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인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가 지능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IQ 즉 지능지수가 따라가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둘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능과 지식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두뇌를 가졌다 해도 그 두뇌에다 많은 지식을 입력시켜야 써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지 않은 머리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애가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해. 180이니 190이니 하면서 아무리 아이큐가 높다고 떠들어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멍청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attitude.
그렇습니다. 자세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공부할 때에는 공부하는 자세가 좋아야 되고, 일을 할 때에는 일하는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성실하게 임하는 바른 자세가 기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 가지 요인 가운데서 성공적인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자세, 즉 attitude라고들 합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지식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삶의 자세가 잘못되어 있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희 학교 학장을 지내신 김정준 박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미국, 영국, 독일 유학,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은 분위기가 나빠서 그만두고, 오늘은 날씨가 어떠하니 그만두고, 또 오늘은 나쁜 소식을 들었다고 그만두면 언제 공부합니까? 중요한 것은 좀 공부가 안되는 날이라도 책상머리에 진득하니 앉아 있으라는 말입니다. 기분대로 벌떡 벌떡 일어나서는 공부가 되지 않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분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견뎌내려는 바른 자세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세에 있어서 두 가지 자세가 중요합니다.
‘unhesitating affirmation’ 주저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자세와
‘joyful assent’ 기쁜 마음으로 찬성하는 태도.
긍정적으로 인정하되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인의 불행은 자신의 결정에 자신이 없어 합니다.
여기 결정하고는 저쪽이 좀 더 낫지 않을까? 두 마음을 품는다는 말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전심전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주저주저한다는 말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 하려면 화끈하게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또 ‘joyful assent’ 기쁜 마음으로 찬성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떠한 모임에서 하나의 안건을 표결에 붙였다고 합시다. 4대6으로 결정이 되었든지, 9대1로 결정이 되었든지 결정이 나면, 설사 내가 반대의 입장을 표명했더라도 군말 없이 따라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반대 입장에 섰던 사람은 결정이 난 다음에도 끝까지 반대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거봐라, 그래서 내가 반대를 하지 않았더냐’하고 비아냥거립니다. 이거 아주 나쁜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여러분도 아다시피 문제가 아주 많은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에 대해서도 사도의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바울의 사도권에 정면 도전하기도 했던 교회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방문 계획을 변경한 것으로 인해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말과 행실이 일치하지 않는 불성실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일을 놓고 18절에서 하나님은 미쁘시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예’라고 하였다가 ‘아니오’라고 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그 하나님의 종인 자신도 예, 아니오를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미쁘시니라,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나도 신실하다.
여러분 신실함은 단순함과 통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실한 분들을 뵈면 단순하고 마음이 깨끗합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한 맹인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예수께서 이 맹인을 고치실 때에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진흙을 바른 지점에서부터 실로암 못까지는 십리길입니다. 보통 사람도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이므로 소경은 훨씬 더 걸렸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사람은 끝까지 믿고 가서 자기 손으로 실로암 물을 퍼올려서 눈을 닦습니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소경이 보게 된 것입니다. 그 맹인의 마음은 단순한 마음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예수님을 모함해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할 때에 그는 말합니다.
25절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여기에 깨끗한 신앙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너무 많이 알아서 걱정입니다.
별로 필요치 않은 것을 잔뜩 알아가지고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픕니다.
단순한 마음 거기에 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격은 경험에 기초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험에 기초한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아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지만 헬라어에서도 그대로 쓰입니다. 성경을 보면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이 몇 번 등장을 합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로 옮기면 ‘아멘 아멘 레고 소이’가 됩니다.
아멘,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자세요, 진실한 응답이 아멘입니다.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을 두지 맙시다.
홍해를 건넜다고 하면 건넌 줄로 알아야 합니다.
장님이 눈을 떴다고 하거든 뜬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하면 그대로 믿을 것입니다. 거기에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신앙은 급격히 나빠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이든지 주시는대로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때로 병들기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이 특별한 사랑을 발견하고 받아 들이는 것이 참된 믿음이고 아멘의 신앙입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고 하는 참된 신앙적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로마교황청을 상대로 포고문을 냈습니다.
그는 그 일로 재판을 받고 바르트부르그(Wartburg)성으로 피신을 합니다.
그런데 그때 그가 기거하던 방의 벽에는 지금도 그때의 잉크자국이 남아있는데 그 잉크 자국은 사단이 유혹을 할 때 물리치려고 한 것이랍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 교황과 타협하면 쉽게 살 수 있는 것은 물론 좋은 자리를 얻어 일생을 편히 지낼 수도 있었습니다. 유별나게 살다 보니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자꾸만 유혹의 손길이 다가옵니다.
나만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있는가, 알아 주는 사람도 없는데. 유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에서 움트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잉크병을 던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예하기 위해서 사단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친 것입니다. 강한 거절이 있고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한계시록 3장 14절을 보면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예수님의 일생은 아멘으로 시작하여 아멘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멘으로 이 낮고 낮은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고, 그 모진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아멘으로 그대로 받아 들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아멘’입니다.
아멘은 다른 말로 하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랭이질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옛날 한옥을 지을 때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원래 주춧돌은 자연석 그대로 씁니다. 다듬지 않아서 윗면이 울퉁불퉁합니다. 집을 짓는 사람들은 주춧돌을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주춧돌의 울퉁불퉁한 면에 맞춰 기둥의 밑동을 파냅니다.
목수 중에서도 최고의 기술을 가진 도편수가 퉁불퉁한 주춧돌에 잘 맞도록 기둥의 밑동을 파내는 것을 그랭이질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로 그랭이질을 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집을 짓기 위해 주춧돌을 평평하게 고르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 삶의 중심으로 선택한 예수님을 중심으로 우리의 삶을 고르고 맞추는 것이 아멘의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이 시간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아멘, 아멘 이렇게 순종해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 일에 복을 주시고 그 일을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아멘의 신앙, 주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약하면 약한대로 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아멘으로 순종함으로써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강과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축복을 받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