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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는 믿음 (요한일서 2:15-17, 5:4)

목사님 0 719

   

 

    예수님의 윤리를 담고 있는 결정판이 마태복음 5-7장에 등장하는 산상수훈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윤리의 기준을 제시하면서 우리들에게 기도의 원문인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십니다. 마태복음 6:9-1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아멘.

 

주기도문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것.

반면에 사도신경은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서 하나님께 바친 것.

주기도문대로 사는 것이 성도의 진정한 삶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입술에는 주기도문이 있는데 

삶에는 주기도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탄은 우리가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되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우리를 미혹하거나 방해하고 있습니다.

 

다시 생각하는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지 마라. 

하나님의 아들, 딸로 살지는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를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마음이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 말은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절대로 행복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내 마음을 채울 때는  행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중심이 되실 때에는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을 세상에 주기 시작하면 그 마음에는 갈등과 고통 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 말씀을 보아도 그 마음에는 평안이 없고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왜요? 마음이 나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두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징계를 당했습니다. 

하나님도 믿고 바알도 믿고. 하나님도 믿고 재물도 믿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성경에 나오는 ‘세상’은 크게 3가지 용례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을 가리킵니다. 

둘째는 우주만물 가운데서도 특히 인간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할 때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셋째는 사탄의 지배를 받는 죄악된 세상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 15절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의 죄악된 것들을 사랑하고 집착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오늘 본문 16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육체의 죄성을 따라 품게 되는 욕망인데 인간의 기본 욕구를 초과하는 과도한 욕망을 의미합니다. 정도를 벗어난 식욕이나 성욕, 그 밖에 술 취함과 방탕 등 각종 세상 향락을 가리킵니다. 

안목의 정욕은 눈으로 보는데서 비롯되는 욕망입니다.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닥치는 대로 소유하고 즐기려는 과도한 욕망을 가리킵니다. 

이생의 자랑은 세상의 헛된 것을 과시하려는 욕망인데, 한 마디로 말하면 

과도한 명예욕과 허영심입니다. 

이 모든 욕망들은 세상에 속한 것들로 잠시 잠깐은 화려해 보이고, 좋아 보이고, 즐거워 보이지만 다 사라져버립니다. 그제야 헛되고 헛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뭐라고 표현합니까? 

17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영어성경(NIV)에는 ‘pass away’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흔적도 남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인생을 가리켜 이렇게 증거합니다.

베드로전서 1:24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육체’는 인간을 가리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이 쉬이 쇠합니다. 

생로병사입니다. 인간의 부귀영화는 풀의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꽃은 풀보다도 더 빨리 떨어지니까 세상의 부귀영화는 그렇게 쉬이 사라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꽃이 아무리 붉고 화려해도 10일을 못 가듯이 부귀영화가 오래 못 가고, 

권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10년을 못 간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인생무상입니다. 별 생각 없이 그저 먹고 마시고, 세상에 집착해서 살다 보면 인생이 

이렇게 쉬이 사라지고 만다고 사도 베드로는 선포하였습니다.  

시간은 안 쓰면 그냥 사라집니다. 물질도 안 쓰면 남는 것 같지만 썩거나 

오용되기 일쑤입니다. 

 

인간은 세월이 흐르게 되면 누구나 나이를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이든 모든 사람들을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미숙한 사람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연륜이 더해지고 교회에서 보낸 세월이 길어지면 영적으로 성숙해 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발견합니다. 왜 그럴까요?

영적 성숙과 영적 미숙의 차이를 만드는 근본적인 요소의 하나는 바로 가치관입니다. 오래한 신앙생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경이 가르치는 성경적 가치관을 얼마나 붙들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적 가치관과 비성경적 가치관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비성경적 가치관의 핵심은 한마디로 세속성이요 순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떤 분이 교회 생활을 오래 했어도 그가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순간적인 가치에 붙들려 살고 있다면 그는 여전히 영적으로 미숙한 성도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런 세속적 가치에 붙들린 인생과 반대로 영원한 가치를 지향하는 인생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 세속지향적 인생과 영원지향적 인생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세속지향적 인생이란 한마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자랑의 공통점은 감각적이고 순간적인 충동에 기초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욕구 그 자체를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구가 남용되고 과용될 때 그것이 바로 성경이 경계하는 정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이런 세속적 가치의 욕망에 빠지는 순간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그리고 이런 욕망의 출처는 결코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욕망의 공통점을 본문 17절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그것은 지나가는 일순간적 가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가치를 추구한 종말은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세속적 가치 지향의 인생을 살것인지-그것은 우리의 선택의 몫입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단어들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과 그 정욕, 하나님의 뜻 그리고 지나감과 영원히 거함

이 세상과 정욕은 지나가는 것이라고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12:3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1909년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만주 하얼빈역에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입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암살한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신실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안의사의 어머니는 아들이 32살 젊은 나이에 사형 선고를 받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을 듣고 수의와 함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내용입니다.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는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서는 반드시 선량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나오너라.”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겠다고 고백한 바울, 

로마 카타콤에서 생활하였던 로마 기독교인들 그들의 흔적은 성경으로 기독교 역사로 그리고 전승으로 그렇게 거룩하게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의 결론 부분에서 이런 성도들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라고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오늘의 결론 요한일서 5장 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여기의 ‘이기느니라’는 원어로 ‘니카’인데 ‘완전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특히 현재형 시제로 사용되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의 승리가 현재의 삶 속에서 지속적인 승리로 나타나야 됨을 강조한 것입니다. 

승리의 주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만 온전하다면 마귀가 지배하는 악한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힘으로 사단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단을 우리의 힘으로 대적하려 한다면 백전백패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부여잡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면서 체험하며 사는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세상의 매력 앞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펼쳐 나가시는, 그래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3장~빌립보서 3장

3장

1-13절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로 통일.

14-21절 교회 공동체의 영적 성숙을 위한 바울의 중보 기도

 

4장

1-16절 교회의 일치를 위한 권면   12절

17-24절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칙

25-32절 그리스도인의 대이웃 관계

 

5장

1-14절 그리스도인의 대 하나님 관계

15-21절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생활에 대한 권면

22-33절 그리스도인 부부 관계에 대한 교훈

 

6장

1-4절 그리스도인 부모와 자녀에 대한 교훈

5-9절 그리스도인 종과 상전에 대한 교훈

10-20절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쟁

21-24절 끝맺는 말

 

빌립보서

빌립보 교회는 유럽 최초의 교회

바울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는 헌금을 모아 에바브로디도가 전달.

그런데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돕던 중 병에 걸려 근심하던 중 회복되어 

돌려보내면서 쓴 편지

 

1장

1-2절 문안 인사

3-11절 바울의 감사와 기도

12-30절 바울의 투옥 해명

12-14절 투옥이 오히려 복음 전파의 새로운 국면

 

2장

1-11절 교회 일치를 위한 권면

12-18절 성도이 성화를 위한 권면

19-30절 디모데의 빌립보 파송 계획과 에바드로디도의 천거

 

3장

1-11절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에 대한 경계

12-21절 반도덕주의자에 대한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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