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 미가 6:6-8, 300장
영적세계는 철저한 전쟁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축복을 받으려면 영적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 보면 금생이나 내세의 축복은 다 이기는 자에게 주신다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기게 됩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 편에 서면 이깁니다.
사업을 해도, 직장 생활을 해도, 목회를 해도 하나님 편에 서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승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귀하게 쓰셨던 사람들을 보면 다 나름대로 큰 허물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극찬을 하셨던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간음을 했었고 또 그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정부의 남편을 살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그의 과오를 생각하면 그는 절대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한 다윗을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편 32편 1절에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는 자의 두목이었습니다. 그래서 괴수 중의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이 나오는 여자들 다말, 라합, 룻 그리고 밧세바는 다 문제가 많은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저들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관계를 하여 자식을 낳은 여자였습니다.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그는 창녀였습니다.
룻은 이방여자였습니다.
그리고 밧세바는 ‘우리야의 아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1절을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이 말씀은 귀한 그릇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인데 하나님은 금과 은 혹 나무와 질그릇을 상관하지 않으시고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이 귀한 그릇이라는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깨끗한 그릇은 없습니다.
저들은 본시 깨끗한 그릇이 아닌데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그릇들입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원래 죄 가운데 살아가던 저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고 깨끗하게 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부른 찬송 300장은 ‘내 맘이 낙심되며’입니다.
‘그 은혜가 내게 족하네 그 은혜가 족하네 이 괴론 세상 지날 때
그 은혜가 족하네‘라는 가사가 저는 너무나 좋습니다.
저의 간증이고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죄인인 저를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고 깨끗케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귀한 그릇으로 사용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었을 때에 그들이 능력이 있어서 애굽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시내 산에서
거룩한 법을 주셨습니다. 그 법은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들의 삶의 원리가 되고 지표가 됩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복을 주시지만, 그렇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징벌하시고 열방의 포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신명기 사관입니다.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징벌.
율법을 지키면 애굽에서 나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이고,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성도들의 삶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법을 지키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을 디티리히 반회퍼는 ‘값싼 은혜’라고 정의했습니다.
히틀러가 독일을 지배했을 때, 독일인 성도들도 나치에 굴복하였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리스도인들이 나치에 굴복하여 나치에게 놀아나는 것을 보고 헌신 없는 구원, 정의가 없는 믿음, 하나님의 법이 없는 은혜를
‘값싼 은혜’(Cheap Grace)라고 불렀습니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와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지정학적으로도 그렇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유사한 점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강대국들 사이에 낀 조그마한 나라로서 수없이 외침을 겪은 그 수난사가 비슷합니다.
오늘의 말씀이 기록된 주전 8세기 무렵에도 북쪽에는 앗수르가 버티고 있고, 남쪽에는 애굽이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강대국들 사이에 끼여서 애매하게 수난을 겪어야 했고, 툭하면 이 나라가 쳐들어와 짓밟고 저 나라가 들이닥쳐 노략질하고 늑탈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본국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고작 5백만 정도이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이 더 많아서 천 5백만 정도라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기록한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던 그때에도 남북 이스라엘은 안팎으로 다 무너져 가는 실로 어려운 형편에 있었습니다.
밖으로는 시시각각 앗수르와 애굽의 침략의 위협이 다가드는데,
안으로는 온갖 사회적인 부패와 부조리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미 6:6-8은 불순종과 타락의 길을 걷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인간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 가운데 하나가 보상심리입니다.
모든 영역에서 보상을 통하여 떳떳하고 당당해지고자 합니다.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가정과 교회에서까지도 보상심리를 통하여
자신의 당당함을 유지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결코 우리가 갚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상심리에 익숙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나설 때도 그러한 태도로 나설 때가 많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의 전반도 보상심리에 물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멸망으로 향하던 유다 백성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보상심리에 물들어 여전히 불순종과 타락의 길을 걷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어려움이 다가올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무엇과 어떤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보상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무엇과 어떤 일”을 받아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삶의 태도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에 관심을 두십니다.
사람들이 미가에게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포로로 지내는 이 상황에서, 좌절이 고착화된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제사를 지내면 좋겠습니까? 일 년 된 송아지 하나를 잡아서 번제물로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일 년 된 송아지는 가장 좋은 동물의 대표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으로 바치면 되겠느냐고 묻는데,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식물에서 난 상품 중에서도 최고가를 구가하는 올리브 기름을 바치면 되겠느냐고 물어도, 그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식물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라면 뭐가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맏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그것도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천지만물도, 인간도 그 어느 것을 바쳐도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 이래로 여호와 신앙의 민족으로 살아온 이스라엘은 율법에 따라서 항상 무언가를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아무것도 받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번제물이 없으면, 이스라엘의 성전예배는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심각한 질문에, 미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받고 싶은 번제물은 나의 공의를 실천하는 것, 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나와 함께 행하는 것이다.”
공의를 실천하고, 사랑을 행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이 세 가지 제물만 받겠다고 미가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간단히 말하면 신앙생활의 본질을 되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형식과 겉치레가 아니고 본질 그 자체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본질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의 문제는 한 마디로 요약해 보면 6절에 기록된 대로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라는 잘못된 신앙적 열심에 있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 무엇을 바칠까, 얼마나 많이 바칠까, 무엇을 할까 라는 문제에만 골몰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것인가를 고심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주일마다 성수 주일하는 것이 귀하고, 정성을 다해서 십일조를 드리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봉사를 하는 것도 참 귀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빠지면 안 됩니다.
받은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없이 행해지는 열심이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가 먼저, 그래서 신약의 시대를 성령의 시대, 은혜의 시대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6:28을 보면 제자들이 주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주님의 제자들도 온통 관심이 일에 쏠려 있었습니다.
6:29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일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일보다 믿음이 우선이라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줍니다.
8절에서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롬 12:1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
우리는 내가 가진 그 어떤 것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드리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받고 싶어 하시는 우리의 믿음의 삶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정의를 행하는 삶입니다.
정의란 히브리어로 미쉬파트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재판에서 쓰여 지던 말입니다. 재판장이 공정하게 판결한 것을 가리킬 때 미쉬파트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 한 복판에서 살 때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옳고 바르게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믿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 좋은 일입니다. 열심히 찬송하는 것도 좋습니다.
또 봉사하는 것, 헌금 열심히 하는 것, 다 좋은 일입니다마는 저는 그런 것으로 평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잘 믿느냐 못 믿느냐 하는 것은 그가 가정과 직장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거기서부터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남에게서 신뢰받고 존경받을 만한 신앙적 인격이 되었을 때에 그 사람이 예수 잘 믿는 사람입니다. 사람됨이 남들에게 예수 믿을 마음을 불러 일으킬 수 있어야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저 사람을 보니 나도 예수 믿어야 되겠다” 이런 마음이 우러나게 해 준다면 그 사람이 참 믿음의 사람입니다.
종교개혁자 캘빈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통하여 보기를 원하시는 것은 오직 이 예배를 통하여 회개와 믿음과 진실성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다”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의 진정한 목적은 회개와 변화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미가서 본문에서 먼저 정의를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의의 거짓말 없습니다. 거짓말을 허용한 경우는 독립군을 숨겨주는 경우. 안네 프랑크를 살리기 위한 경우. 그 외에는 거짓말하면 안됩니다.
변호사나 의사 앞에서 거짓말해서는 치료받지 못합니다.
다음이 인자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인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이 말은 은혜, 사랑, 긍휼, 인자라는 뜻으로 두루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 이웃의 어려움을 돌아볼 줄 아는 삶, 이웃의 아픔과 함께 할 줄 아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특별히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받았고, 또 지금도 그 헤세드를 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태양 빛을 받아 지구에 그 빛을 반사하는 달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그 헤세드를 이웃에게 나누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잠언 19:17에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겸손’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사람 앞에서는 사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남남끼리 복잡하게 어울려 사노라면 별의별 일을 다 겪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 가운데 “I am sorry.”할 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한 마디면 되겠는데, 이 소리가 그렇게 힘이 듭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성경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 합니다.
회개가 별 것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미안합니다’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사람 앞에서 ‘미안합니다’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사람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은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고 가리켜 주시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한 보상심리로 무엇인가를 드리며,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먼저 세상 속에서 삶의 태도를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예배의 본질은 바로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고,
신앙의 본질은 바로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입니다.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