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신천지와 사랑제일교회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교회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신천지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랑제일교회도 정말 막가파라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부 교계에서는 종교 탄압 운운하지만 지금 개신교는 할 말이 없어야 합니다. 만민중앙교회, 여기도 이단.
여러분의 담임목사의 예배에 대한 생각.
저는 예배에 대하여 온라인으로 드리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 못합니다. 앞으로 형편이 나아지면 꼭 대면해서 예배를 드릴 겁니다.
저의 이 목회관에 따라 꼭 자기 성경을 가지고 예배에 참석해 주시기를 바라고 헌금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교회에서 헌금 봉투로 직접하는 걸 권합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는 공지하는 교회 계좌 번호로 헌금.
국민은행 새하늘교회 464801-01-180506
사실 감염에 대하여 조심하여야 할 곳은 대형교회들입니다.
누가 출입하는지도 모르고 사회적 거리두기도 전혀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반면에 저희 교회같이 작은 교회들은 서로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신천지가 잠입할 수도 없고 예배 시간에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회적거리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지난 주까지 주일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지난 주 ‘예배 및 집회시 7대 감염예방수칙’
1. 체온계 측정, 파출소에서 대여, 최윤실 선생님 집.
2. 식사 제공 금지
그렇지만 지난 주 정부에서 4월 5일까지만 한시적으로 예배를 중단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는 교인들과 의논해서 4월 5일까지는 정부의 방침에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 개척 후 처음으로 예배를 교회에서 드리지 않고 방송으로 드리는 날입니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우리 교회가 시작한지 16년이 되는 기념 주일입니다.
다음 주 4월 5일은 종려주일, 4월 12일은 부활주일입니다.
이번 16주년 개척기념주일을 맞으면서, 기도모임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그동안 걸어왔던 발자취들을 가만히 되돌아보았습니다.
2004. 3월 28일. 상암동에서 전도사 시절 첫 예배, 개척
2006. 5월 25일. 목사 안수.
2008 교회가 도로로 편입되는 바람에 로고스 빌딩으로 옮김.
건물주가 자기가 쓰겠다고 해서 2011년에 청담동으로 옮기게 되었고,
2016년 11월에 이 자리로 옮겨서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볼수록 발자국마다 하나님의 은총이었음을 깊이 깨닫게 되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또 이 작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기로 마음먹고,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 교회 형제, 자매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처음에는 저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했는데 깊이 묵상하다 보니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도 주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10절에 나오는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이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13번째 왕 여로보암 2세를 가리킵니다.
여로보암 2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던 왕입니다.
그런데 외적인 부흥이 왔을 때 잘해야 하는데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들도 종교적, 도덕적으로 타락하였습니다.
그들은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위해서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도, 수평적인 인간들과의 관계도 모두 파괴해 버리는 불의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에 아모스 선지자는 5:24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에게 다섯 가지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아모스가 본 다섯 가지 환상에 대한 기록 가운데 있는 삽입 단락으로서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하나님의 선지자 아모스를 핍박한 사실과, 아모스가 그러한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의연한 태도를 견지하고 오히려 더욱 담대하게 아마샤와 그의 가족에 대하여 예언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모스와 아마샤는 같은 시대의 사람이고 활동한 장소도 벧엘로 동일합니다. 당시 벧엘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후 여로보암 1세에 의해 명실상부한 북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마샤는 벧엘의 제사장, 아모스는 예언자, 둘 다 종교지도자였습니다. 이름도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무늬는 거의 같았습니다.
그러나 속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양심도 다르고 메시지도 달랐습니다. 그래서 이 둘에 대한 평가가 정반대입니다.
아먀샤는 옳지 못한 종교지도자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고,
아모스는 참 종교지도자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옳지 못한 종교지도자들, 즉 아마샤 타입의 종교지도자들은 그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마샤 타입의 종교지도자들은 성경 여러 곳에 나오고, 교회 역사에도 많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종교지도자들을 아마샤 타입의 종교지도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본문을 살피면 몇 가지 해답을 얻게 됩니다.
첫 번째로 아마샤 타입의 종교 지도자들은 시대의 표면만 보는 사람들입니다. 아까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여로보암 2세 때 이스라엘은 대단히 번성했습니다. 아마샤는 그 번영만 보았고, 그 번영의 밑바닥에 있는 것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을 보지 못했고, 도덕적인 타락도 보지 못했습니다. 종교가 위선과 형식에 빠진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모스는 그런 번영은 이제 곧 끝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보았지만 아마샤는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이와 같은 모습의 종교지도자들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 때 남북왕국이 연합해서 아람을 치려고 했습니다.
왕은 선지자 사백 명을 모아 이 싸움을 할까 말까 물었습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올라가서 싸우라고 했습니다.
오직 한 사람, 미가야만이 이 선지자들은 거짓 영을 받아 이런 말을 한다고 바른 말을 하다가 옥에 갇힙니다.
미가야는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왕은 사백 명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에 따라 출전했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이 사백 명의 선지자들도 아마샤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의 귀에 단 말만 해서는 올바른 목회자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가르쳐야.
아모스보다 150년 쯤 뒤에 예언활동을 한 예레미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치다가 심한 고난을 겪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별명이 ‘고난의 예언자, 눈물의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를 괴롭히는데 앞장선 사람들이 바스홀, 하나냐 같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 또한 아마샤와 같은 거짓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는데 앞장섰던 사두개인, 바리새인들,
서기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아마샤 타입의 종교지도자들은 교회의 역사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중세에 교회는 세상 권력 위에 있었습니다.
이 때 교회는 심하게 타락하고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갔습니다.
그러자 위클리프, 후스 같은 선구자들이 일어나서 바른 진리를 전하다 후스는 화형을 당했습니다. 위클리프는 세상을 떠날 때는 안전했지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그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유골은 불태워 져서 가루가 되어서 강에 뿌려졌습니다. 이런 일을 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도 아마샤의 전통을 이어 받은 사람들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루터를 조롱하고, 파문한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샤 타입의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나라 교회의 역사에서도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일제 때 우리나라의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변절을 하고 앞장서서 일본에 협력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양심적인 목사들(주기철 목사)을 파문하고 교회에서 축출했습니다.
아마샤 타입의 종교지도자들은 오늘날에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아마샤 타입의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아니고
세상 중심인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마샤가 한 말들을 살펴보면 여호와란 말을 써야 할 곳에 왕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벧엘을 “왕의 성소”라고 했습니다.
성소는 거룩한 곳이라는 뜻이고, 하나님이 계신 곳이 성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소라고 해야 하는데 왕의 성소라고 합니다.
아마샤는 제사장인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당시에는 제사장, 선지자, 왕의 역할이 분명히 구분되어 있어서,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을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마샤는 자기가 왕을 위해 제사 드리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본분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본분을 지키고 계십니까?
크리스찬의 본분이 무엇입니까? 세상 문제를 하나님의 영으로 푸는 사람들이 크리스찬입니다. 고로 교회에 와서는 영적인 것을 얻어가셔야 합니다.
세상적인 것으로 와서 기도하다가 해답은 영적인 것으로 얻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리스찬의 본분이고 교회의 본질입니다.
세 번째로 아마샤 타입의 종교지도자들은 성직을 생계의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고향 땅에 가서 예언하는 것으로 밥벌이를 해라고 하였습니다.
아모스는 여기에 대해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던 사람이었는데
본문 15절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 잡혀서”라는 뜻입니다.
아모스는 하나님께 잡힌 예언자였습니다. 사명에 잡힌 예언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자기, 목자이면서 뽕나무를 재배하던 평범한 소시민인
자기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에 감사하면서 따른 사람이었습니다.
목사도 하나의 직업입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한 직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목회를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겠지만 (목사는 직업인으로서의 정년이 있습니다) 크리스찬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죽을 때까지 해야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 앞에 선 이 설교자가 아모스로 출발했다가 아마샤로 변하는 일이 없도록 기도로 지켜주셔야 합니다.
신학교 입학할 때는 누구나 아모스입니다.
목사 안수 받을 때 다시 한 번 아모스가 됩니다.
그런데 목회를 오래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교인 수에, 부흥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메시지가 변질됩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1장 18절에서 “겉치례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
이 말씀은 설교에서 특히 적용되어야할 원칙입니다.
설교는 이것저것, 많은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십자가가 선명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실컷 웃기고, 흥미 있는 세상 이야기 하다가 끝나고 마는 것은 바른 설교가 아닙니다.
재미있어도 예수님이 없는 설교는 가짜이고,
재미없어도 예수님이 있는 설교가 진짜입니다.
예수님이 있다는 것은 꼭 예수님이라는 말이 나와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아도 예수님의 향기, 예수님의 가르침이 진하게 배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향기가 배어 나와야 하는 것은 설교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서도 예수의 향기가 배어 나와야 합니다. 왜?
진정한 예배의 완성은 예배가 끝나고 예배당 문을 나서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들 모두가 예수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있는 하나님의 대사이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이 영적으로 메마른 땅을 복음화시키기 위해서 보내신 하나님의 대사입니다.
오늘은 새하늘교회가 이 땅에 세워진지 16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뜻 깊은 날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이 귀한
하나님의 대사직을 아모스의 정신을 이어 받아
가짜들이 판치는 이 세상 속에서 묵묵히 신실하게 수행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국민은행 새하늘교회 464801-01-18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