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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탄 절 (요한복음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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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탄생 기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성서에는 예수의 탄생 연도나 날짜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태어난 해에 관하여 신학자들은 일치하여 B.C 6-4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와 누가복음 이 두 기록은 내용과 관점에 있어서 몇 가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즉,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아브라함과 다윗 왕가의 족보를 소개하고, 동방 박사의 경배를 받으신 것 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누가는 말 구유(여물통)에서 나신 예수의 모습과 목자들의 경배를 받으심을 언급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구원하신 사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교회가 지키기 시작한 것은 4세기 후반(354년경)부터 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12월 25일과 1월 7일 설이 대립하였습니다.

이렇게 성탄일이 다르게 된 것은 서로 다른 달력을 쓰기 때문입니다. 

서로마제국에서는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하여 12월 25일로 정했고, 동로마제국에서는 율리우스력에 따라 1월 7일로 정했는데 1월 7일은 현현절, 즉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방문한 날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리스 정교회나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1월 7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산타크로스는 3세기말 어린이를 보호하는 소아시아, 즉 터어키의 성 니콜라스의 이름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름이 암르테르담을 거쳐서 

뉴 암스테르담, 뉴욕에서 상업적으로 만들어져 꽃 핀 것이 산타크로스입니다. 여러분, 성탄이 무엇입니까?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성탄의 의미가 이것입니다.

평화를 이루기가 그렇게 녹록치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지만, 평화를 위해서는 내가 옳고 니가 틀리다가 아니라 내가 죽어야 합니다.

올해의 사자성어, 아시타비, 내로남불, 양보해야 평화가 찾아옵니다. 

 

성탄의 주제는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고 하는 것을 증명해 보이신 사건이 성탄의 사건입니다.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사랑은 현장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 함께 있어야 사랑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 하여야 사랑인 것입니다. 

 

욥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합니다. 그 때 친구 셋이 찾아와 하는 이야기가 가관입니다. ‘잘 생각해 보아라, 공의의 하나님께서 아무 죄없는 고난을 당하게 하시겠느냐? 무엇인가 너에게 비밀스러운 죄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고 인간이 어떻고, 진리가 어떻고 선이 어떻고, 이 

소리 저 소리를 주워댑니다. 욥이 견디다 못해 그들을 보고 말합니다.

‘제발 입 좀 다물어라. 그같은 말은 나도 할 수 있다.’

여러분, 말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말로써 해결되리라고 기대하지도 맙시다.

입 다물고 조용히 그 자리에 같이 있으십시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성탄은 사랑입니다. 보다 자세한 설명을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우리가 알거나 모르거나, 혹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 안에 있습니다. 

다만,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당시의 정황을 말해주는 간략하면서도 명확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일찍이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수많은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때로는 노아의 홍수와 같은 심판을 통해서, 때로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같은 징계를 통해서, 때로는 전쟁과 재해와 기아와 같은 고난을 통해서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우리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하나님께서 몸소 인간에게로 오셨습니다. 적극적으로, ‘네가 나에게로 오라’가 아닙니다. 

‘너 있는 곳으로 내가 가마’였습니다. 몸소 공간을 옮기십니다. 

이 사건이 바로 주님의 오심입니다. 

신학적 용어로는 ‘성육신’ ‘Incarnation’ 친히 육신을 입고 오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서 역사 안에 들어 오셨습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성탄을 일컬어 ‘In-breaking’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in’은 ‘들어오다’라는 뜻이고 ‘break’는 ‘깨뜨리다, 부수다, 파괴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In-breaking’은 곧 굳게 닫힌 문을 깨부수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알아보지도, 깨닫지도 못한 우리가 아닙니까?

그 높고 튼튼한 성같고 담같은 ‘벽’을 깨부수고 들어오셨습니다.

역사 안으로 하나님께서 들어오심입니다. 성탄의 사건이 이것입니다. 

사람이 되심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헬라어로는 ‘호 로고스 사르크스 에게네토’ 

존재의 바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벨기에에서 태어나 1860년에 다미안이란 수도명을 받은 그는 1864년에 

자신이 지원하여 하와이 선교사로 파견되었고, 그 후 그는 9년 동안 하와이 원주민들의 복음화를 위하여 헌신하는데 하와이 주변 섬들을 순회 선교하다가 한센병 환자들의 집단 수용소인 몰라카이 섬을 방문하게 되고 그 비참함에 놀라게 됩니다. 

1873년 이번에도 자신의 요청에 따라, 몰로카이의 나환자 촌으로 파견되어, 여생을 나환자들과 함께 살며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주려고 갖은 애를 쓰지만, 

끝까지 저들은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았습니다. 

건강한 사람으로서 당신이 우리를 돕는 것은 일종의 취미요 도덕적 향락주의라고 비난을 합니다.

당신이 우리를 사랑한다 한들 우리의 이 좌절과 절망을 알기나 하겠는가?

그러자 그는 하나님 앞에 엄청난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로 하여금 문둥병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문둥병자가 되지 않고는 선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그 자신도 문둥병자가 되자 마침내 그들이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게 되고, 하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여러분, 사랑의 소통이 이다지도 어렵습니다.

나의 나됨을 버리고 상대방이 되어야만 소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약자가 되어지고, 가난한 자가 되어져서 

우리에게 사랑의 언어를 던져주신 것입니다. 

 

‘육신을 입으셨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시고 인간의 한계 안에 들어오심입니다. 이것이 역사 한가운데서 성탄이라는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주와 조소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 대신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여기에 성탄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탄을 어떠한 의미로 맞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내가 얼마나 죄인이며, 동시에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하나님 앞에 얼마나 고귀한 가치의 존재인지를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생일입니다. 또한 이 사실을 알고 깨달은 저와 여러분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다시 태어나는 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의 고백을 들어보십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고 은혜와 진리를 풍성하게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탄절 성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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