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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순교 (사도행전 7: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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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질문을 받습니다. 목사님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 누구를 가장 존경하십니까? 그런 질문을 받으면 저는 다 존경하지만 제일 닮고 싶은 사람은 스데반 집사라고 대답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짧은 생애를 마쳤습니다마는 성령 충만함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말씀해 주시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의 충만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는 플로레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곧 감동있는 체험적 신앙을 이야기 합니다. 모든 복잡한 문제를

다 넘어설 만큼 감동, 큰 감격이 있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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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본문은 스데반의 순교하는 장면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의 12제자는 아닌 일곱 집사중 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대목을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왜 예수님의 수제자 사도 베드로가 아닌 스데반입니까? 왜 사도도 아닌 집사 스데반이 먼저 죽느냐, 순교하느냐 이 말씀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사람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저 갈릴리 촌사람이 아니고 헬라파 유대인이요 지성인, 당시로 말하면 세계문물을 두루 꿰고 있는 사람입니다. 식자층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죽음은 초기 기독교에 상당한 손실이었고 그 후에 주어진 핍박은 초기 기독교에 위기로 작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핍박은 기독교의 확장으로 세계화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성령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지난날의 역사를 보면 이런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기독교는 고난과 더불어 확장되는 종교라고 합니다.

한국교회가 형성되던 시기는 일제의 침략기였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민족교회로 출발하였습니다.

 

일본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나라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1910년에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국제적인 관심은 한반도가 일본에 귀속된다 할지라도 일본이 남하해 오는 러시아의 세력을 막아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입장이었기에 한일합방에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나라를 빼앗기고 자유를 잃었음에도 호소할 데가 없는 불행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3.1운동은 이러한 우리 민족이 민족적 생존권을 주장함과 동시에 자유를 선언한 운동입니다.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吾等(오등)()()

朝鮮(조선)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기독교인이 그 절반인 16명이었습니다. 50%

전체 인구 중에 기독교인이 1%내지 1.5%밖에 안 되는데 33인 중 절반.

이것만 봐도 한국에 기독교가 얼마나 우리 동족의 현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참여하고 있는가를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눈물로 기도하면서 이 어려운 난국과

역사의 굴곡을 헤쳐 나왔습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전통입니다.

하나님은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고, 느헤미야와 에스더와 다니엘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나라를 위하여 기도할 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잘 나가던 복음의 흐름이 갑자기 스데반의 순교로 주춤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몹시 당황하고 앞날이 캄캄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늘 평안만 주시지 않고 환란과 핍박과 고난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기도 하였지만은 하나님의 역사는 그 환란을 통해서 복음을 퍼지게 하셨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보면 그 환란은 축복의 기회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그 자리에 있던 사울이 회심하게 되고 기독교는 아시아를 넘어서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현실만 보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 주어진 현실의 암담함에 낙심하고 실망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주어진 암담한 현실을 사용하여 미래를 여십니다.

한국교회는 고난과 더불어 성장하였습니다. 그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앞으로도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이 나라의 앞날을 이끌어주실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의 섭리 속에 나와 우리민족의 운명도 들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기적적인 성장의 원인을 세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믿는 믿음이고 두 번째는 뜨겁게 기도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믿으면 반드시 전도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믿는 것, 순전하게 믿는 것.

목회를 하면서 제일 듣기 싫은 말 중에 하나가 은혜로 하자입니다.

그 말은 좋게 말하면 융통성있게, 사실은 그냥 대충 넘어가자는 말입니다.

융통성이 있어서는 절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순교입니다.

순교자란 yes, no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융통성있게 사시면 망합니다.

크리스찬들은 망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저는 우리 교인들이 세상에 나가서도 예, 아니오가 분명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스데반의 이 순교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성령 충만함의 뜻이 무엇인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향해서 이를 갈았다, 합니다. 이를 갈며 성 밖으로 내치고 돌을 던졌다 합니다.

김일성을 열렬히 지지하던 사람이 이제 정신을 차려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이 옳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 믿고 복음을 전할 때 같은 동료, 왕년에 같은 친구였던 헬라파 유대인들이 여기서 용납하지 못한 것입니다. 저들이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돌을 던져 스데반을 때려 죽이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어 스데반을 죽이는데 한 몫을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큰 감동을 받습니다. 스데반이 죽어가면서 사도 바울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감동을 준 겁니다.

 

기독교가 대중들에게 인정받게 된 커다란 사건이 1895년에 발생하였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온 나라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는데 그때 사람이 죽으면 길거리에 그냘 버릴 정도였습니다. 여기저기서 시체들이 뒹굴고 있었고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기독교인들이 십자가 완장을 차고 시체들을 정중히 입관하여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기독교가 민족교회로 자리매김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스데반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데 이에 대한 스데반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본문에 보는 대로 그는 성령이 충만했다고 합니다.

성령 충만한 자는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죽이는 자를 보지 않았습니다.

네가 이럴 수 있느냐, 네가 어찌 이럴 수 있느냐,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건 어떤 상황에서든지 먼저 위를 보십시오.

위를 보는 것, 그것이 성령 충만한 자의 기본자세입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

 

또한 주목하였다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였습니다. 집중해서 보았습니다. 그 외의 다른 것은 안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리할 때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고 그리스도를 뵈었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계신 그리스도를 뵈었습니다.

어서 오너라, 하고 서서 기다리고 계신 그리스도를 뵈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볼 때, 집중적으로 볼 때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을 뵙게 됩니다.

 

죽음을 앞두고 스데반은 주님을 우러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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