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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향기(요한복음 2:13-22)

목사님 0 1,511

  

 

   가끔 커피 전문점 근처를 가면 커피 향기가 나를 유혹합니다. 오랜 시간 

커피를 끓이고 마시고 하는 동안 구석구석에 커피 향이 배었기 때문입니다.

커피 향은 커피는 아닙니다. 그러나 커피 향은 사람을 커피로 끌리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화도 그와 같습니다. 문화는 그 문화를 형성케 한 어떤 사회의 본질로부터 배어나는 향기 같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문화도 본질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화는 사람을 그 본질로 돌아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화가 중요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비유하자면 커피 같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커피 향과 같은 좋은 냄새가 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냄새가 납니다. 그 냄새와 향기를 우리는 기독교 문화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 거듭난 초대교회 교인들에게서는 아주 강한 예수의 향기가 났습니다. 그 강한 냄새와 향기가 저들 공동체의 문화를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문화가 그 교회 공동체를 세상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사회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곳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순수함이 있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돕고 섬기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냄새가, 그 향기가, 그 문화가 사람들을 끌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 이후를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당시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건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생명도 포기해야만 하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목숨을 걸고,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카타콤, 지하동굴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그곳에서 자식을 낳으면서 살았습니다.

 

요즘 전도가 잘 안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 탓을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교회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기독교라고 하는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문화적 특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기독교가 기독교의 매력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매력과 그 독특한 문화적 특성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세상 욕심 부리지 않음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게 되면,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어지게 됩니다. 세상나라와 하나님 나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 7절 이하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예수를 믿으면,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세상 욕심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 욕심이 없어지면 사람이 사람다워집니다. 아름다워 집니다. 

훌륭해 집니다.

기독교 신앙은 참 매력적입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풍기는 냄새와 전혀 다른 향기를 풍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기를 부인합니다. 세상을 부인합니다. 욕심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 한국의 기독교는 이 냄새를 잃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향기가 나지 않고 좋지 못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좋지 않은 세상적인 냄새 때문에 사람들이 기독교를 외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남진의 노래, 마음이 고와야지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한 번만 마음 주면 변치않는 여자가 정말 여자지 

여자다운 여자에 대해서 노래

사람이라고 다 사람은 아닌 것 같은 일들이, 엽기적인 일들이 벌어집니다.

사회가 점점 더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다 교회이겠습니까? 

건물이 지어지고, 그 위에 십자가를 세워 놓았다고 해서, 다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했습니다. 

소금과 같이 희생하고, 빛과 같은 착한 행실로,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낼 때에, 비로소 교회의 본연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라고, 또한 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런데 이 말씀을 받을 때에, 우리 마음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아 그렇구나. 교회는 정말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해 나가야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더 이상의 의미로는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면 좋겠지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사명은 해도 그만, 한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했을 때에는, 무조건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군인이 상관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한다면, 그는 군인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교회라고 한다면, 그 교회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중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책을 복음서라고 하는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이 있습니다. 그 복음서 중에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을 공관복음(Synoptics)이라 해서, 요한복음과는 구별지어 부릅니다. 

요한복음의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있었던 사건이지만, 

공관복음에 나오는 성전 정화 사건은 공생애 말기, 고난 주간 중 월요일에 행해진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또한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세 개의 성전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준비하고 솔로몬이 건축한 첫 번째 성전, 솔로몬 성전은 

B.C. 959년에 완공,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B.C. 586년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 바벨론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귀환한 스룹바벨이 파괴된 성전을 

B.C. 516년에 재건하였는데, 이 스룹바벨 성전은 헤롯 성전이 지어질 때까지 

훼손과 복원을 거듭하면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성전인 헤롯 성전은 에돔 사람이었던 헤롯 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B.C. 19년에 성전 건축을 시작하였다가 

A.D 70년 로마의 장군 티투스, 디도에게 함락당합니다.   

 

그런데 성전은 천막으로 지었든지, 아니면 돌이나 황금으로 지었든지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 지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전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느냐 하는 것이 진짜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올바른 예배와 기도가 드려지지 않는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시대마다 그 사회를 지배하는 정신적 가치체계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두 가지 정신적 가치체계는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두 가지 기둥은 

율법과 성전이었습니다. 율법은 유대인의 삶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크고 작은 삶의 원리가 모두 율법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요, 속죄 받는 장소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먼 외국에 가 있어도 일 년에 한 차례 

이상은 성전을 방문하였습니다. 

 

13절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명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이었는데, 유월절을 맞이하여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성전 안에는 유월절을 앞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처음 기적을 베푸신 사건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앞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와같이 우리들도 변화된다는 사실.

첫 번째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에 이어서 바로 성전 정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교가 생명력을 상실한 것은 성전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전이 어떻게 타락했는지 14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전 안에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도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존재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흠없고 정결한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먼 지방에서 오는 자들이 그런 짐승을 가져 오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불편을 덜어 주기 위하여 성전에서 짐승을 팔고 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룩하여야 할 성전에 인간의 욕심이 들어오면서 어떻게 하면 경제적 이익을 남길까를 고민하게 되면서 썩어들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만 20세 이상의 유대 남자들은 반세겔의 성전세를 납부하도록 되어 있었는바 이를 위하여 로마나 헬라의 돈을 세겔로 환전해 주게 되었습니다.

왜 로마의 돈에는 황제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돈으로 환전.

환전 비용이 점점 더 들어.

하지만 이처럼 선의의 목적에서 비롯된 관행이 점차 부패하고 말았는데, 

제사장들이 상납금을 받는 조건으로 특정 장사치들의 독과점 행위와 폭리 행위를 묵인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바친 제물들을 다시 파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고 행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성도들을 섬기고자 시작했던 필요가 본질을 삼켜버려, 거룩한 예배와 삶이 아니라 경제적 이윤 추구가 주된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장사하는 집’이 되어버렸고, ‘강도의 굴혈’이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영적인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고 더 이상 하나님에게도,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다 가져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하신 것은 성전이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곳으로 회복되기를 원하는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성전에서 거룩한 예배가 드려지고 그 예배를 드린 사람들이 삶이 새로워져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성전에서 하여야 할 일에는 관심이 없고 성전을 돈벌이와 이익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을 때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신앙 생활이란 영광만 받기 위함이 아닌 것.

사도 바울 골로새서 1: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선 고난, 후 영광

 

오늘 본문 16절 하반 절에 보면,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1 : 17절에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 위해서는, 기도에 힘쓰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기도가 쌓여 있어야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집이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러므로 교인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성전에 나와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교회에 없다고 한다면 그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교회의 역할을 상실한 교회를, 세상 사람들이 교회라 여기겠습니까?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면, 그 교회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가 나타나지만, 그 가운데 교회답지 못한 교회가 두 교회가 있지 않습니까?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물론 기도 시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기도하기란 매우 힘이 듭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지만, 이는 성도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임을 깨닫고, 이 일들을 힘써 행하게 될 때에,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진정한 크리스챤이라 부르고, 우리가 다니는 교회를, 진정한 교회로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를 학교로 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실이 있는 건물이 있고, 운동장이 있기 때문에 학교라고 부릅니까?

우리가 학교라고 부르는 데에는 배우려고 매일같이 등교하는 학생들이 있기에, 우리는 학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교복만 입었다고 학생이 아닙니다.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학문을 배우기 때문에 학생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지 않으면 강도의 굴혈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새하늘 교회를 강도의 굴혈로 만드시겠습니까?

기도하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드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는 하나님이 머무시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아 은혜 받는 교회입니다. 

그 거룩하신 주님의 뜻을 받들어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복된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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