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선고문, 이 사람은 인간이기를 이미 포기하였기에 사형에 처한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몸이 건강하다고 인간입니까? 재물 좀 많이 가졌다고 인간입니까? 공부 좀 해서 지식이 많다고 해서 인간입니까?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인간다운 인간이어야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몸, 그것만 가지고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를 지배하는 이성이 건강하고 그 이성과 감성을 주도하는 영혼이 건강하게 살아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노아 홍수 이전의 인간을 ‘사람이 육체가 되니라’라고 표현을 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는데 하나님의 형상은 다 없어지고 육체와 육체의 욕망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대로 움직이는 것, 동물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께서 산 자를 죽인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쓸어버리신 것입니다.
시편 49편 20절을 보면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합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기능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짐승과 같다 라고 말합니다. 이성이 인간의 본능을 지배하고 영이 이성을 주도할 때 이것이 정상적 인간입니다.
예배는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느냐를 점검하는 시간.
그래서 예배는 드리다가 찔림이 있는 예배가 좋은 예배.
그런데 영적으로 죽은 자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 인생입니다.
전도는 영적으로 죽은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남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기독교 역사상 길이 남을 중요한 만남이 등장합니다.
고넬료라고 하는 로마군인, 점령군의 장교, 백부장과 피점령지의 초라한
어부인 베드로의 만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로 말한다면 고넬료와 베드로, 이건 얘기가 안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두 어색한 관계의 사람들이 서로 만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라는 공통적인 관심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다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고넬료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정치적 우월감, 교만감 다 버리고 피점령국가의 그 종교를, 그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성도의 교제를 할 때에 아무 것도 거치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성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데 인간적으로 가로 막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가로 막는 것들을 뛰어 넘어야 신앙이 자랍니다.
이 시간 신앙 생활하는데 걸림돌이 있으세요? 툭툭 털어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아주 깨끗한 마음으로 신앙 생활을 새로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두 사람이 다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고넬료도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요 베드로도 비록 여행 중에 있더라도 정해진 시간에는 지붕 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끼리는 영으로 통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끼리는 기도 속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깊이 기도하다 보면 기도하는 사람끼리는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이 두 사람이 천사의 지시를 받아서 만나게 됩니다.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가 기도하는 중에 음성을 듣게 되는데 그 내용은 사람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신앙 생활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미루거나 무시하면 성령은 소멸됩니다.
오늘 고넬료는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과 하인 둘을, 바로 지체하지 않고 욥바로 보냅니다. 마침 그때 베드로도 기도 시간이 되어 지붕에 올라가 기도 중에 환상을 봅니다.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고 부정한 짐승들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데 잡아먹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나는 결코 먹은 적이 없나이다. 그때 두 번째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세 번째 소리를 듣고 나서 이제 베드로가 하나님의 ‘묻지 말고 먹으라. 가라’ 하는 명령을 받아서 고넬료의 집에 갑니다. 하나님께 너무 많이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두 가지를 잘 하면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아느냐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얼마나 순종할 수 있느냐가 그 사람의 영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성경을 많이 알 뿐만 아니라 그 성경 말씀대로 순종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무슨 일인가를 판단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올바른 판단과 올바른 선택이 우리를 복된 길로 인도합니다. 잘못된 판단을 내리거나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그 잘못된 판단과 잘못된 선택이 우리를 어려운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second level.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내적인 갈등을 합니다.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가야 되는지 가지 말아야 하는지,
만나야 하는지 만나지 말아야 하는지 등등의 갈등이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우리는 어렵지만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힘든 상황이 벌어져도 그리고 손해가 되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왜? 하나님 때문에 손해 볼 때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의 뜻과 내 뜻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 갈등 속에서 내 뜻을 선택하면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면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영성은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신비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면 앞에서는 모자르는 것 같지만
결국은 남게 되고 내 뜻을 선택하면 앞에서는 남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모자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베드로는 유대인입니다.
이방인과, 그가 비록 로마 사람일지라도 서로 상종하지 않고 음식을 같이 한다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참 교만하지요.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그 주도하심 속에서 두 사람이 만납니다. 그 만나는 역사가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갈릴리 어부 촌사람인 베드로가 허름한 옷을 입고 들어설 때에
고넬료가 온 집안과 더불어 나가서 맞이합니다.
26절을 보면 맞이할 때에 얼마나 간절하게 엎드려서 절을 했던지 베드로가 너무 죄송해서 일으키면서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그럽니다.
그만큼 경건하게 맞이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얼굴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모셔오라고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를 맞이하고 33절을 보면
고넬료가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서 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육의 눈으로는 베드로를 보고 있지만 영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바로 그런 관계를 카리스마적 관계라고 합니다.
여기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도 여러분이 제 이야기를 듣고자 여기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지금 보기는 저를 쳐다보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여러분은 분명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설교가 이해가 되고 감동이 되고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서 취한 자세, 이것이야말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 내용은 43절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순간, 오늘 성경에 보니
‘이 말을 할 때에’ ‘한 다음’이 아닙니다. 하는 중입니다.
44절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실로 굉장한 말씀입니다. 성령이 바로 이 시간에 임했습니다.
말씀이 전해지고, 성령이 임하고, 그 순간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나니 말씀이 마음 속에 쏙 쏙 들어옵니다.
베드로가 이제 설교를 합니다. 별로 긴 설교 같지는 않습니다.
사실은 말도 잘 안 통하거든요. 베드로는 아람 말을 하고 고넬료는 라틴어를 합니다. 제가 중국에 가서 중국 사람들을 모아 놓고 통역을 놓고 강의를 해 본 적이 있는데 참 힘듭디다. 44절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다 알아듣게 됩니다. 통역없이 알아듣게 됩니다.
이래서 사도행전 10장을 ‘이방인의 오순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이방인에게 성령님이 찾아오신 날입니다.
설교를 잘한다 못한다가 아닙니다. 무슨 말을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으로 통합니다. 성령이 통역을 해 줍니다.
그래서 오늘 고넬료의 가정에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란 무슨 이치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오는 감격입니다. 내 마음에 오는 생명력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내 생명을 걸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알아듣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성경의 해석자는 성령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를 소중히 여깁니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이 기록되었고 성령의 조명이 있을 때에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며, 성령이 빛을 비추어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킬 때에 우리는 성경을 깨닫습니다. Logos가 Rema
어떤 분들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해서 성경을 읽을 때에 빨리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다마는 여러분, 성경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도 절대로 조급해서는 안됩니다.
내 생각이 미치지 못했고, 내 인격이, 내 지식이, 내 영적인 성장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 줄 아시고 겸손한 마음으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리 뜯어 맞추고 저리 뜯어 맞출 생각마시고 그대로 읽으십시오. 성경 원문을 그르치지 마십시오. 그렇게 읽어나가노라면 성령이 감동하는 중에 성경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Words of God wait for us in the Bible’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지금 내가 성경을 읽고 있지만 내가 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금 성경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모든 사건이 주의 뜻 안에 있고, 모든 역사가 주님의 섭리 속에 있고,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라는 바로 그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만 이 비상식적이고 불합리한
이겨 나갈 수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그 분만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다 아시고
저와 여러분의 삶을 인도해 나가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그 분의 능력에 부족한 나의 삶을 온전히 의지하여 풍랑이는
이 세상을 헤쳐 나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