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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일서 2: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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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희준의 하숙생에서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위대한 왕입니다.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서 원통해 했다는 전승이 내려올 정도입니다. 그런 그가 병에 걸려 33세에 요절하는데 임종 직전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나는 온 세상을 정복했지만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했노라. 내 관의 양쪽에 구멍을 내서 빈 두 손이 보이도록 하시오!” 공수래공수거라는 인생 교훈을 남긴 유명한 일화입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단 한 번뿐이고 그 마지막인 죽음이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많은 사람들이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마치 내게는 그 순간이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혹은 아주 먼 훗날에나 올 것처럼 생각합니다. 나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나는 아직 건강하니까 이렇게들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장 확실하면서 동시에 가장 불확실한 게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닥치니까 가장 확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닥칠지 나 자신조차 모르니까 가장 불확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남은 날을 계수하는 지혜를 구했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죽음에 몰두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되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염두에 두고 살자는 겁니다. 지혜로운 마라토너는 무조건 열심히 달리지 않습니다. 

결승점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계산하며 어떻게 하면 끝까지 잘 달릴까라고 생각하며 페이스 조절을 하면서 뜁니다. 

여러분, 과연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에 당도했을 때 허무하지 않고 뿌듯해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빈손으로 가지만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설 때 내 인생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면 정말 뿌듯할 겁니다. 

 

오늘 본문의 15절 말씀이 정확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마음이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 말은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절대로 행복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앙 생활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내 마음을 채울 때는  행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중심이 되실 때에는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을 세상에 주기 시작하면 그 마음에는 갈등과 고통 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경 말씀을 보아도 그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왜요? 마음이 나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두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징계를 당했습니다. 

하나님도 믿고 바알도 믿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성경에 나오는 ‘세상’은 크게 3가지 용례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을 가리킵니다. 

둘째는 우주만물 가운데서도 특히 인간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할 때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셋째는 사탄의 지배를 받는 죄악된 세상을 가리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상’은 셋째의 의미 즉 사탄의 지배를 받는 죄악된 세상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 15절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의 죄악된 것들을 사랑하고 집착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4절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하나님 사랑과 세상 사랑은 상극 관계라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오늘 본문 16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세상에 있는 것들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그 욕망이 3가지로 나타난다고 증거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육체의 죄성을 따라 품게 되는 욕망인데 인간의 기본 욕구를 초과하는 과도한 욕망을 의미합니다. 정도를 벗어난 식욕이나 성욕, 그 밖에 술 취함과 방탕 등 각종 세상 향락을 가리킵니다. 

안목의 정욕은 눈으로 보는데서 비롯되는 욕망입니다.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닥치는 대로 소유하고 즐기려는 과도한 욕망을 가리킵니다. 

이생의 자랑은 세상의 헛된 것을 과시하려는 욕망인데, 한 마디로 말하면 

과도한 명예욕과 허영심입니다. 

이 모든 욕망들은 세상에 속한 것들로 잠시 잠깐은 화려해 보이고, 좋아 보이고, 즐거워 보이지만 다 사라져버립니다. 그제야 헛되고 헛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뭐라고 표현합니까? 

17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영어성경(NIV)에는 ‘pass away’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흔적도 남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인생을 가리켜 이렇게 증거합니다.

베드로전서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육체’는 인간을 가리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이 쉬이 쇠합니다. 

생로병사입니다. 인간의 부귀영화는 풀의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꽃은 풀보다도 더 빨리 떨어지니까 세상의 부귀영화는 그렇게 쉬이 사라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꽃이 아무리 붉고 화려해도 10일을 못 가듯이 부귀영화가 오래 못 가고, 

권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10년을 못 간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인생무상입니다. 별 생각 없이 그저 먹고 마시고, 세상에 집착해서 살다 보면 인생이 

이렇게 쉬이 사라지고 만다고 사도 베드로는 선포하였습니다.  

시간은 안 쓰면 그냥 사라집니다. 물질도 안 쓰면 남는 것 같지만 썩거나 

오용되기 일쑤입니다. 

 

루마니아는 유럽에서 아주 못사는 나라중의 하나인데 ‘미르체라 포페스큐’라는 1조원대의 비트 코인을 소유한 부자가 휴양지인 코스타리카 바다에서 

수영하다가 급류에 휩쓸려 익사해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비트 코인은 비밀번호를 모르면 현금화를 할 수가 없는데 

이 사람이 그 비밀번호를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1조원은 그냥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의외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자기도 못 쓰고 좋은 일도 못하고 갑니다. 그냥 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리석은 부자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러므로 결국 사라지는 시간과 물질이 영원히 남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을 위해 드리고 선용해야 합니다. 재능, 달란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떤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 하나하나가 모여 내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염세적으로 살라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니까 고고하게 이슬만 먹고 살라는 뜻도 아닙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에 너무 빠지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먹고 마시고 입어야 살지요. 

하지만 그런 것들에 사로잡히지는 말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합니다. . 

마태복음 6:31-32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나님도 우리의 육신의 필요를 알고 계시니까 책임져 주신다는 겁니다. 

하지만 과도하게 염려하고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지 탐욕 채워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추구할 방향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인생의 우선순위를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 즉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주기도문을 왜 가르쳐 주셨습니까?

주기도문대로 살아라! 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주기도문대로 사는 것이 성도의 진정한 삶입니다.

오늘도 사탄은 우리가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되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우리를 미혹하거나 방해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탄의 유혹과 방해를 받지 않는 

영적인 눈이 뜨여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바다.

 

인간은 세월이 흐르게 되면 누구나 나이를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이든 모든 사람들을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늙은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미숙한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연륜이 더해지고 교회에서 보낸 세월이 많아지다 보면 영적으로 성숙해 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발견합니다.  

영적 성숙과 영적 미숙의 차이를 만드는 근본적인 요소의 하나는 바로 가치관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한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과연 신앙적 가치관을 얼마나 내면화하고 사느냐,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성경적 가치관을 붙들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적 가치관과 비성경적 가치관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비성경적 가치관의 핵심은 한마디로 세속성이요 순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떤 분이 교회 생활을 오래 했어도 그가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순간적인 가치에 붙들려 살고 있다면 그는 여전히 영적으로 미숙한 성도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런 세속적 가치에 붙들린 인생과 반대로 영원한 가치를 지향하는 인생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속적 가치-지향적 인생과 영원한 가치-지향적 인생, 

도대체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세속적 가치 지향의 인생이란 한마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자랑의 공통점은 감각적이고 순간적인 충동에 기초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욕구 그 자체를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구가 남용되고 과용될 때 그것이 바로 성경이 경계하는 정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이런 세속적 가치의 욕망에 빠지는 순간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그리고 이런 욕망의 출처는 결코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욕망의 공통점을 본문 17절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그것은 지나가는 일순간적 가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가치를 추구한 종말은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세속적 가치 지향의 인생을 살것인지-그것은 우리의 선택의 몫입니다. First class의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세컨 레벨의 삶을 살 것인지는 오로지 우리들의 선택인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단어들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과 그 정욕, 하나님의 뜻 그리고 지나감과 영원히 거함

이 세상과 정욕은 지나가는 것이라고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겠다고 고백한 사도 바울, 기독교의 박해를 피해서 지하 동굴인 카타콤에서 생활하였던 로마 기독교인들, 그들의 흔적은 기독교 역사로, 전승으로 그리고 성경으로 이렇게 거룩하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면서 체험하며 사는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세상의 매력 앞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펼쳐 나가시는, 그래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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