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이 끝나고 10년쯤 지났을 때, 한 독일인 남자가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2차 대전 동안 유태인 한명을 저희 집 지하 골방에 숨겨주었습니다.”
“형제님,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 받을 일이지요”
“하지만 그 사람으로부터 숙박비를 계속 받아왔습니다.”
“음... 그것은 좋은 일은 아니지만, 죄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말씀하세요” “그 유대인에게 전쟁이 끝났다고 얘기를 해줘야 할까요, 말까요?”
웃지만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 앞에서는 속수무책.
부동산도 안정이 되어야 하지만
내 집 값 올라가면 미소, 떨어지면 무능한 정부.
경제 앞에서도 의연한 신앙을 가져야. 그런 분의 모델로 사도 바울.
오늘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되는 장면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유대인들의 고소로 로마 당국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된 바울이 상소하면서 황제가 있는 로마로 가게 된 것입니다.
약 이천 년 전에 276명이 탄 배 한 척이 지중해를 건너서 로마로 가고 있었는데 그 항해 중에 있었던 일이 오늘의 본문 내용입니다.
항해 중에 미항이라고 하는 작은 항구에 도착하게 됩니다.
추운 겨울 동안은 바람이 거세어서 여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한겨울을 나고 봄에 다시 항해를 시작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미항이라고 하는 항구에서 겨울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조금 더, 며칠 더 가서 저 앞에 있는 뵈닉스라고 하는 항구에 가서 겨울을 나자고들 합니다. 미항은 조그마한 항구이지마는 안전한 곳입니다. 그런데 작은 항구라서 클럽이 없고 위락시설이 없어서 조금 지루하게 지낼 수 밖에 없는 곳입니다. 반면에 뵈닉스라고 하는 곳은 큰 항구 도시이며
클럽도 있고 포차도 있는 향락의 도시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생각하며 뵈닉스로 가고 싶어합니다.
9절을 보면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금식하는 절기’는 유대인의 대속죄일을 가리키는데 10월 중순경에 해당합니다. 이때는 강풍이 일어나기 쉬운 때입니다.
그래서 미항을 떠나 뵈닉스까지 가려는 것은 모험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선택을 보면, 생명의 안전이 우선인데 그런데 좀 위험하기는 하지만 모험을 해서라도 좀 큰 항구 도시인 ‘뵈닉스까지 가자’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19가 잠잠하다가 다시 기승을 부립니다.
클럽, 물류센터, 개척교회 부흥회, 탁구장
여러분의 담임목사의 취미는 탁구, 2월 1일 close.
코로나 19의 가장 좋은 예방, 마스크와 손씻기.
4곳의 공통점은 방역 수칙을 잘 지키지 않았다.
신앙 생활의 기본, 내 생각하고는 다르더라도 말씀대로 살자 아니겠습니까?
우리들도 방역 수칙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자 여러 사람들이 뵈닉스로 가자고 하는데 그 배의 리더인 백부장도 뵈닉스로 가자고 합니다.
11절.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이래서 배는 미항을 떠나 뵈닉스로 갑니다. 처음에는 순풍이 붑니다.
그러나 가다가 유라굴로라는 폭풍우를 만납니다.
그 풍랑 속에서 저들은 많은 노력을 해보았지마는 속수무책입니다.
15절 “가는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입니다.
인간의 노력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또 18절에 보면 “짐을 바다에 풀어버리고”라 합니다. 사람이 살아야겠으니까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그 소중한 짐들을 다 바다에 던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20절을 보면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합니다.
이제는 끝났습니다.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한 번 잘못된 선택으로 해서, 잘못된 출발로 인해서 그들의 운명은 이렇게 경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죽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파선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왔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22절 “이제는 안심하라”
인간의 모든 노력이 끝난 바로 이 시간에 바울은 그 풍랑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있는 선원들과 276명의 승객을 앞에 놓고 안심하라 합니다.
‘이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교만을 다 버렸습니다. 인간의 지혜, 인간의 경험, 그 의지하던 것 모두 끝났습니다. 다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동안에 생각도 많고 복잡했습니다. 의견도 많았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 보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보입니다. 들으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들리지 소리가 났다고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에게 무엇이 들립니까? 고집으로 꽉 차 있는데 무슨 말씀이 들립니까? 자기 욕심으로 꽉 차 있는데 들릴 여지가 있겠습니까?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했을 때에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그게 안타까워서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알려드리는 것뿐.
사기당하는 사람들, 자기 욕심 때문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 고집이 지나치면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건전한 판단력도 상실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