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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이 아니니라! (예레미야 29: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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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성경 말씀은 요즈음 우리의 상황에 정말 잘 맞아 떨어지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읽을테니 여러분들은 눈으로 따라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는 태풍이 오지 않으면 물이 부족하여 곤란한 나라입니다. 

태풍은 강한 바람과 쏟아지는 비로 인하여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태풍이 우리들에게 미치는 유익도 적지 않습니다.

첫째는 지구의 온도를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게 균형을 맞추어주고,  

둘째로 물이 부족한 지역에 많은 비를 내려 생명이 자라나게 하며, 

셋째로 강한 바람을 일으켜 해수면을 뒤집어 적조를 없애고 플랑크톤을 

끌어올려 생태계를 활성화한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의 삶의 현장 속에 지금 코로나 19라는 태풍이 붑니다. 

그런데 신앙인의 눈으로 보면 그 바람은 파괴의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김입니다. 땅을 바라보던 우리들이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보게 하고, 굳어져 있던 우리의 마음을 뒤집어 불신과 염려, 두려움의 적조를 없애주시고, 

달리다굼의 역사로 우리의 믿음을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선하신 섭리로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시들어야 할 것은 시들 것이요, 살아날 것은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께서 그 징계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십니다. 그 화려하고 거룩했던 예루살렘 성은 다 무너지고 쓸 만한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잡혀 갔습니다. 

포로 되어가서 낙담하고, 절망하고...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를 용서하시려나? 언제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까? 이 민족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때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준 메시지가 오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황당합니다. 놀랍습니다.

 

5-6절을 보면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초조해하지도 말고 불안해 하지도 마라, 여기서 결혼하고 여기서 생업에 종사하고 자식을 낳으면서 아주 살아라 하십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더 놀라운 말씀이 7절에 있습니다.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바벨론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벨론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사건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시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집착에 매이기 때문 아닌가요? 자기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기 시잡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인격 평가 기준이 세 가지 있는데, 재물, 술, 분노.

유대인들은 인격을 평가하는 바로미터로 돈과 나와의 관계에서 인격을 평가합니다. 그런데 돈을 어떻게 버느냐보다는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

그리고 그 두 번째가 술입니다. 술을 마시되 취하지 않도록 마시고 특별히 실수하지 말아야 합니다. 술 취하고 많은 실수를 하고 후회하고 뉘우치고, 그리고 또 마시고... 이런 사람 불쌍한 사람입니다. 

잠언 26: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마지막으로 분노 세상을 살다보면 화나는 일이 있습니다. 

불같이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이 끓어 오를 때 그걸 어떻게 다스리느냐, 어떻게 마인드 컨트롤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화났다하면 정신 뒤집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가리지 못합니다. 

너 죽고 나 살자 하는 정도가 아니라 너 죽고 나 죽고 둘 다 죽자 합니다.  여러분 아시는대로 중동에 많은 문제가 있는데 이유가 어쨌든지간에 그 

분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그냥 자살폭탄을. 분노에 노예가 된 탓입니다.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에 성경대로 행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무기를 잘 준비해라, 전쟁을 준비해라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수아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고린도후서를 보면 사도 바울의 은혜에 대한 인생관이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12:8-9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와 내가 생각하는 은혜, 이게 상반될 경우가 많습니다. 

자, 내 은혜가 무엇입니까? 내가 보통 생각하는 것은 병들었다가 나아야 

우리는 은혜라고 합니다. 실패했다가도 성공해야지 우리는 ‘아! 은혜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은혜는 나 자신을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에 도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은혜를 내 은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그것을 은혜로 생각하고 있느냐 그 말씀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바울이 그렇게 저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는 은혜라는 것도 잘 살고 오래 살고 건강하고 출세하고 하는 세상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당시 바울이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복음의 길을 열어 주십시오. 선교의 문을 열어주십시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체적으로 ‘선교하기 위해서 저에게 건강을 주십시오. 하나님, 다른 것은 없어도 건강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밑천인데’

명예도 구하지 않고, 지식도 구하지 않고, 부귀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필요하니, 최소한 건강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구했습니다. 그래서 세 번 간구했다 합니다. 

뭐 금식을 했는지, 철야를 했는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말씀합니다. 육체의 가시이것을 빼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였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세 번 간구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하나님 꼭 제거해 주십시오. 

그런데 들어주시지 않고 다만 말씀하십니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대로가, 네가 가진 불편한 몸, 그대로가 내 은혜다라고 하십니다.

 

현실이 불만스럽습니까? 하나님이 왜 나한테 이런 것을 허락하시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사람은 실수를 해도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민수기 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도 절대로 아닙니다. 잠시 잠깐 내 생각에 집착한 나머지 주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사건에 부딪힐 때면 조용하게 우리 인간의 생각, 자기 집착에서 떠나 그 높은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에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사건일지언정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경륜이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하나님의 커리큘럼이 있고, 깊은 곳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정치, 경제, 문화, 복잡한 문제, 마음에 안듭니까? 

이제 cool down합시다. 냉정함을 되찾읍시다. 이것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으로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현실보다 강한 것은 소망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그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소원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입니다.

형통할 때에는 소망이 세속적입니다. 소원 자체도 아주 이기적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러나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게 되면 소원이 승화가 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인생이 무엇인가?를 묻게 됩니다. 

그래서 고통의 날에 소망이 순수해 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종말론적 소원으로 소원이 정화됩니다. 병 걸리고 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아주 임종이 가까워보면 더 달라집니다. simple해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실이 마음에 안드십니까?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요 소망이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왔을 때 홍해가 가로막혔다고 아우성입니다. 그 때 주어진 유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가만히 서서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시편 46편)

 

때때로 우리 앞에 원치 않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변론을 벌이지 맙시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습니까? 

원망하지 맙시다. 하나님께는 뜻이 있으니까, 하나님께는 계획이 있으니까, 그에게는 지혜가 있으니까, 

우리는 조용히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잠깐 멈추고 이 현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현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지 조용히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재앙이 아니요 평안이라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세미한 음성을 듣고 이 힘들고 거친 시기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겨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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