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C. S. Lewis 교수가 옥스퍼드 대학 채플 시간에
설교를 하고 나올 때, 한 학생이 쫓아 나오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교수님, 교수님이 증거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째서 이런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고통을 허용하시는 겁니까?
그 때 C. S. Lewis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고통이 있어도 교만한 인생인데, 만약 우리 인생길에 고통마저 없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더 교만하겠습니까?”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통이란 귀먹은 세상 사람들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확성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온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합니다.
자녀들이 말썽 부리지 않고 잘 커갈 때, 남편이 다른 사람들보다 승승장구하며 승진을 잘 할 때, 손대는 일마다 잘 되고,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인생 가운데 폭풍이 불고, 풍랑이 밀려올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C. S. Lewis는 우리에게 다가온 고통은 귀먹은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평안하게 살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세상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편안하기를 바라는 공통된 심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환난이 있고 고통이 있고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남의 처지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고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떠한 풍랑으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이 겪는 이 풍랑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고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자들은 격동합니다. 소란을 피웁니다.
떠든다고 해결이 됩니까? 밑으로 내리달을 뿐입니다.
이 풍랑, 이 격랑 속에서 우리는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고,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 조용히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오늘 우리는 욥이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욥은 고난의 대표자입니다.
그런데 욥기에서 말하는 고난, 또 고난당하는 수난자의 모습은 매우 독특합니다. 일반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욥은 의인입니다. 욥기 1장 1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보통 욥과 같은 사람한테는 고통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 다릅니다.
욥은 의인인데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무던히도 고생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착각 중에 이런 착각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살면 아무 일이 없다.
파도 없는 바다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무리 잔잔한 바다라도 파도가 없는 바다는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파도 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크리스찬들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바다에는 으레 크고 작은 파도가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크고 작은 파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한 가지 사실은 똑같은 파도가 밀려와도 어떤 사람은 그 파도를 헤치고 나가고, 어떤 사람은 그 파도에 밀려 난파당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무엇이 문제입니까?
파도가 문제입니까? 내 실력이 문제입니까?
파도를 없애려고 아무리 궁리를 하고 애를 써봐야 헛일입니다. 오히려 파도의 존재를 인정하고 파도를 헤쳐 나아갈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시험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오히려 시험을 이길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 살 동안 시험이 없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험에는 범위가 있고, 하나님만 의지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시험을 통해 겪는 고난보다 더 큰 은혜, 더 큰 축복의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동문을 아시죠? 문이 굳게 닫혀 있고, 문에는 손잡이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가가면 갑자기 짠~ 하고 열립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도 이런 일이 있다는 겁니다. 답답하고 꽈 막혀있지만 끝까지 인내하다 보면 하나님의 때가 되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갈라디아서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승리의 확신.
1장 9절을 보면 사단이 하나님 앞에 욥을 참소합니다.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무서운 도전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이 욥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요, 건강을 주셨기 때문이요, 태평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한번 내리쳐 보세요. 그러면 곧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욥이라고 해서 뭐 나을 줄 아십니까? 이처럼 욥을 모함하고 멸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욥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병들어도, 실패해도 나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여건에서도, 어떠한 악조건에 처한다 해도 그는 나를 배반하거나 내 사랑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이 긴장 관계 속에서 욥이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욥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받은 것이 많아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사단의 생각을 무너뜨리고자 하심입니다.
아무 까닭 없이, 자기에게 어떤 유익이 없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욥은 그렇게 순수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여기에 욥기의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고난의 문제란 곧 믿음의 문제요, 소망의 문제입니다.
로마서 5:3,4절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시련이 있느냐 없느냐, 고난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고난당해서 우느냐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약한 믿음을 강하게 하시고 거짓된 믿음을 순수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의 목적입니다. 욥기는 이것을 욥이라는 한 특정 인물에게 일어나는 사건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합니다. 먼저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는 동방의 부자였습니다. 당시 동방 최고의 갑부였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그 재산을 몽땅 빼앗기고 대책도 없이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그로서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다음 시험으로 욥의 열 자식이 모두 죽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자식이 아닙니까? 그런데 7남 3녀나 되는 자식이 집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몰사해 버렸습니다. 기가 막힐 사건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욥의 태도입니다.
욥기 1:21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는 마지막 보루가 건강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건강마저 잃어버렸습니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잿더미에서 뒹굽니다. 얼마나 참기 어려운 고통이겠습니까? 이제 생의 반려자인 아내마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욥기 2:10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이제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욥에게 재앙이 임하였다함을 듣고는 찾아와서 위로한다고 일주일을 함께 있으나, 할 말이 없습니다. 말없이 앉아 있어줄 때에는 차라리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씩 입을 열기 시작하니 이 말이라는 것이 별로 도움을 주시 못합니다.
인과응보로 몰아갑니다. ‘잘 생각해 보아라. 네게 무슨 큰 죄가 있는 모양이다’ 한다는 이야기가 겨우 이런 식입니다.
끝내 친구들의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고통에 고통을 더할 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욥은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홈리스의 문제는 소망이 없기 때문.
문제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지금 처지가 어떠합니까?라고 묻기보다는 “소망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 막연한 긍정.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요.
욥은 고백합니다. 25절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나는 죽어가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내가 고난을 당하고 실패해도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다는 것입니다.
날이 흐리다고 태양이 사라진 것입니까? 먹구름이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태양은 분명 저편에 빛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소망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너무 자기중심적입니다. 내 일이 잘 되면 하나님도 살아 계시는 것 같고, 내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도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상관없이 살아계십니다. 여기에 소망의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욥의 다음 말을 들어 봅시다.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쿰’은 증인이 자신의 주장을 말하기 위해서 법정에 서는 것을 나타내는 법정 용어로, 여기서는 구속자되신 하나님께서 욥 자신의 진실성을 반드시 변호해 주실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욥은 그 어려운 고난 가운데서도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될 그리스도의 왕국을 보았습니다. 갖은 악은 다 물러가고 찬란하게 밝은 아침은 올 것입니다.
욥은 그렇게 전망하고 소망을 가졌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더욱더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장면은 그 다음입니다.
26절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그동안 의지했던 재물, 자녀, 가정, 명예 ···· 세상적인 것을 모두 부정해버리고, 깨끗이 부정해 버리고,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이제 영원한 생명을 중심으로 하는 소망. 거기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영원지향적 인격이 형성되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세월이 흐르게 되면 나이를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이든 모든 사람들을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늙은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미숙한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연륜이 더해지고 교회에서 보낸 세월이 많아지다 보면 영적으로 성숙해 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발견합니다.
영적 성숙과 영적 미숙의 차이를 만드는 근본적인 요소의 하나는 바로 가치관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한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과연 신앙적 가치관을 얼마나 내면화하고 사느냐,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성경적 가치관을 붙들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나를 반겨주시는 주님을 보았기에 디모데후서 4장 7, 8절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종말론적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소망은 저 하늘나라에 두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태양이 빛나는 낮에도 별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캄캄한 밤이 되어야 비로소 영롱한 별빛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어두움 속에서 별빛을 보듯이 고난 중에 소망을 가집니다.
그리고 새로운 신앙관을 고백합니다.
23:10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이것이 욥의 소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고난의 문제는 결코 고난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소망의 문제입니다. 사단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게 하고,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더 밝은 소망의 세계로, 더 높은 소망의 세계로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난자 욥이 가졌던 것과 같은 소망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 정금같이 업그레이드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더 높은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망의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