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엘상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치고 하나도 남김없이 진멸하라’ 하십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다음에 사무엘 선지자가 전쟁터에 와 보니, 이제는 다 진멸했으니 고요하여야 할 그 곳에 소 울음 소리가 들리고 양들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이것은 웬 소리냐 하였더니 사울이 궁색한 대답을 합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이에 사무엘이 무섭게 책망을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부음보다 나으니”
천천만만의 기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낫다,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했느냐 함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결과론을 내세웁니다. 좀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좀 잘못된 일은 있었다 하더라도 결과는 좋지 않았느냐,
방법은 잘못됐더라도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정의를 무시하는 사랑, 공의를 무시하는 자비, 정의를 떠나서 번영을 이루겠다는 생각,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는 지금 평범하게 느껴지고 있고, 상식화하고 있습니다. 관례상 나라의 법을 어기는 것들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죄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회개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깊이 뿌리 박힌 죄입니다.
지금은 누구 누구의 잘못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모두가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역사를 돌아보아도 지도자가 잘 나서 잘 살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지난 60여년 동안 정신없이 달려 왔습니다.
이제는 잠깐 멈추어 서서 재정비가 필요한 때입니다. 총체적 부정,
이번 기회에 제대로 고칠 것 다 고치고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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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상황에 따라 거짓말하고 정당화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불가피하다고 하는 상황, 이런 것을 들어서 자기 행위가 엄연히 불의인 줄 알면서도 이를 정당화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 자신은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자식들한테는 ‘너희들 고생 안 시키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쓸데없는 소리올시다. 이 무슨 망발입니까?
잘못을 정당화하는 사고 방식은 무서운 이데올로기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고 우리가 할 일은 방법을 정당하게 지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힘과 성공이 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의와 공의가 곧 힘이라고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이룬 성공은 절대로 축복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공의와 정의의 절대성을 말씀합니다. 이유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이 먼저 지켜져야 되는 것입니다.
번영과 성공 그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정의가 이루어진 후에 그 뒤에 번영과 축복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번 8인의 헌법재판관 중 하나인 안창호 재판관의 성경 인용을 보고 정한 것입니다. 아모스뿐만 아니라 이사야도 인용한 것을 보면
성경에 매우 해박한 분 같아요.
안 재판관은 아모스 5장 24절이 “불법과 불의를 버리고, 바르고 정의로운 것을 실천하라는 말씀”이라며 “탄핵심판은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문제로 정치적 폐습을 청산하기 위해 파면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투명하고 공정한 권력행사로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적 신뢰와 국민안전을 제고하여 사회통합과 국가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사야 32:16-17 “그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선지자 아모스가 활동하던 때는 남유다 왕 웃시야와 북이스라엘 왕 여러보암 2세가 통치하던 때로서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 왕국 이후 정치적, 경제적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도덕적 타락과 종교적 부패가 만연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아모스가 하나님의 공의의 회복을 외쳤던 것입니다.
즉 총체적인 부패 상황이 지속되는 한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해도 멸망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회복함으로써만 멸망 가운데서 구원받을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선포한 것입니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정의를 물같이’ 물이라는 것은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의를 물같이’ 모든 사람들이 정의를 물과 같이 근본적인 것으로, 생명의 원천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은 위에서부터 밑으로 흐릅니다. 정의 또한 위에서부터 물 흐르듯이 흐르게 마련입니다. 위에서부터 정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위에서부터 썩었습니다. 그러니 밑으로 내려가면서도 썩을 수 밖에.
그리고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공의를 홍수같이가 아니라 마르지 않는 강같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분들은 홍수같이 하려고 합니다. 싹 쓸어버리고 치워버린다는 식입니다. 그러면 홍수 난 들판처럼 다 없어지고 맙니다.
공의는 강같이 위에서 조용히 흘러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공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공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남에게 강요할 문제가 아닙니다. 나 먼저 조용히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의의 원리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각자 맡은 자리에서 정직하게,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
안이숙 사모님의 찬송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믿는 우리들은 일을 축복으로 여겨야 합니다.
크리스찬들이 해서는 안되는 말.
입에 풀칠하기 위해 일한다고 합니다. 죽지 못해 억지로 한다고 대답합니다.
일이 있는 곳은 낙원이고 일이 없는 곳은 지옥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것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나? 어떻게 시간을 죽이나?’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killing time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안식일도 엿새 동안 힘써 일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잘 지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엿새 동안 힘써 일한 사람만이 안식일도 잘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10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이 말은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 원리를 명쾌하게 밝히고 있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바울이 보여준 모범을 본받아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합니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전해진 지 약 120년 동안 기독교가 국가에 큰 공헌을 했다는 점에 대하여 일반 모든 학자들도 다 크게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 나라에 공헌한 내용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교육입니다.
둘째가 여성에 대한 지위를 향상시킨 것입니다.
셋째가 모든 우상숭배와 미신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함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공헌 네 번째가 근면한 삶을 살도록 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우리 조상들 중 양반들은 일을 하지를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여름에 땀을 흘리며 테니스를 열심히 하니까 양반들이 그것을 보고서 점잖지 못하게 그게 무슨 짓이냐고 그런 것은 하인들에게나 시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천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땅에 와서 일을 하는 것이 복된 일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 이것은 웬 소리냐 하였더니 사울이 궁색한 대답을 합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이에 사무엘이 무섭게 책망을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부음보다 나으니”
천천만만의 기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낫다,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했느냐 함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결과론을 내세웁니다. 좀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좀 잘못된 일은 있었다 하더라도 결과는 좋지 않았느냐,
방법은 잘못됐더라도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정의를 무시하는 사랑, 공의를 무시하는 자비, 정의를 떠나서 번영을 이루겠다는 생각,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는 지금 평범하게 느껴지고 있고, 상식화하고 있습니다. 관례상 나라의 법을 어기는 것들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죄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회개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깊이 뿌리 박힌 죄입니다.
지금은 누구 누구의 잘못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모두가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역사를 돌아보아도 지도자가 잘 나서 잘 살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지난 60여년 동안 정신없이 달려 왔습니다.
이제는 잠깐 멈추어 서서 재정비가 필요한 때입니다. 총체적 부정,
이번 기회에 제대로 고칠 것 다 고치고 가야.
우리에게는 상황에 따라 거짓말하고 정당화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불가피하다고 하는 상황, 이런 것을 들어서 자기 행위가 엄연히 불의인 줄 알면서도 이를 정당화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 자신은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자식들한테는 ‘너희들 고생 안 시키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쓸데없는 소리올시다. 이 무슨 망발입니까?
잘못을 정당화하는 사고 방식은 무서운 이데올로기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고 우리가 할 일은 방법을 정당하게 지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힘과 성공이 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의와 공의가 곧 힘이라고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이룬 성공은 절대로 축복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공의와 정의의 절대성을 말씀합니다. 이유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이 먼저 지켜져야 되는 것입니다.
번영과 성공 그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정의가 이루어진 후에 그 뒤에 번영과 축복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번 8인의 헌법재판관 중 하나인 안창호 재판관의 성경 인용을 보고 정한 것입니다. 아모스뿐만 아니라 이사야도 인용한 것을 보면
성경에 매우 해박한 분 같아요.
안 재판관은 아모스 5장 24절이 “불법과 불의를 버리고, 바르고 정의로운 것을 실천하라는 말씀”이라며 “탄핵심판은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문제로 정치적 폐습을 청산하기 위해 파면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투명하고 공정한 권력행사로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적 신뢰와 국민안전을 제고하여 사회통합과 국가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사야 32:16-17 “그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선지자 아모스가 활동하던 때는 남유다 왕 웃시야와 북이스라엘 왕 여러보암 2세가 통치하던 때로서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 왕국 이후 정치적, 경제적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도덕적 타락과 종교적 부패가 만연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아모스가 하나님의 공의의 회복을 외쳤던 것입니다.
즉 총체적인 부패 상황이 지속되는 한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해도 멸망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회복함으로써만 멸망 가운데서 구원받을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선포한 것입니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정의를 물같이’ 물이라는 것은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의를 물같이’ 모든 사람들이 정의를 물과 같이 근본적인 것으로, 생명의 원천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은 위에서부터 밑으로 흐릅니다. 정의 또한 위에서부터 물 흐르듯이 흐르게 마련입니다. 위에서부터 정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위에서부터 썩었습니다. 그러니 밑으로 내려가면서도 썩을 수 밖에.
그리고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공의를 홍수같이가 아니라 마르지 않는 강같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분들은 홍수같이 하려고 합니다. 싹 쓸어버리고 치워버린다는 식입니다. 그러면 홍수 난 들판처럼 다 없어지고 맙니다.
공의는 강같이 위에서 조용히 흘러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공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공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남에게 강요할 문제가 아닙니다. 나 먼저 조용히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의의 원리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각자 맡은 자리에서 정직하게,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
안이숙 사모님의 찬송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믿는 우리들은 일을 축복으로 여겨야 합니다.
크리스찬들이 해서는 안되는 말.
입에 풀칠하기 위해 일한다고 합니다. 죽지 못해 억지로 한다고 대답합니다.
일이 있는 곳은 낙원이고 일이 없는 곳은 지옥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것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나? 어떻게 시간을 죽이나?’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killing time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안식일도 엿새 동안 힘써 일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잘 지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엿새 동안 힘써 일한 사람만이 안식일도 잘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10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이 말은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 원리를 명쾌하게 밝히고 있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바울이 보여준 모범을 본받아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합니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전해진 지 약 120년 동안 기독교가 국가에 큰 공헌을 했다는 점에 대하여 일반 모든 학자들도 다 크게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 나라에 공헌한 내용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교육입니다.
둘째가 여성에 대한 지위를 향상시킨 것입니다.
셋째가 모든 우상숭배와 미신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함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공헌 네 번째가 근면한 삶을 살도록 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우리 조상들 중 양반들은 일을 하지를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여름에 땀을 흘리며 테니스를 열심히 하니까 양반들이 그것을 보고서 점잖지 못하게 그게 무슨 짓이냐고 그런 것은 하인들에게나 시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천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땅에 와서 일을 하는 것이 복된 일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와서 영농을 가르쳐주고, 가축을 먹이고, 오늘 우리가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건강하게 일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잠언서에서 집중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은 생전에 그의 설교 가운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 내 장례식장에서 제일 듣고 싶은 소리는 ‘이 분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애쓴 사람이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말을 듣고 싶습니까?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여기에 참 번영도, 자유도, 평화도 있는 것입니다.
성공 사례보다, 부의 축적보다, 편리하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원칙대로 사는 사람이 손해보지 않는 사회입니다.
아모스 5:4,6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할렐루야 바로 이것입니다. 찾으면 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가 살 수 있는 길은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뿐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통하여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