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의 삶은 어느 누구와도, 어떤 형태로든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먼저 태어나자마자 부모와의 관계, 형제와의 관계, 친구와 이웃과의 관계,
관계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하고, 또는 성공으로 나아가게도 하고, 실패하게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여러 관계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면 바로 스승과 제자간의 관계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배움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생물은 주어진 본능만으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사람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배움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배우고 익혀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배움에 있어서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 보다는 무엇을 배웠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바른 것을 배워야 하고 그리고
우리가 배운다는 것은 누군가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는 스승의 날이었고 교회에서는 오늘을 스승의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스승과 제자의 모습은 크게 구약에서는 모세와 여호수아, 엘리야와 엘리사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를 들 수 있겠는데 오늘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부르는 장면까지의 이야기와 부르는 장면에서 같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구약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는 열왕기상 18장에 기록된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승리하는 장면입니다.
엘리야가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제단을 사르고, 닫혔던 하늘 문이 열려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큰일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자신을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절망에 빠진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사람의 음성을 듣고 환경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믿을 대상이 아닙니다.
물론 엘리야도 인간이기 때문에, 때로는 지칠 때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늘 열심이 유별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엘리야는 열심히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전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지 않고 있으며, 내가 노력을 많이 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과거와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하는 일에 열매가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한 보람과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일의 결과가 좋아야 그 일을 계속하고 싶은 욕망도 갖습니다.
일은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좋지 못할 때, 또는 열심히 노력해서 일했는데도 열매가 없을 때 실망하고 좌절하고 침체에 빠집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지 않을 때 힘들어합니다.
분명히 삶에는 인과응보의 법칙이 작용합니다. 성경에도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는 내가 뿌리지 않은 것도 거두고, 나에게 원인이 없는 일도 생기곤 합니다. 어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맥없이 돌아가신 후 그의 주특기인 고기잡는 일에서도 실패한 후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황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베드로는 거절했어야 했지만 ‘말씀대로’ 그물을 내려 보겠다 했습니다.
예수님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믿어보자고 결정한 것입니다.
이런 결정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내 생각이나 경험으로는 아닌데.
그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많은 고기였습니다.
베드로는 고기가 많이 잡힌 것에 놀라기보다는 예수라는 분에 대해 놀랐습니다. 그래서 한 말이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고백하는 말들이 내가 죄인입니다. 그전에는 아니었는데.
베드로의 생각의 틀이 깨지는 순간 인과응보를 뛰어넘는 인생이 있구나.
이렇게 새로운 인생은 은혜, 카리스마로 시작이 됩니다.
우리 인생은 기브 앤 테이크의 사고에 잡혀 있다. 크리스찬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준 것이 있으면 받아야 합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기브 앤 테이크와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이 은혜, 카리스마입니다.
성경은 은혜 즉 카리스마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엄청난 기적을 일으켰던 위대한 선지자이었지만 그도 육체를 입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위대한 역사 뒤에 그도 육체적으로는 상당히 피곤해졌습니다.
그리고 육체적인 탈진이 그에게 영적인 침체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영, 혼, 육은 서로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혼과 육의 상태가 영에 영향을 미치고, 영의 상태가 혼과 육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한 영적 상태, 건강한 정신적인 상태, 건강한 육체적인 상태를 유지하려면 영과 혼과 육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요한삼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오늘 본문 이전의 말씀을 살펴보면, 생명의 위협을 느낀 엘리야가 낙망하며 광야로 찾아가 로뎀 나무아래 힘없이 주저앉아 있을 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를 어루만져 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힘을 돋우기 위해 엘리야에게 물과 떡을 공급합니다.
6절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8절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호렙산은, 모세가 출애굽을 한 후, 하나님을 만나 십계명을 받은 산입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언약을 맺은 거룩한 성산이었기 때문에, 호렙산을 하나님의 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위로와 힘을 얻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 호렙을 찾아 동굴에 들어가 기도에 힘쓴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고, 우리로서도 생각이 되어집니다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선지자라는 직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선지자로서의 역할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전하여야 하는데, 아무도 없는 동굴에 엘리야가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위로와 힘을 공급받은 엘리야가, 그 다음에 했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이었겠습니까?
그 힘으로 다시금 나아가 그를 대적하는 이세벨과 맞서 싸워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발걸음을 행했던 곳은 성읍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도 없는 동굴을 향해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9절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의 엘리야를 향한 뜻은, 동굴에 들어가 숨어있는 상태로 기도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기도를 통해 받은 능력으로 우리가 속한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해 나가는 복음의 일꾼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엘리야와 같이, 세상과 영적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 우리 주변에도, 세상의 신들을 따르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강력한 후원자인, 이세벨과 같은 세상의 세력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과의 싸움에서, 결코 우리가 밀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다시금 이세벨과 부딪혀 싸워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엘리야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를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9절과 13절을 보면,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두 번이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엘리야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을 죽이려는 이세벨의 눈을 피해서
호렙 산의 한 동굴에 들어가 숨어 있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세상 모든 사물에는 다 정해진 자리가 있습니다.
자기 자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도 저마다 정해진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있을 자리, 자기가 설 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분별력 있게 행동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자기 자리를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있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오늘 본문의 엘리야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어긋난 또 다른 부분은 기도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교통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 또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이 통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엘리야에게 있어서 기도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이런 과정이 부족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음성을 적시 적소에 캣취하지 못했다는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한평생 역사를 연구한 유명한 역사가 토인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를 자세히 보니 ‘사람의 뜻대로는 안 되더라’고 합니다.
우리는 침체없는 형통을, 계속적으로 형통하고 발전하는 것만을 바랍니다.
그런데 역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침체가 있고 형통이 있습니다.
역사는 흥망성쇠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코로나를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사람들은 미처 모르고 있지만 작으나 크나 현실 안에 사인이 있고 의미가 있더라 하는 것입니다. 흥망성쇠, 망하고 흥하고 살고 죽고 그 많은 사건 속에 겸손히 받아 들이면 그 속에 메시지가 있더라는 것이 토인비의 방대한 역사 연구의 결과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개연성도 있고, 목적도 있고, 뜻이 있었습니다. 반드시 있을 것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얼마나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입니다.
또한 그 속에 있는 의미를 내가 얼마나 아느냐가 문제입니다.
그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병들어도 저주가 아니요, 잠깐의 실패는 있어도 주저앉는 법이 없어집니다. 바르게 예수 믿는 사람은 고난도 내게 주시는 사랑으로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 자체가 사랑의 증거요, 또한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길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수용하는 이 사람이 진정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또 엘리야가 원했던 하나님과의 교통함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크고 강한 바람같은 만남이었습니다. 또한 지진과 같이 큰 요동함이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또한 불과 같이 임하는, 뜨끈뜨끈한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기대하는 그런 모습으로는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전혀 엘리야가 예상하지 못했던 세미한 음성으로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바로 이 세미한 음성이, 오늘도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줄로 믿습니다. 15-18절에서 하사엘에게 기름부어 아람왕이 되게 하고,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바알에게 무릅 꿇지 않은 자 칠천명을 알게 해 준다고.
그 후 엘리야는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동굴에 머물러 있는 그의 몸이, 이제 다시금 성읍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여전히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엘리야는, 그 험한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후 엘리야가 엘리사를 제자로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엘리사 역시 여호수아처럼 하나님께서 지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그를 찾아가 제자로 부르는데… 그 시각에 엘리사는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다가 가서 한 일은 아무 말도 안 하고 겉옷을 그에게 던졌습니다. 그 당시 겉 옷을 벗어 누군가에게 던지는 행위의 의미는 나의 제자가 되어 달라는 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가 되어 엘리야를 섬기며 수종 들게 됩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이 성전에 모였습니다.
일 년 중 아름다운 계절 이 5월에, 우리의 신앙과 인생이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달라지고, 새롭게 변화되어져 갈 수 있는 은혜의 달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더욱 더 열심히 예배하고, 더욱 더 열심히 기도하고, 무엇보다도 더 열심히 전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