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한자는 그래서 사람 ‘인’(人)자도 서로가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형상입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나에게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나에게 도움을 주는 그 사람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상호 도와주어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의 도움이나 세상의 그 어떤 도움도 불완전하고 제한적일 뿐입니다. 가장 확실한 도움은 하나님의 도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결코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우리들은 하나님을 제쳐놓고 엉뚱하게 세상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제쳐놓고 세상만 의지하다 실패한 인생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유다의 제12대 왕, 아하스의 이야기입니다.
북 이스라엘에 아합이 있다면 남유다에는 아하스가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사울, 다윗, 솔로몬의 통일왕국시대가 있고, 솔로몬 사후 솔로몬의 뒤를 이은 르호보암 때에 실정을 하는 바람에 BC 930년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그 후 북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남유다는 BC 586년에 바벨론에게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스라엘이란 단어는 두 가지로 사용됩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언급할 때도 있고, 반쪽인 북 이스라엘을 언급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한국이란 말을 남북한 전체를 언급할 때도 사용하고, 남쪽만 언급할 때도 사용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하스는 남유다 왕국의 제12대 왕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과 짝했기 때문에 자기 인생도 망치고 나라도 망치고 만 실패한 군주였습니다.
세상과 짝하면 세상이 제 편이 되어 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가서 보니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모두가 등을 돌려버립니다. 한 마디로 고립무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좋을 때 좋은 겁니다.
내가 좀 잘 될 때에는 사람들도 주위에 밀물처럼 모여듭니다.
반대로 내가 조금 어려워지면 마치 썰물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배신은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번 관계를 맺으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항상 함께 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한 마디로, 신실하신 분입니다.
흔한 표현으로 말하면, 의리가 있는 분입니다.
민수기 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하나님 한 번도 나를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인생이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시편 기자는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줄기차게 이것을 증명합니다. 대표적으로 신명기사관이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과 가까와지고 형통하고, 불순종하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인생이 힘들어지고. 오늘 말씀의 주제도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아하스 왕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나 있었는지 살펴보죠. 역대하 28:1-2 보시면
성경에서 선한 왕을 표현할 때는 다윗의 길로 행하였으며 라고 하고, 악한 왕을 표현할 때는 이스라엘의 길, 또는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고 합니다.
다윗의 길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신앙의 길이고, 여로보암의 길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숭배하는 불신앙의 길을 가리킵니다.
다윗의 길을 갔던 왕은 모두 형통했으나, 여로보암의 길을 갔던 왕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아하스는 물론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던 왕입니다.
아하스가 계속 하나님을 거역하자 참고 참으시던 하나님께서 결국 진노하십니다. 남 유다에 하나님의 징계가 임합니다. 고난의 연속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여러 모양으로 다가오는데 먼저 전쟁으로 닥쳤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싸고 있던 국제 정세는 마치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남북이 분단되어 있고, 주변의 열강들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과 북이 열강들과 동맹을 맺고,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먼저 아람, 북 이스라엘 연합군이 남 유다를 침공합니다. 그 내용이 역대하 28:5-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아하스의 우상숭배로 인해” 그런 뜻입니다.
북 이스라엘의왕 베가의 군대가 무려 12만 명을 살육하는 비극이 벌어졌고, 20만 명의 포로를 끌고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는 아하스에게 하나님께서 계속 징계를 내리십니다.
이번에는 에돔과 블레셋이 침공해 옵니다. 본문 17-19절을 보시죠.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말씀이 바로
“하나님께서 유다를 낮추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유다에 내린 모든 환란의 원인이 바로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아하스 때 남유다는 북이스라엘과 아람 사람들에 의해 징계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지만, 하나님의 긍휼로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오뎃을 통하여 다시 돌아오는 은혜도 입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징계와
긍휼을 경험한 후에도 아하스는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계속해서 에돔이 와서 공격하고, 이어 블레셋도 침노하여 아예 유다의 여러 마을에 진치고 살았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는 19절 아하스가 망령되이 행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하스가 우선해서 해야 할 일은 바로 망령된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햐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문제해결의 방법인 것입니다.
내게 허락하시는 환난과 문제는 하나님 앞으로 나오도록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초대의 손길입니다. 커다란 문제를 만났을 때 누구 때문인지 묻기보다
나를 먼저 돌아보고, 이런 문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내게 닥친 곤경과 위기는 오히려 은혜의 기회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계속 하나님에게서 엇나갑니다. 16절 보세요! “그 때에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와주기를 구하였으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엎드려야 하는데, 반대로 외세의 도움을 구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멀리멀리 떠나갑니다.
당시 강국인 앗수르에게 원병을 요청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나요? 20절-2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앗수르 왕에게 와서 도와달라고 했더니 와서는 오히려 공격합니다.
심지어 앗수르 왕에게 아하스가 뇌물을 바쳤는데 유익이 없었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아하스의 태도를 보세요. 22절입니다.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고난 가운데 더욱 범죄합니다. 심지어 아람의 신 다메섹 신에게 제사합니다. 각 성읍에 우상을 세우고 다른 신들에게 제사드립니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촉발했습니다.
25절(하).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더라”
아하스만 이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렇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살다가 하나님 앞에 잘못 할 수 있습니다.
연약해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히 돌아와야 합니다.
요엘 2장 12, 13절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해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영원히 기다려주시지는 않으십니다. 물리학에서 탄성한계라는 게 있습니다. 금속에 힘을 주면 늘어납니다. 힘을 빼면 다시 복원됩니다. 그런데 힘을 너무 많이 주면 복원되지 않습니다. 복원될 수 있는 범위를 가리켜 탄성 한계라고 부릅니다.
용수철을 예로 생각하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용수철을 힘을 주어 당기면 늘어나죠. 다시 놓으면 복원됩니다. 그런데 탄성 한계를 벗어날 만큼 힘을 너무 세게 주면 늘어난 것이 복원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실수 할 수 있고 잘못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 앞에 나아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고 게다가 축복까지 더 해 주십니다.
그런데 계속 고집을 부리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죄가 고질화되면 죄 가운데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가룟 유다는 인간적으로 자기의 모든 죄를 책임지려고 했으나
베드로는 자기의 모든 죄를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 앞에서 그 문제를 해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긴 뒤에 뉘우치고 후회했으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뒤에 회개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지난 날의 잘못된 것을 후회했습니다. 후회하고 스스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제 힘으로 해결해 보겠다고 애쓰다가 절망하고 자살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엄청난 실수를 범했습니다마는 회개하고 그 문제를 예수님께로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회개와 후회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후회는 비극적, 절망으로 끝나지만 회개는 구원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하스는 인생을 치욕적으로 마감했습니다. 대하 28:27
“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이스라엘 왕들의 묘실에 들이지 아니하고 예루살렘 성에 장사하였더라 ... ”
얼마나 백성들의 원성이 컸던지 죽어서 왕의 묘역에 들어가지 못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어떻게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아하스처럼 하나님을 멀리한 채
인간적으로 기를 쓰고, 세상만 의지하다가 실패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 하다가 마침내 다윗처럼 승리하시겠습니까?
때때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을 의지해야 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렵고 정치가 뒤숭숭할 때는, 동물국회.
세상이 더욱 두려워지고 세상 염려가 밀려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께 집중해야 됩니다.
그게 진정 승리의 길입니다. ”
흔들리는 이 세상 속에서 변치않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헌신하며 살아감으로 풍성한 승리의 축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