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제자 중 하나인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의 필수사항에 대하여
물어보았습니다. 공자는 대답하기를 ‘족식족병민신지의’라 하였습니다.
식량이 충족하고 군병이 넉넉하고 백성의 신뢰를 얻는 것, 이 세 가지가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자공은 더 물었습니다.
‘만일 나라의 정세가 부득이하여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먼저 무엇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공자는 대답합니다. ‘군병을 버려야 한다’
‘만일 부득이해서 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식량을 버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백성이 정부를 믿지 않는다면 나라가 서 있을 수 없다.
믿음이란 나라의 근본이다.’
백성의 믿음을 얻지 못하면 정치란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의 정치론인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자본도 군사력도 기술도 다 소용없습니다.
로마서 13장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위에 있는 권세란?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이야기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위에 대통령이 있지 아니하고 국회의원이 있지 아니하고
조선총독부 총독이 있지 아니하단 말씀입니다.
한평생 역사를 연구한 유명한 역사가 토인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를 자세히 보니 ‘사람의 뜻대로는 되지 않더라’고 합니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형통하고 발전하는 것만을 바랍니다.
그런데 역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침체가 있고 형통이 있습니다.
역사는 흥망성쇠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미처 모르고 있지만 작으나 크나 현실 안에 의미가 있더라 하는 것입니다. 망하고 흥하고 살고 죽고 그 많은 사건들을 겸손히 받아 들이면 그 속에 메시지가 있더라는 것이 토인비의 역사 연구의 결과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반드시 있을 것이 있을 뿐입니다. 그 속에 있는 의미를 내가 얼마나 알아 듣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그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병들어도 저주라고 생각하지 않고, 잠깐의 실패는 있어도 주저앉는 법이 없어집니다.
바르게 예수 믿는 사람들은 고난도 내게 주시는 사랑으로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 자체가 사랑의 증거요, 또한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수용하는 이 사람이
진정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8절을 보면 “이것이 내게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사도 바울이 자기 몸에 있는 사탄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간구, 그것도 세 번이나 간구하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바울이 그렇게 저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는 은혜라는 것도 잘 살고 오래 살고 건강하고 출세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바울이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복음의 길을 열어 주십시오. 복음의 문을 열어 주십시오. 선교의 문을 열어주십시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체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필요하니, 최소한 건강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구했습니다.
육체의 가시 이것을 빼달라고 하나님 앞에 세 번 간구하였습니다.
그 기도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생각하는 은혜가 그릇 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말씀하십니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다. 네가 고민하고 있지마는 그것은 내 은혜다. 그대로가, 네가 가진 불편한 몸, 그대로가 내 은혜다라고 하십니다.
왜요? “너를 겸손하게 만들고, 너를 그리스도 안에서 강건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 가시이다. 그런고로 내 은혜, My Grace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을 바꾸라. 발상을 바꾸라. 뜻을 바꾸라. 네 생각을 버려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응답을 오늘 주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하는 일에 열매가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한 보람과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일의 결과가 좋아야 그 일을 계속하고 싶은 욕망도 갖습니다.
일은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좋지 못할 때, 또는 열심히 노력해서 일했는데도 열매가 없을 때 실망하고 좌절하고 침체에 빠집니다.
분명히 삶에는 인과응보의 법칙이 작용합니다.
성경에도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는 내가 뿌리지 않은 것도 거두고, 나에게 원인이 없는 일도 생기곤 합니다. 어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맥없이 돌아가신 후 실망과 피곤 속에서 낚시에서도 실패한 후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황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베드로는 거절했어야 했지만 ‘말씀대로’ 그물을 내려 보겠다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보자고 결정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많은 고기였습니다. 베드로의 생각의 틀이 깨지는 순간.
이렇게 새로운 인생은 은혜, 은사, 카리스마로 시작됩니다.
인생을 사노라면 내 잘못으로 인한 고통도 있지만 내 잘못이 아닌 고통도 많습니다. 진주는 조개가 모래알 같은 자극물로 상처를 받을 때 생겨나는 보석이라고 합니다. 조개의 상처가 진주의 아름다움을 낳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생의 고통과 상처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주는 선물이어야.
인생의 어려움 고통 속에서 은혜를 경험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은혜 즉 카리스마의 이야기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승리하는 장면입니다. 열왕기상 18장에는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들을 물리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제단을 사르고, 닫혔던 하늘 문이 열려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큰일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자신을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절망에 빠진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사람의 음성을 듣고 환경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엘리야도 인간이기 때문에 때로는 지칠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위대한 역사 뒤에 육체적으로는 상당히 피곤해졌습니다.
그리고 육체적인 탈진이 그에게 영적인 침체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영, 혼, 육은 서로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혼과 육의 상태가 영에 영향을 미치고, 영의 상태가 혼과 육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CS 루이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육적인 존재인 것을 부인하게 만든다.
영빨로만, 영혼육이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한 영적 상태인 상태를 유지하려면 육의 건강이 필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엘리야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를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9절과 13절을 보면,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두 번이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엘리야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을 죽이려는 이세벨의 눈을 피해서
호렙산의 한 동굴에 들어가 숨어 있었습니다.
호렙산은, 모세가 출애굽을 한 후, 하나님을 만나 십계명을 받은 산입니다.
그래서 호렙산을 하나님의 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위로와 힘을 얻은 엘리야가, 호렙산을 찾아 간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선지자라는 직책을 주셨는데, 선지자로서의 역할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전하여야 하는데, 아무도 없는 동굴에 엘리야가 있습니다.
엘리야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발걸음을 향하여 했던 곳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성읍이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요구하시는 것도, 기도를 통해 받은 능력으로 우리가 속한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해
나가는 복음의 일꾼인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물에는 다 정해진 자리가 있습니다.
자기 자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도 저마다 정해진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있을 자리, 자기가 설 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분별력 있게 행동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자기 자리를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있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오늘 본문의 엘리야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어긋난 또 다른 부분은 기도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교통입니다.
엘리야가 원했던 하나님과의 교통함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크고 강한 바람같은 만남이었습니다. 또한 지진과 같이 큰 요동침이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또한 불과 같이 임하는 뜨거운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예상하지 못했던 세미한 음성으로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바로 이 세미한 음성이, 오늘도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엘리야는 달라졌습니다. 동굴에 머물러 있는 그의 몸이, 이제 다시금 성읍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여전히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엘리야는, 그 험한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이 성전에 모였습니다.
일 년의 마지막 달인 이 12월에 우리의 신앙과 인생이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달라지고, 새롭게 변화되어져 갈 수 있는 은혜의 달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더욱 더 열심히 예배하고, 더욱 더 열심히 기도하고, 무엇보다도 더 열심히 전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Date: 2016/12/04 11:1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