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이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불려갔다고 합니다.
염라대왕이 생명록을 보니까 이 세 사람은 아직 죽을 사람이 아닌데 저승사자가 잘못 데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염라대왕은 세 사람에게 사과를 하고 ‘자네들은 돌아가서 몇 년 더 살다 와야겠네. 우리가 실수해서 잘못 데려온 값으로 자네들에게 소원 한 가지씩을 들어주겠네, 각자 소원을 말해보게,’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너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가져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염라대왕은 그에게 돈을 듬뿍 주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저는 관원이었는데 평생의 소원이 승진이었습니다. 저를 승진시켜 주셔서 권세를 주십시오”해서 권세를 받았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저는 돈도 권세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저 푸른 초원 위에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사랑하는 사람하고 재미있게 살고 싶습니다”했더니 염라대왕 얼굴이 벌개지더니 “그런 데가 있으면 내가 가겠다”고 호통을 치더랍니다.
요시아라고 하는 유대 랍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잘못된 문제의 대부분은 ‘YES’를 너무 빨리 하고 ‘NO’를 너무 늦게 하기 때문에 생긴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NO’라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말을 빨리 해야 되는데 오히려 NO는 천천히 하고 ‘YES’는 너무 빨리 해 버립니다. 그래서 유혹이 왔을 때에도 ‘NO’라고 재빨리 거절하지 않고 천천히, 이번만은 적당하게 지내려고 하다가 그만 시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상당한 지혜가 담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언제나 시험은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만백성을 구원하시려는 대업을 이루고자 하실 때, 그 분도 먼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당하신 이 시험의 중요한 특징은 4장 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시험을 유혹(temptation)과 시험(test)으로 구분해서 사용하는데 한글 성경에서는 다 시험으로 표시를 합니다.
시험에 대해서 우리가 하는 또 다른 오해가 있습니다.
대개 무슨 일을 잘못해서 혹은 실수를 해서 당하는 일이 있는데 이것은 심판이지 시험이 아닙니다. 내가 돈 관리를 잘못해서 부도가 났다면, 내가 일을 태만히 해서 회사에서 쫓겨 났다면 이것은 심판이지 시험이 아닙니다.
참 시험이란 이런 것입니다. 위대한 일, 착한 일, 선한 일을 하려고 하는데 그 일에 앞서서 우리에게 딱 다가오는 일, 그것이 바로 시험입니다.
왜요? 이제 이 시험을 통해서 목적을 바로 알고, 지혜를 얻고, 능력을 얻어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첫 번째 시험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하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경제에 있다, 고로 넉넉하게 잘 살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경제가 모든 문제의 열쇠다, master key다 하는 시험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돈만 있으면 행복해 지는 것입니까? 돈만 넉넉히 주어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까?
공산주의자들은 내가 가난한 것은 부자 때문이고 내가 못사는 것은 잘사는 사람 때문이다 - 이러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고로 계속해서 ‘혁명’ ‘쟁취’를 외칩니다. 그래서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한 사회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지난 날 칼 막스가 이렇게 외쳤고, 수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이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참 어렵게 배웠습니다. 이것을 공부하는데 많은 것을 투자하였습니다.
공산주의의 두 가지 특징은 가난하다는 것과 감사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중으로 불행합니다. 가난해서 불행하고, 감사할 줄 몰라서 불행합니다. 행복이 무엇입니까?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 찬양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부자 관원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부자는 선한 부자입니다. 세상을 보면 남에게 못할 짓을 해서 돈을 모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 부자는 존경받는 부자였습니다.
게다가 이 부자는 영적인 갈급함을 풀려고 다른 랍비들이 아닌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이 영적인 갈급이 풀리지 않았거든요...
목이 말라본 적이 있으십니까? 목이 마를 때는 콜라나 커피 같은 것으로는 풀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생수로만 풀리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목마름은 돈으로도, 명예로도, 지위로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이 예수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8:22과 같이 답하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이 비유에서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은 이 청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영적인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고민하다가 결국 제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청부가 되어서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마귀가 예수님께 천하 만국과 영광을 보이면서 ‘내게 한 번 절하라, 그러면 이것을 다 주리라’한 것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우리는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 권력, 돈, 세상의 편리함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만 섬기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성경의 일관된 원칙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먼저 구할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항상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다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산상수훈의 결론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또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세 번째 시험은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뛰어내리라’하고 말한 것입니다.
심지어 마귀는 시편의 말씀까지 인용합니다. 시편 91:11, 12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뛰어내리라’ 대체 왜 뛰어내리라고 하는 겁니까?
걸어 내려가도 되는데 왜 뛰어내리라고 하는 겁니까?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기르셨습니다. 그 열 두 제자라는 사람들이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가르쳐서 전도하게 하십니다. 그 다음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참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으로 지루합니다. 그 과정이 답답합니다.
그러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당장에 화끈하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당장, 우리는 이렇게 바랍니다. 시간적으로 급하게, 쉽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무서운 시험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썩어지는 밀알이 돼가지고야 뭐가 되겠습니까? 터벅터벅 걸어다니면서 복음을 전해 가지고야 어느 세월에 무엇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좀 화끈하게 이루려면 깜짝쇼를 해야지요.
그래야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고 ‘와’하게 되어야 뭐가 되는게 아니냐, 그 말입니다. 까딱하면 넘어가기 쉬운 유혹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성전 꼭대기에서 “나를 보시오, 여러분!”하고 훌쩍 뛰어내린다면, 그러고도 무사하다면 사람들이 “와! 참 굉장하다.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다. 위대한 지도자다”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냐, 하는 유혹입니다.
뭔가 특별하게 기적의 사람으로, 초인간으로 나타나라, 그래야 큰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시험입니다.
무슨 일에건 꼭 수고와 희생이 따릅니다. 희생과 수고 없이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수고할 것 없다. 그냥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똑같은 음성이 들려옵니다. 십자가에 내려오라. 왜 매달려 있느냐. 훌쩍 뛰어내리고 ‘놀랐지’하면 간단할 것 아니냐, 그러면 메시야의 나라가 올 것인데 왜 매달려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대로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것이 기적이 아닙니다. 부활의 아침이 기적입니다.
왜 수고하려고 하는가? 복만 받으면 되는 것 아닌가?
기복신앙, 무속신앙이라는 것은 복은 구하지만 도덕성이 없습니다.
무당이 도덕성을 찾는 일은 없습니다. 가령 우리 아이가 이 대학에 꼭 가야 하겠습니다 하면 ‘그러면 공부를 잘 하여야겠구만, 열심히 해’하고 말하는 무당은 없습니다.
‘굿을 해야 돼. 아이한테 살이 끼었으니 살풀이를 해야 돼’ 이런 식으로 나갑니다. 도덕성이 없고, 윤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복만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속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액운이 끼었다느니, 무엇이 잘못됐느니 합니다. 전부가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입니다. 복을 구하면서도 합리성을 무시합니다.
수천 년 이어 내린 우리네 문화이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이러한 무속신앙이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과학적인 세계, 기독교와 맞닥뜨렸습니다. 여기에 굉장한 갈등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커다란 고층 건물을 잘 지어놓고 북어를 딱 매달아 두었습니다. 제가 그 주인한테 물어 보았습니다. ‘저것 왜 달아 놓았습니까?’
‘그래야 무사하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북어대가리입니까?’
대답이 ‘모르겠는데요’합니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야 좋다니까 좋은가 보다 하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 생각은 아니하고, 한다는 짓이 그저 북어대가리 아니면 돼지머리나 갖다놓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의 붕괴가 왜 일어났습니까?
다 법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수대교는 8톤짜리 트럭까지만 지나가도록 설계하고는 50톤 짜리 트럭도 그냥 지나 다녔다고 합니다.
삼풍 백화점도 설계대로 짓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찌 무사하겠습니까? 무사하다면 오히려 이상하지요.
우리 모두 과학적인 신앙을 가질 것입니다. 어리석고 미신적인 사고방식에서 한시바삐 꿈을 깨어야 합니다. 심은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무릇 성실을 심고 번영을 거두는 것입니다. 사랑을 심고 평화를 거두는 것입니다. 거짓을 심고 진리를 거둘 수 있습니까?
불의를 심고도, 악을 심고도 복을 바라는 것이 미신이라는 것입니다.
재수가 좋아야 된다, 운이 좋아야 된다 하는데 이것이 다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수고 없이 형통을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충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뛰어내린다면 죽는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만큼 충분히 알도록 지식을 주셨습니다. 판단력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미 주신 지식과, 이미 주신 지혜와 능력은 다 부인하고 내 수고는 없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축복만 임하기를 바라는, 바로 이런 마음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마음입니다.
예수께서 마귀에게 말씀하십니다. 12절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따라야 합니다. 가라 하시면 가고, 하라 하시면 하고, 희생하라 하시면 하실 것입니다.
심지 않은데서 거두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이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묵묵히 이 길을 순종하고 따라 갈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심은대로 거두리라, 이것이 진리입니다. 수고한대로 그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과학적 신앙입니다.
공짜 좋아해서는 안됩니다. 거저 주어지는 것은 다 화근입니다. 쉽게 되어지는 일은 전부 멸망합니다. 쉽게 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 때문에 우리가 많은 어려움을 치러야 합니다.
뛰어내리라, 그리고 기적을 통하여 쉽게 역사하라고 마귀는 시험하지만,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거부하십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험난한 길을 통하여 만민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장 이루어서 영광을 취하라고 마귀는 시험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비록 당장에 보이지는 않지만 저 먼 훗날에 제자들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이루라고 마귀는 시험합니다만, 주님께서는 아니다, 나는 나의 희생, 내가 지는 십자가를 통해서 큰 역사를 이루겠다 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 말라” 여기에 참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13절을 보면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이것이 오늘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는 고난없는 형통한 삶을 원하지만 예수님께서도 성령에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 나가셨습니다.
사단 마귀의 모든 시험을 주님 주신 말씀으로 이겨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7장
누가는 성경의 저자 가운데 유일한 이방인이며 안디옥에 거주하던 헬라인 의사
1장
1-4절 집필 배경 및 목적을 밝히는 서문
데오빌로, 데오는 하나님, 빌로는 사랑하는 자
5-25절 세례 요한의 탄생 예언 기사, 복음서 중에 유일하게 기록
26-38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언 37, 38절
39-56절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과 찬양
57-66절 세례 요한의 탄생
67-80절 사가랴의 찬가
2장
1-7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8-20절 천사의 찬양과 목자의 경배
21-39절 성전에서의 예언
40-52절 예수의 어린 시절 52절
3장
1-20절 세례 요한의 사역
21-22절 세례 받으신 예수
23-38절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누가는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아담과 하나님까지 거슬려서 기록,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 누가는 헬리, 마리아의 아버지.
4장
1-13절 시험받으신 예수님
14-30절 사역 개시와 나사렛에서의 배척 18, 19절
31-44절 가버나움에서의 전도 사역
5장
1-11절 처음 네 제자의 소명,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12-26절 문둥병자와 중풍병자의 치유
27-32절 세리 레위의 소명, 레위는 본명, 마태는 제자가 된 후의 이름
33-39절 금식 논쟁
혼인집 손님, 새 옷과 낡은 옷,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의 비유
6장
1-11절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 3절 다윗의 예
12-16절 열 두 사도의 선택
17-19절 평지 수훈의 서두, 산상 수훈과 거의 일치
20-26절 두 종류의 사람들,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핍박받는 자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자
27-36절 하나님 나라 시민의 법, 원수를 사랑하라
37-42절 비판하지 말라
43-49절 믿음의 실천
7장
1-10절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
11-17절 나인성 과부 아들의 소생,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사로
18-23절 세례 요한의 질문과 예수의 답변
24-28절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28절
29-35절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 35절 모든 자녀는 세례를 받고 복음을
받아 들인 자,
36-50절 시몬의 집 도유 사건 4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