종교생활로 굳어져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세속권력과 손잡고 종교권력을 마음껏 휘둘렀으며, 공공연히 성직을 돈으로 사고 팔고, 자식들에게 대를 이어 그 자리와 재산을 물려주었습니다. 교회 세습.
그 시대 교인들이 미신적인 신앙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은 사제들만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전유물이었고 일반 성도들은 사제들이 읽어주는 성경구절과 기도문을 듣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성경을 스스로 읽을 수도 해석할 수도 없었던 일반 민중들은 화려한 성당건물과 그 안에 그려놓은 각종 성화와 조각상들만이 그들의 신앙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개혁자들이 예배당에 모셔놓은 성화들이나 성상들을 파괴했던 것은 그런 미신적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외친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은 로마 카톨릭을 부정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바로 서자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진정한 종교 개혁입니다.
그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증축하던 중에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기발한 착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면죄부를 사면 연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내 부모나 형제가 예수를 믿지 않고 죽으면 ‘연옥’이라고 하는 지옥대합실에 가 있는데 그 죽은 사람을 위해서 면죄부를 사면 지옥대합실에서 천당으로 옮겨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있지도 않은 연옥이 있다고 가르친 겁니다. 능숙한 구변을 갖춘 테첼이란 신부가 외칩니다.
“똑똑히 들어라. 너희들의 넣는 돈이 이 궤짝에 들어가서 딸랑 소리가 날 때마다 불쌍한 영혼들이 연옥에서부터 해방되어 뛰쳐 나오게 될 것이다.”
그 때 과감하게 ‘그건 아니라’고 외치고 나온 사람이 바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였습니다. 그리고 개신교가 탄생하였습니다.
개신교(Protestant)는 ‘반항하는 사람’, ‘저항하는 세력’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벌인 개혁, reformation은 느슨해지고 일그러진 것을 원래의 완전한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운동이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지금도 개혁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모든 신앙인들의 마음속에서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개신교회를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합니다.
날마다 잘못된 것은 잘라내고 올바른 신앙을 향하여 끊임없이 개혁되어
가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오늘 날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이기주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기주의로 살면 나에게 이익이 될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습니까?
더 큰 문제는 이 이기주의가 얼마나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나와 세상을 더 불행하게 만들 따름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성장해야 합니다. 또한 성장을 하여야 하되 균형있게 성장을 하여야 합니다. 몸이 자람과 함께 지식도 자라고 영도 자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어지간히 나이가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철이 덜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고 그 다음에 있을 결과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감정, 내 기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라고 당연한 것처럼 말합니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정말로 감정은 무방비상태입니까? 기분은 이렇게 마음대로 내버려두어도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고로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순간적인 감정의 표출에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 점을 잊지 맙시다.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나는 어른이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전반부 1-7장은 이스라엘 회복의 외적 증거인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보여 주었고, 후반부 8-13장에서는
회복의 내적 증거, 즉 신앙 회복과 제도 정비 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10장 28절 이후에 보면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금하여 영적 순수성을 지키기로 하고, 안식일 준수, 십일조 등을 하기로 결단합니다. 그런데 본서의 마지막 장인 13장에서는 이스라엘이 타락한 것을 보여 주고있습니다.
신앙은 한 번 은혜 받고, 한 번 잘 섬긴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은혜 받아야.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세월이 가면서 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기본 정신, 말씀으로 돌아가자! 말씀의 반대는 내 생각.
사람이나, 공동체가 무슨 일을 이루고자 할 때 분명한 목표와 원칙, 기준이 없으면 주변 사람 관계와 환경에 따라 흔들리게 되며 혼란이 따라 옵니다.
느헤미야 10장 28절 이하를 보면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12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약속과 원칙이 다 무너져 있었습니다.
오늘 13장을 보면 느헤미야의 세 번의 기도가 나옵니다.
느헤미야의 세 번의 기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세웠던 세 가지의 원칙과 기준을 무시하고 타락했을 때 그것을 다시 회복시키면서 드린 기도입니다.
개혁이란 즉시 회개하고 시대와 상황을 뛰어넘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1절 “그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런데 거기에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란 것입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이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3장 3절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러면서 3절에서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다고
합니다. 성전의 순결성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진정성과 순결입니다.
십계명의 첫 계명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마음대로, 정욕대로, 이성으로 모든 일을 하기 때문에 신앙 생활이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면 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형식화되어 갑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는 것이 새롭지 않고 감동도 없게 됩니다.
이러다 보면 먼저 교회에 대해 시큰둥해집니다. 교회가 신앙의 중심인데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교회를 우습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먼서 점점 교회와 거리를 두게 되고 자신의 방법대로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5절을 보면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으니”
도비야는 성벽을 건축할 때 산발랏과 함께 성벽 재건을 괴롭힌 사람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니 성전에 도비야를 위한 방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도비야가 제사장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그 방을 사용한 것입니다.
성전 건축 후 오랜 세월이 지나자 사람들의 생각이 무뎌진 것입니다.
십일조와 안식일도 형식적으로만 지키게 되었습니다.
내용을 타협하다보니 암몬사람, 모압사람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성전 건축을 방해했던 도비야까지 성전 창고에 방을 주어 살게 한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에도 10년이 지나면 다시 한번 점검을 해봐야 합니다.
원형과 달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국가나 사회, 가정,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의 종교 개혁의 두 번째는 안식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바빠서, 세상이 좋아서 안식일마저 지키지 않습니다.
발 다친 사람, 하나님께서 고쳐 주었더니 등산,
마지막으로 신앙 개혁은 십일조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돈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돈에 대해 매우 예민한데, 여기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십일조라는 원칙입니다. 이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평생 고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 원칙을 다시 이야기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과 동업. 부자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새는 돈이 없게, 목사들끼리는 우스개 소리로 다들 십일조한다. 병원이나 법원
마지막으로 교회가 새로워지는 방법은 순결을 지키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거룩하게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성전을 성결하게 다시 세운 이후에 드린 첫 번째 기도가 14절의 기도입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드린 두 번째 기도가 22절 나옵니다.
암몬과 모압 여인들과 결혼을 하며 이방신들이 판을 치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는 사마리아 총독인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세운 믿음의 원칙이 사람의 관계와 상황에 따라 무너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가정을 다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세웠습니다. 그러면서 드린 기도가 31절입니다.
느헤미야서의 마지막 내용은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라는 느헤미야의 기도입니다.
느헤미야의 마지막 기도에서 야베스의 기도가 생각이 났습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담겨 있는 역대상 4장 10절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야베스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해서 성장하면서까지 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야베스는 탄식과 원망을 하며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삶에 놀라운 반전을 일으켰습니다. 인생역전을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야베스의 삶에서 가장 기억이 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야베스는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환난과 근심을 넘어 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삶이 바로 야베스의 삶과 같았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인생의 중심에 두고 그 분의 말씀을 원칙과 기준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는 진정한 복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삶의 가치였고 기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느헤미야를 높이셨고 그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여러분!
종교개혁이 따로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부터 느헤미야가
붙잡았던 말씀 안에서의 원칙과 기준을 잘 지키어 어디에서든지 당당하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으로
하나님의 진정한 복을 담아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