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환경에 대처하는 스타일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 집니다.
첫째는 환경에 좌우되는 종속적 인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스타일의 사람들입니다.
환경에 따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기뻐하는 사람들 중에 섞이면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 속에 섞이면
슬퍼하고, 누구를 비난하는 사람들 속에 섞이면 같이 비난하는 그런
스타일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스타일의 사람들의 인격은 오로지 환경의 산물일 따름입니다.
둘째는 반항 체질의 인간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일단 반항부터 하고 봅니다. 남의 말을 다 들어 보지도 않고, 깊이 생각해 보는 법도 없이, 무조건 ‘노우’입니다. 반항이야말로 자기 존재를 확증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complex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셋째는 환경 초월적 인간입니다.
일이 잘된다고 교만하지 않고, 억울함을 당해도 나 억울하다고 떠들지 않으며, 야단스럽게 떠드는 자리에 가서도 고요함을 유지합니다.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진정한 자존감, ‘주체의식’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버릴 것은 버리고 자기 갈 길 묵묵히 갑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41절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에 나타난 바와 같이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그 능력에 놀라는
제자들의 반응으로 많이 알려진 말씀입니다.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에 놀랐읍니다마는 참으로 놀라야 할 것은 그 능력이 아니라 풍랑 속에서도 고요하게 주무시는 바로 그 모습을 보고 놀라야 합니다. 풍랑과는 아무 상관없이 초연하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샬롬, 평강 이것을 보고 본받아야 합니다.
기독교에서의 고요는 고요한 환경 속에서의 고요가 아니라,
소란한 환경 속에서 마음의 평강을 얻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참된 고요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리어 사는 사람들은 세상일에 그다지 놀라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상일에 깜짝깜짝 놀라는 사람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삶 속에서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35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순종해서 갔는데 풍랑을 만납니다. 40년의 대장정이 끝나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요단강이 가로막고,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
믿음으로 뚫고 갑니다. 풍랑을 통하여 우리들의 믿음은 자라갑니다.
며칠 전에 극동방송을 듣던 중 성도 한 분이 이런 간증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분의 친구 중에 사업을 하는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자금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친구의 딱한 사정을 들은 그 성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1억을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돈은 자기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서 적금을 들고 있던 너무나 소중한 돈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친구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고, 평소에 워낙 믿을만한 사람이었기에 기꺼이 돈을 빌려준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돈을 빌린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를 찾아갔더니, 십여 명의 채권자들이 모여서, 그 친구에게 따지고 야단이었습니다. 그 성도 분도 빌려간 돈에 대해 어떤 해결책이 있는 지 듣고 싶었지만, 그 채권자들 틈에 끼어서 친구를 몰아세울 수가 없어서 그냥 조용히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주일날 아침에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때가 9시 쯤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도저히 빚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미국으로 전 가족이 도피하게 되었다면서 너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날 낮 2시 비행기로 떠나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친구에게는 일부라도 갚고 떠나려고 하니, 10시 30분까지 인천 공항 출국장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2천 만 원이라도 갚겠다고 했습니다.
전화를 끊은 그 성도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자신의 노후를 위해 준비했던 적금과, 언니에게 빌린 돈을 다 잃어버릴 뻔 했는데, 2천 만 원이라도 받기 위해 인청공항으로 나가면 예배를 못드릴 것이고, 그렇지 않고 주일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가면, 이제 영영 그 돈을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자신의 소중한 돈 가운데 일부라도 돌려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예배를 선택해야 되지 않겠는가’
결국 그는 마음의 혼란을 정리하고, 예배를 드리기로 결단하고는 인천공항이 아닌, 교회로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예배를 드리기 전까지는 머릿속에서 ‘2천 만 원도 상당한 돈인데, 그 돈이라도 받는 게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막상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는, 그의 마음에 평안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주님의 위로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너 잘했다, 너 잘했다. 그녀의 믿음은 성장.
사회자가 하나님이 어떻게 갚아 주셨냐고 물어보았더니 믿음의 성장으로.
불의 전차라는 영화, 대학생인 해럴드 에이브라함과 선교사 출신 에릭 리델은 타고난 스프린터로서 제 8회 파리 올림픽 영국 대표로 선발된다.
유대인인 해럴드, 선교사 에릭 리델은 출전을 포기, 주일성수를 위하여.
생각해 볼 두 번째 문제는 예수께서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건너가라고 말씀한 것도 아니고 내가 건너가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우리가 건너가자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아주 중요한 속성이 나타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의 공동의 작업, 파트너쉽입니다.
신앙생활에 성공하는 사람은 자기의 인생에 나만 관심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인생에서 승리하는 것이 하나님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4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8:26을 보면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꾸짖고 계십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문제이지 환경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 문제도, 격동하는 사회 문제도 아니고 우리 자신의 믿음의 문제라고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믿는 확실한 믿음,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당하실 수난과 그 후의 부활을 예고합니다. 예수께서는 다음날 아침이면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긴장된 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32절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눈 앞에 십자가의 고통이 있습니다. 견디기 힘든 모욕적인 빌라도의 재판도 있습니다. 혼자 남겨지는 고독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평안했습니다. 왜입니까?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은 고요했습니다.
영어에서 보통 큰 것을 big 혹은 great 라고 하는데 아주 큰 것을 나타낼 때는 mega라는 말을 씁니다. 이 mega라고 하는 단어가 ‘메갈레’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주, 굉장히 크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을 원어 성경으로 보면 ‘메갈레’라는 말이 대구적으로 두 번 나옵니다. 37절의 ‘큰 광풍이 일어나며’에서 광풍의 크기를 말할 때에 쓰였습니다. 원문을 보면 ‘메갈레 아네무’라 했습니다.
광풍 중에서도 아주 메가톤급 광풍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람에게 명령하여 바다가 고요해진 장면에서 쓰였습니다. 39절의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에서 역시 메갈레가 쓰였습니다. ‘갈레네 메갈레’ 아주 큰 메가톤급의 고요함이라는 뜻입니다.
큰 광풍이 메가톤급이라면, 고요함 또한 메가톤급입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그리스도의 크신 능력이 고요함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바라보기에, 내 생각이나 내 지혜와는 다르지만 이 풍랑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큰 뜻이 이루어지리라고 믿기 때문에 평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일어나는 그 많은 사건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오직 하나, 헛된 믿음을 다 버리게, 그리고 참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 보았다면 내 잘못된 믿음 고쳐주시느라고 있는 일입니다.
못 믿을 것을 믿고 있고, 믿어서는 안될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른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나를 가르치기 위하여 내 인생의
풍랑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각자들 풍랑이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풍랑으로 인하여 괴로워 하십니까?
하지만 지금 여러분들이 겪는 이 풍랑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고요합니다.
그러나 불신앙의 사람들은 격동합니다. 벌벌 떱니다. 소란을 피웁니다.
이것이 가장 나약하고 불신앙적인 태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떠든다고 해결이 됩니까? 밑으로 내리달을 뿐입니다.
이 풍랑, 이 격랑 속에서 우리는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고,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 조용히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가지고 다가오는 풍랑을 고요함 가운데 맞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 평화, 이 고요함 속에 능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요한 중에 고요가 아니라
풍랑 속의 고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풍랑 속에서도 조용함을 찾아 쉬시던 주님의 그 위대한 능력을 찾아야 합니다.
고요함 속에 고요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에 고요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은 어디에나 고요함이 있습니다.
풍랑 속에도 그리스도가 계시면 고요하고, 고요한 바다에도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각종 태풍과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을 이기신 예수와 동행함으로 풍랑이는 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shalom, 평강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