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설교말씀

여호와께서 보신지라 (출애굽기 3:1-4)

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황승우, 선우 영 독일 아웃 리치 보고.

오늘 본문에는 모세라고 하는 위대한 이스라엘 지도자가 소명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 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호렙산 기슭에서 하나님 만나는 장면을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후 그는 전과 전혀 다른 인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모세의 나이 80입니다.
지난 날 그는 바로의 궁전에서 애굽 사람으로 40년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으로 또 다시 40년을 살게 되는데, 거기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 양무리를 치게 되고, 그 집의 딸과 결혼하여 처가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목자로서 덧없이 40년을 살아갑니다. 80년이 이렇게 흘러갔습니다. 덧없이 살아 이제 팔순고령이 되었습니다.
아무 소용없이 버려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무슨 꿈이 있겠습니까?
단테의 신곡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지옥을 방문하게 되는데 지옥의 문패에는 이렇게 써있다고 합니다. “이 문을 들어서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호렙산 기슭에서 양을 치다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만난 이후 그는 전혀 딴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 하나님을 만나고 거듭 태어나고 보니 의미없다고 생각했던 지난 80년이 버려진 과거가 아니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 속에 그 80년은 예비된 기간, 필요한 훈련기간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그는 바로의 궁전에서 많은 애굽의 문물과 애굽의 학문을 익힙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자면 애굽을 잘 알아야 됩니다.
특별히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놓은 문명을 자랑하는 애굽 문명을 다 익히는 그런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또 그런가하면 광야에서 목자로서의 40년은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키우는 시간이었습니다. 한때 교만하기도 했고 혈기도 있었습니다. 마음대로 안된다고 사람을 때려 죽이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동안 그는 과거의 혈기 다 버렸습니다. 애굽의 왕자로서 갖고 있던 꿈도, 욕망도 완전히 버려집니다. 인내를 배웁니다. 온유함을 배웁니다. 거기서 그는 새사람으로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이 40년도 지도자의 소양을 키우는데 꼭 필요한 그런 40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과거의 역사가 이렇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됩니다. 쓸데없는 과거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을 위해서 있었던 과거입니다. 하나님의 큰 경륜과 그 뜻 안에서 새롭게 자기를 발견하는 순간 지난 날의 80년도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3:5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아주 버려졌다고 생각했던 과거로부터 깨끗이 벗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부름 받는 시간 이후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삶은 사실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순간부터 공적인 경기가 시작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부름을 받기 이전을 잘 설명 하고 있지 않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이 부름 받은 75세 이후의 삶만 그려져 있고, 그가 전에 무엇을 했는지, 선하게 살았는지 악하게 살았는지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순간부터 그의 태도 하나, 하나를 생중계하듯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경우도 80세에 하나님께 부르심 받기 이전의 삶은 짧게 언급이 되고 이후의 삶에 대하여 출애굽기, 민수기를 통하여 전해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3년 반 동안의 공생애에 대해서는 꽤 자세히 말하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의 30년의 세월에 대하여 거의 언급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과 저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지금,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난 다음 어떻게 살았느냐?
어떻게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게 됩니다.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너는 가라, 아무 것도 없는 것 같고, 아주 무능한 것 같아도 너는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하나님의 그 말씀에서 그는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특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그 형편을 다 아시고 부르십니다.
그의 혈기, 그의 죄악됨, 그의 나약함 다 아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제 모세가 변명할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나는 이런 죄인입니다. 이렇게 형편없습니다. 다 늙었습니다. 이게 안통하는 겁니다. 다 알고 있다 하십니다.
모세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는 말을 잘 할 줄 모르는데요”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 말 잘 못하는 것 안다. 그러나 사람의 입을 지은 자가 누구냐?” 모든 부족함을 다 아시는 분이 그를 부르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고하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그 분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너는 내 백성을 구원하라, 가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모세가 받은 소명입니다.
이 소명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내가 고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한 그 소명을 다 새롭게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맡겨진 사명이 뭐냐? 사명파악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세상에 보내셨으며 내 일생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가, 이 사명을 알고 출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1절에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
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정체성입니다.
‘일군’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풀어보면 ‘노를 젓는 자’라는 뜻입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면 큰 배가 나오는데 이 배 아래부분은 노 하나에 노젓는 노예들이 한 명씩 배치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노예들은 명령이 떨어지면 노를 젓습니다. 일제히 젓습니다. 빨리 저으라면 빨리 젓고 멎으라면 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여기에 질문은 없습니다. 이 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지만 노를 젓습니다. 보상도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일군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이 부르심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절대 믿음, 절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나의 능력도, 나의 경력도, 나의 과거도 아닙니다. 다만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이 사실만을 믿어라, 백성들로 이 사실을 믿데 하라, 이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가져야 할 자기 의식, 정체감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역사하신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것만 믿어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준 것이 모세를 통한 이적, 기적입니다. 여러분, 기적을 믿으십니까?

어느 날 주일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을 가르칠 때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쳐서 물이 갈라지고, 그래서 건너갔다고 하는데, 사실 원문에는 ‘얌숲’ 즉 갈대바다라는 뜻이거든, 그래서 깊이가 얼마 안되는 얕은 바다를 건너간 걸거야” 그러자 한 어린아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아, 하나님, 이적을 나타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얕은 물에 그 많은 애굽 군사들이 다 빠져죽었으니 이적이 아닙니까?”

여러분, 성경을 믿으려면 똑똑히 믿어야 합니다. 전부를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적을 빼면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여 이것을 요렇게 빼고 저것을 조렇게 빼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강권적으로 보내셔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맡기셨다, 그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절대 순종, total acceptance, 절대수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왜요? 라고 물어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그대로 ‘아멘’하고 그대로 ‘예’하는 그런 절대 순종의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절대 헌신하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부족한 것 다 아십니다.
그러니 할 말 없습니다. 그저 딱 한 마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 뿐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말이 전혀 필요없습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순간 주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것이 성령 충만한 이사야의 응답이었습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나의 맘 나의 몸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주소서
가진 것 모두 다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나를 받으옵소서 나를 받으옵소서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을 오늘도 부르고 계십니다.
믿음의 사람, 진실로 응답하는 사람, 헌신하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나의 부족함과 허물은 끝이 없이 많지만 그러나 이대로를 하나님께 바치는 그 사람,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오늘도 부르고 계십니다.
도대체 이 죄악 많고 복잡하고 상식적이지 않은 이 세상에서 내가 더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내 생의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이 없다면 나에게는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그 누구든 오늘 주님의 그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하고 그대로 주께 맡기면, 그렇게 응답하면, 이제
새로운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새로운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능력으로 크고 놀라운 일을 이 땅에서 펼쳐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Date: 2017/01/22 11:11:03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