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6장을 보면 노아 홍수 이전의 인간을 ‘사람이 육신이 되니라’고 표현을 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은 다 없어지고 육체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대로 움직이는 것, 동물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영이 이성을 주도하고 이성이 인간의 본능을 지배할 때 이것이 정상적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슴으로 담은 말씀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스승이기도 하여야 하지만 더 나아가 영적 아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죽은 자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 인생입니다.
전도는 영적으로 죽은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기독교 역사상 길이 남을 중요한 만남이 등장합니다.
두 어색한 관계가 서로 만납니다.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 코넬리우스, 로마군인입니다.
다시 말하면 점령군의 장교, 백부장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으로서 유대 땅에 와서 식민지 관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로마군의 장교로서 그는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고 로마에서 섬기던 우상이 있고, 문화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 로마가 세상에서 최고다 라고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한 긍지에 살아가는 이 로마 장교가 종교에 관한 한은 피정복지인 예루살렘 종교가 옳다고 믿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바른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서 자기네 속국의 종교인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고넬료라고 하는 백부장과 피점령지의 초라한 어부인 베드로가 만납니다. 사회적 지위로 말한다면 고넬료와 베드로, 이건 얘기가 안됩니다.
만날 이유도 없고 어쩌면 한평생 안 만났으면 좋겠다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두 어색한 관계의 사람들이 서로 만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라는 공통적인 관심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두 가지를 잘 하면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아느냐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얼마나 순종할 수 있느냐가 그 사람의 영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운전을 잘하는 사람은 자동차에 대해서 잘 알고 교통법규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면허증 딴 지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운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운전 못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성경을 많이 알 뿐만 아니라 그 성경 말씀대로 순종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가 기도하는 중에 음성을 듣게 되는데 그 내용은 주의 천사가 사람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신앙 생활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환상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무시하면 성령은 소멸됩니다.
오늘 고넬료는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을 불러 하인 둘과 함께, 지체하지 않고 욥바로 보냅니다. 마침 그때 베드로도 기도 시간이 되어 지붕에 올라가 기도 중에 환상을 봅니다.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고 부정한 짐승들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데 잡아먹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나는 결코 먹은 적이 없나이다. 그때 두 번째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세 번째 소리를 듣고 나서 의아해 하고 있는데 19절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 사람들을 보내었느니라”는 명령을 받아서 고넬료의 집에 갑니다.
하나님께 너무 많이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내적인 갈등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가야 되는지 가지 말아야 하는지,
만나야 하는지 만나지 말아야 하는지 등등의 갈등이 끊임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힘든 상황이 벌어져도 그리고 물질적으로 손해가 되어도, 심지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왜? 억울하고 손해볼 때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베드로는 유대인입니다. 이방인과, 그가 비록 로마 사람일지라도 서로 음식을 같이 한다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그 주도하심 속에서 두 사람이 만납니다. 그 만나는 역사가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고넬료는 로마의 백부장, 즉 고급 군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 촌사람이 허름한 옷을 입고 들어 왔겠지요.
들어설 때에 고넬료가 온 집안과 더불어 나가서 맞이합니다.
26절을 보면 맞이할 때에 얼마나 간절하게 엎드려서 절을 했던지 베드로가 너무 죄송해서 일으키면서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그럽니다.
그만큼 경건하게 맞이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얼굴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모셔오라고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를 맞이하고 33절을 보면
고넬료가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서 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육의 눈으로는 베드로를 보고 있지만 영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바로 그런 관계를 카리스마적 관계라고 합니다.
여기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도 여러분이 제 이야기를 듣고자 여기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지금 보기는 저를 쳐다보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여러분은 분명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설교가 이해가 되고 감동이 되고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서 취한 자세, 이것이야말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 내용은 43절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케리그마적 복음을 전하는 순간, 오늘 성경에 보니 44절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이 말을 할 때에’ ‘한 다음’이 아닙니다. 하는 중입니다.
실로 굉장한 말씀입니다. 성령이 바로 이 시간에 임했습니다.
말씀이 전해지고, 성령이 임하고, 그 순간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베드로가 이제 설교를 합니다. 별로 긴 설교 같지는 않습니다. 사실은 말도 잘 안 통하거든요. 베드로는 아람 말을 하고 고넬료는 라틴어를 합니다.
그런데 다 알아듣게 됩니다. 통역없이 알아듣게 됩니다.
이래서 사도행전 10장을 ‘이방인의 오순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한 날을 기념하여 유대인의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행전 10장은 이방인의 오순절입니다. 처음으로 이방인에게 성령님이 찾아오신 날입니다.
설교를 잘한다 못한다가 아닙니다. 무슨 말을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으로 통합니다. 성령이 통역을 해 줍니다.
그래서 오늘 고넬료의 가정에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설교란 무슨 이치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오는 감격입니다. 내 마음에 오는 생명력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내 생명을 걸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기본 정신은 Sola Scriptura.
오직 성경만이 권위의 기초요 중심입니다. 이것이 개신교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소중히 여깁니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이 기록되었고 성령의 조명이 있을 때에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며, 성령이 빛을 비추어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킬 때에 우리는 성경을 깨닫습니다. Logos가 Rema
어떤 분들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해서 성경을 읽을 때에 빨리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다마는 여러분, 성경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도 절대로 조급해서는 안됩니다.
내 생각이 미치지 못했고, 내 인격이, 내 지식이, 내 영적인 성장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 줄 아시고 겸손한 마음으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리 뜯어 맞추고 저리 뜯어 맞출 생각마시고 그대로 읽으십시오. 성경 원문을 그르치지 마십시오. 그렇게 읽어나가노라면 성령이 감동하는 중에 성경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성경을 읽고 있지만 내가 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금 성경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모든 사건이 주의 뜻 안에 있고, 모든 역사가 주님의 섭리 속에 있고,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라는 바로 그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고백으로 비상식적이고 풍랑이는 이 세상을 헤쳐 나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Date: 2016/04/10 11: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