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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역대하 16: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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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하게 진행될 당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전쟁을 끝낼 수만 있다면 악마와도 손을 잡겠다.”

그만큼 그 당시 상황은 급박했습니다. 그래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잡지 말아야 할 소련의 스탈린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영국의 처칠 수상은 스탈린의 공산주의가 히틀러의 파시즘 

못지않게 무섭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그 경고는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은 순식간에 동유럽과 중국, 중남미 곳곳에 공산 정권을 확산시켰습니다. 급기야 1960년대 초반에는 세계 지도의 3분의 1이 공산화 되고 말았습니다.

미국과 영국이 2차 대전에서 승리했지만, 붙잡지 말아야 할 손을 잡음으로써 그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새로운 냉전 시대에 세계가 안고 가야 했던 짐이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역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잡아야 할 손이 있고, 잡지 말아야 할 손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런 잡지 말아야 할 손을 잡은 결과입니다.

 

오늘 본문은 남유다의 아사 왕 때 있었던 일입니다.

아사는 유다의 세 번째 왕입니다. 솔로몬의 증손자,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그는 41년간 왕으로 있었는데 처음 35년까지는 나라를 잘 다스렸으나 안타깝게도 말년이 좋지 못했습니다. 

마라톤 경주로 말하면 42.195km 풀코스 가운데 약 35km까지 잘 달리다가 마지막 몇 km 앞에서 주저 앉은 모습입니다. 

그의 인생 초반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축복 받은 삶을 살았지만, 후반에 가서 신앙이 변질되어 버려 말년이 비참했습니다. 

전반에 잘 살았어도 후반에 가서 잘못 살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갑니다. 

사랑도 현재가 중요한 거지요? 사랑한다가 중요하지 사랑했노라, 사랑했었지

여러분,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은혜 많이 받았어도, 현재가 중요합니다. 

왜? 현재가 우리 인생의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아사왕은 역대하 14-16장에 걸쳐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는데, 왕위에 오르고 초반에는 정말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믿음이 정말 좋은 왕이었습니다. 

아사는 왕위에 오르자 먼저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당시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가 성행했습니다. 

전국 곳곳에 우상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일제히 척결했습니다. 

더 나아가 자기 어머니가 우상숭배 한다고 폐위까지 시킬 정도였습니다. 

조정 안팎의 부정부패를 척결했고, 군대를 강화하고 국방을 든든히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물론 백성들에게도 하나님께로 나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를 14:7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 사방에 평안을 주셨느니라”

그리고 구스(이디오피아)의 세라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올 때 당시 유다의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대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 결과를 역대하 15:19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이 때부터 아사 왕 제삼십오 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

인생에서도 갈등과 다툼이 없으면 얼마나 좋은지 아십니까? 

우리가 믿음이 좋을 때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려 주십니다.

믿음이 없어지기 시작하면 내가 무엇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16장을 보면 안타깝게도 이야기가 반전됩니다. 분위기가 정반대입니다. 거듭 실패하고 마침내 멸망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시대는 남북분열왕국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가 남 유다를 침공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범상치 않은 겁니다. 

아사의 신앙이 흔들리자 하나님이 신호를 보낸 것입니다. 

이럴 때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아사는 정반대로 엇나갑니다. 그는 과거 구스의 전쟁을 치를 때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힘을 의지합니다. 

신앙이 약해질 때의 특징은 계산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많아집니다. 

주변의 강대국이었던 아람에 파병을 요청합니다. 

그 결과 북 이스라엘의 침공을 격퇴하긴 합니다만 그 일을 계기로 아람에게 가나안 땅 침공의 빌미를 제공합니다. 

이럴 때 선지자 하나니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합니다. 9절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감찰하십니다. ‘감찰한다’는 말은 주님의 눈이 온 땅 여기저기를 두루 다니시면서 살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온 땅과 모든 사람과 그 마음 속 깊은 곳을 살피시는 이유는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가?”를 파악하시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어디서든, 어떤 곳에서든 주님을 갈망하고 찾는 사람,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 기도를 쉬지 않는 사람, 항상 찬양하는 사람 ….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찾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전심으로”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집중해서’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의 랍비였던 ‘도비드 딘’이라는 사람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

어떤 남자가 아주 괴로운 일을 당하여 이 랍비를 찾아왔습니다. 

랍비는 그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속에 있는 슬픔과 괴로움은 전혀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버럭 화를 내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랍비가 말합니다.

“이보게 젊은이! 그렇게 화가 나면 나한테 소리 지르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소리 지르면 되지 않겠는가?”

랍비는 이 청년을 ‘통곡의 벽’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이 앞에서 하나님께 마음껏 화를 내고 소리 지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한 시간이 넘게 통곡의 벽 앞에서 ‘하나님, 그럴 수가 있나요?’라고 화를 냈습니다. 화는 이내 통곡으로 변했습니다. 

그 통곡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랍비 도비드 딘은 사람들에게 기도를 이렇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기도란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기분이 나쁘면 기분이 나쁜 대로, 소리 지르고 싶으면 소리 지르고 싶은 대로,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와 얽어매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터뜨리는 것’이라고. 

 

환자가 의사에게 와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의 아픈 것을 자세히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사는 귀를 기울여 듣습니다.

우리가 영혼의 의사인 하나님 앞에 와 먼저 해야 할 일은 털어놓는 것입니다. 마음속의 분노와 실망감, 좌절과 낙담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털어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 기울여 들어주십니다.

 

둘째, ‘일편단심으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일편단심으로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힘들어도 일편단심으로 충성하고, 누가 시기해도 일편단심으로 충성하고, 누가 오해해도 일편단심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묵묵히 충성하면 어디선가 복된 소식이 들려올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본문의 아사 왕은 시작은 훌륭했으나 나중에 가서 주님과 그 말씀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9절 후반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아람과 동맹함으로 전쟁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전쟁이 계속되어 골머리를 앓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사왕의 믿음이 식어버리자 나타나는 현상은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게 됩니다. 이런 아사의 태도가 10절에 나오는데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사람과의 관계도 잘못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열린 마음과 열린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을 보면서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실수한 후에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다시 서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지적에 제가 죄인입니다. 눈물로 회개. 

선견자 하나니가 와서 아사왕을 꾸짖을 때, 아사왕이 만일 다윗처럼 보좌에서 내려와서 무릎을 꿇고 통곡하고 자복하고 “하나님이여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라고 했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복구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죄를 내어놓고 회개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사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리의 음성 듣기를 거절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고, 교만이 극에 달한 증거입니다. 

결국 아사왕은 하나님의 진노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경고의 말씀을 따라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언제나 좋은 것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잘못된 것이 있으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yes, no가 분명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좋은 의사는 우리가 병들었을 때, 병들었다고 정확하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하시지 않습니다. 수술할 것은 수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프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말씀에 귀를 막고 등을 돌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아사왕이 그랬던 것입니다. 

그에게 회개의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그 기회를 저버린 사람인 것입니다.  

 

그 후 아사의 발이 병듭니다. ‘발에 병이 생겼다’는 것이 어떤 상태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심장이나 뇌는 아니니 그리 치명적인 발병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무슨 병에 걸렸든지 간에 의사의 치료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행위는 물론 아닙니다. 오히려 의술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시는 대표적인 방법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여호와께는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만 구하였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즉 의사의 손을 빌리더라도 고쳐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했어야 했는데 아사 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이 이제는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 버렸다는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였고, 그것이야말로 진짜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3절에는 2년 후에 아사 왕이 결국 죽고 말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사의 실패 원인은 인본주의와 교만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신본주의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제일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도움을 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사는 어떻게 했습니까? 인생 초반에는 신앙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인본주의로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그가 형통하고 태평성대를 누렸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자기 힘으로 이룬 줄 착각하고 하나님을 멀리 했던 겁니다. 

이래서 성경은 늘 교만해지지 않도록 주의를 줍니다. 

고린도전서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교만해진 겁니다. 인간은 결코 홀로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붙잡아 주셔서 서 있음을 명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역사가 토인비는 세계 문명사를 연구하면서 하나의 법칙과도 같은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성공한 자는 그 성공한 것으로 망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사왕은 한 마디로 신본주의로 시작하였다가 인본주의로 끝나버렸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쳤습니다. 

그의 통치 말년에는 하나님보다는 인생을 의지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며, 선지자까지 옥에 가두는 불신앙으로 병들어 쓸쓸히 죽어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자신을 돌아 봅시다.

어떤 모습이었든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시고, 하나님께 겸손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충성심이 변함없는 성도를 기뻐하십니다. 

우리 인생을 감찰하시는 여호와의 눈에 전심으로 충성하여 

여호와로부터 능력을 받아 신앙생활에 유종의 미를 거두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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