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매주 교인들의 기도제목을 교회 홈페이지에 올려주시는 셀리더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주 기도제목 중 제일 많은 것,
코로나 사태 종식, 백신 개발, 저도 비대면 예배가 대면 예배로,
2020년은 인류 역사에 코로나의 해로 기록될 것입니다.
코로나는 우리들의 일상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정부는 2단계와 3단계의 중간인 2.5단계로, 예배도 9월 6일까지 비대면으로,
이번 사태의 책임은 명백히 전광훈과 사랑제일교회 교인들과 그들을 정치에 이용하려고 했던 황교안과 그를 추종하는 정치인들에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부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사랑제일교회에
부었다는 음모론을 펼치며 적반하장으로 정부를 고발한 상태입니다.
양심에 털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단인 신천지도 하는 사과를 하지 않고
저렇게 미쳐 날뛰고 있겠습니까?
‘양심’의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함께 보신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으니 저렇게 막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교단이 늦게나마 저 집단을 이단으로 규정지으려고 하는 것은 불행중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이 밝게 작용을 하면 법 없이도 얼마든지 아름답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래의 모습은 양심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꾸 양심에 털이 날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도 양심에 털이 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어떻게 하여야겠느냐?
그 방법은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말씀과 성령에 끌려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주신 말씀과 성령의 감동으로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제일교회 교인들은 전광훈이라는 미치광이에게 넘어가 성경대로가 아닌
전광훈의 말대로, 죄송합니다만, 빤쓰를 벗으라면 벗을 정도가 되어야 교인의 자격이 있다, 집단최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성경에 어떻게 쓰여있나를 발견하는 것이고
성경에서 말씀하는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 크리스찬,
아니면 단언컨대 전광훈의 무리들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가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해도 다를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 믿을 때는 내가 예수 믿고, 내가 예수를 따라가는 줄로 생각을 하지만 얼마간 믿고 보면 그게 아닌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믿은 게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믿게 하시고, 주님께서 나를 인도하시고,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놀라우신 주님의 섭리에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의 그 크신 경륜 속에 내가 쓰여지고 있다는 정체의식으로 한평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밤하늘의 별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염으로 보이지 않는 것
신앙의 순수함이 사라진 지금, 신앙의 야성을 회복해야,
세상 사람들은 흔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무슨 재미로 사느냐?”
예수 믿는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비정상입니다.
오늘 본문의 15절 말씀이 정확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마음이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 말은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절대로 행복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내 마음을 채울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중심이 되실 때에 은혜 충만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을 세상에 주기 시작하면 그 마음에는 갈등과 고통 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경 말씀을 보아도 그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왜요? 마음이 나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 3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인간은 세월이 흐르게 되면 누구나 나이를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이든 모든 사람들을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늙은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미숙한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연륜이 더해지고 교회에서 보낸 세월이 많아지다 보면 영적으로 성숙해 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흔하게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성숙과 영적 미숙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차이를 만드는 근본적인 요소의 하나는 바로 가치관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한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과연 신앙적 가치관을 얼마나 내면화하고 사느냐,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성경적 가치관을 붙들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적 가치관의 결정판은 산상수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저희 부부는 이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결혼했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잘 알지 못하면서.
세상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결혼하느냐.
그러면 성경적 가치관과 비성경적 가치관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비성경적 가치관의 핵심은 한마디로 세속성이요 순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런 세속적 가치에 붙들린 인생과 반대로 영원한 가치를 지향하는 인생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속적 가치-지향적 인생과 영원한 가치-지향적 인생,
도대체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세속적 가치 지향의 인생이란 한마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런데 이 세 가지 세상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사단 마귀가 인간을 유혹하고 파멸시키고자 태초부터 사용해온 무기임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첫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금지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본 순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게” 느끼게 한 것입니다.
먹음직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요, 보암직이 바로 안목의 정욕이요, 이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만큼 지혜로와 진다고 함이 바로 이생의 자랑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금식하고 계신 광야의 예수님을 찾아온 마귀는 다시 이 세 가지 무기를 사용합니다.
이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육신의 정욕의 시험이지요.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 주며 절만 하면 다 주겠다고, 안목의 시험입니다. . 그리고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여기서 뛰어 내려 보라고
땅에 몸이 닿기 전 천사가 너를 붙들어 올리면 너는 내일 유명한 존재가 된다고, 이생의 자랑이지요.
이 세 가지 자랑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감각적이고 순간적인 충동에 기초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욕구 그 자체를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구가 남용되고 과용될 때 그것이 바로 성경이 경계하는
정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이런 세속적 가치의 욕망에 빠지는 순간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그리고 이런 욕망의 출처는 결코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욕망의 공통점을 본문 17절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그것은 지나가는 일순간적 가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가치를 추구한 종말은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인 것입니다.
그 다음, 영원한 가치 지향의 인생의 모습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어떤 단어들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까?
이 세상과 그 정욕, 하나님의 뜻 그리고 지나감과 영원히 거함
이 세상과 정욕은 지나가는 것이라고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 실존을 3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본능적 실존, 도덕적 실존, 종교적 실존
본능적 실존이란 감각적 쾌락과 원초적 욕망을 따르는 실존이고, 누구나
인생을 이 단계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단계가 필연적으로 가져다주는 범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도덕적인 실존의 단계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선이냐 악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우리의 평생은 이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선택을 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도덕은 우리를 죄책감의 자리로 인도할 수는 있어도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종교적 실존의 자리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적 실존의 단계에서 우리는 비로소 순간의 가치가 아닌 가장 높은 절대 가치, 영원한 가치를 붙들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그 가치는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로마 카타콤에서 생활하였던 로마 기독교인들의 흔적은 성경으로 기독교 역사로 그리고 전승으로 그렇게 거룩하게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의 결론 부분에서 이런 성도들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라고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한 번역학자는 이 부분을 “세상이 이들을 두기에 세상은 적합한 곳이 못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가 잘 알듯이 이 세상은 대단히 매력적인 대상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면서 체험하고 즐기는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세상의 매력 앞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펼쳐 나가시는, 그래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