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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사도행전10: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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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에서는 총기를 등록만 하면 자유롭게 소지할 수 

있어서 참으로 위험한 나라입니다. 심지어 등록하지 않고도 많이들 소지할 수 있는.

이런 미국의 한 가정에 한 밤중에 강도가 들었다고 합니다. 

강도는 권총을 겨누면서 “모두 손들어!”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가족 모두가 벌벌 떨면서 두 손을 들었는데 그 집 주인되는 사람은 한 손만 떡 들었습니다. 강도가 못 마땅해하면서 “두 손 다 들어!”하자 

주인 왈 “강도 선생님 저는 한쪽 팔에 심한 신경통이 있어서 하나밖에 들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강도가 하는 말이 “실은 나도 한 쪽 팔에 신경통이 들었어. 그런데 그게 너무 심해서 회사에서 쫓겨났고 할 일을 못 찾아서 헤매다가 이렇게 강도가 된 거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둘이 마주 앉아서 비오는 날은 더 아프다는 둥, 어느 약이 좋다는 둥 서로 신경통 타령을 했다고 합니다. 

두 어색한 만남, 아니 만나서는 안 될 상태인 둘이 만나서 같은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보면 이런 어색한 관계가 서로 만납니다.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 코넬리우스, 점령군 장교, 백부장입니다. 

베드로는 피점령지의 초라한 어부입니다. 평민입니다. 

이런 고넬료라고 하는 백부장과 베드로가 만납니다. 

사회적 지위로 말한다면 고넬료와 베드로, 이건 얘기가 안됩니다. 

만날 이유도 없고 어쩌면 한평생 안 만났으면 좋겠다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두 사람이 만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는 이방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비록 우리는 이렇게 어렵게 살아가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너희같이 우상이나 섬기는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라는 종교적 우월감이 있었습니다. 

자, 이 두 어색한 관계의 사람들이 서로 만나게 됩니다. 

왜? 공통적으로 느끼는 관심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두 사람이 다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베드로야 물론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특별히 로마 사람인 이 고넬료도 정치적으로는 이 땅을 지배하고 있지만 종교는 유대종교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정치적 우월감, 교만감 다 버리고 피점령국가의 그 종교를, 그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2절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경건한 유대 사람의 신앙생활을 그대로 따라서 사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이 두 사람이 다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고넬료도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는 사람이요 베드로도 비록 여행 중에 있더라도 정해진 시간에는 지붕 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만나는 법입니다. 정말로 깊이 기도하다 보면 기도하는 사람끼리는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보면 이 두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인도를 받아서 둘이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기도 응답 중에 받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로마 사람의 집에 들어가면 안됩니다. 

28절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더구나 로마 군인 집인데 들어가서 숙식하고, 안됩니다. 

유대인들의 생활풍습과 전통에 따라서는 절대 그리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니까 따릅니다. 

내가 가라면 가고 내가 만나라면 만나거라, 그것입니다. 

모든 규례와 법도와 생활습관, 제도를 다 초월해서 기도에 주신 말씀대로 순종합니다. 고넬료 역시 그렇습니다. 기도하던 중에 지시를 받습니다. 

‘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는 저 베드로란 사람을 청하라’ 

무작정 가서 청합니다. 말씀에 순종합니다. 

두 사람이 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다 같이 기도 응답받은 대로 순종하다 보니 생전에 만날 일도 없을 것 같았던 사람들도 이렇듯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 뜻 안에서 만나게 되고 마음을 열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고집이 있고 자기만이 옳고 

남의 말은 안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입니다.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반대로 또 타인종속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건 또 항상 예스맨입니다. 무조건 그저 남의 의견만 따라합니다. 

나는 없습니다. 쉬운 말로 ‘눈칫밥 먹고 자란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무조건 ‘예’합니다. 이렇게 되면 날로 비굴해지고 허약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신앙적 인격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임재 의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사람을 봅니다. 기도 응답을 받고 비로소 오늘을 삽니다. 

골로새서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그래서 ‘주께 하듯’ 합니다.

사장님에게도 ‘주께 하듯’, 아내에게도 주께 하듯, 남편에게도 주께 하듯, 주님을 대하듯이 이웃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을 생각하고 주 앞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동서의 세계를 하나로 만들려고, 쉽게 말하자면 세계 정복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큰 꿈을 품고 마게도냐를 떠납니다. 그런데 떠날 때 국고를 열어 오랫동안 모아왔던 금은보화를 그의 부하들과 그 식구들에게 다 나누어줍니다. 

그럴 때 나라의 살림을 맡아 하는 분들이 깜짝 놀라서 “이렇게 왕의 창고가 비면 나라가 어떻게 됩니까? 왜 이렇게 하십니까?”

“나에게는 나만이 아는 희망이라는 보물이 있다”

손에 있는 것을 보고 사는 사람,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사는 사람, 그것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위대한 인물들은 다른 사람 못 보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지도자입니다. ‘나에게는 희망이라는 보물이 있다’ 

그리고 마게도냐를 떠나 세계 정복의 길로 나아갑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고넬료라는 사람, 그는 이방인이지만 온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구제하고 시간에 맞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참으로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이라고 하는 우월감, 로마 군인이라고 하는 자기 신분 다 극복해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신분이 어떻습니까? 재산은 어떻습니까? 지식은 어떻습니까? 이 시간 툭툭 털어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아주 깨끗한 마음으로 경건을 찾아갑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 성도의 교제 속에는 아무 것도 거치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돈이 있건 없건, 학벌이 높건 낮건, 양반이다 뭐다,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것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성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가로 막는 것을 뛰어 넘어야 신앙이 자랍니다.  

그래서 교회를 오래 나와도 신앙의 성장이 없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초라한 어부입니다. 

한 번 상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로마 군인, 그 화려한 훈장을 달고 사는 백부장이 여기 있고 초라한 갈릴리 어부 한 사람, 남루한 옷을 입고 어정어정 걸어 들어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상대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베드로를 만나는 순간에 하나님을 대하듯이 대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 믿습니다. 그래서 그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아무리 잘난 척을 좋아하고 우쭐하는 베드로이지만 ‘나도 사람이오’ 26절 

자, 보십시오. 지금 고넬료가 누구를 보고 절하는 것입니까? 그의 마음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베드로가 눈 앞에 있지만 베드로를 본 게 아닙니다.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을 뵌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내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렇게 엎드렸단 말입니다.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보내주신 분, 이렇게 정성껏 맞이했습니다. 일가친척까지 다 모아놓고 하는 말이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말씀하십시오. 듣고자 합니다. 여기에 판단은 없습니다.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듣고 순종하는 게 아니라 순종 먼저 하고 말씀하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우리는 이걸 알아야 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앞에 놓고 이제 말합니다.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무슨 말씀이든지 하십시오.’

그리고 성경을 읽어보면 베드로가 이제 설교를 합니다. 별로 긴 설교 같지는 않습니다. 사실은 말도 잘 안 통하거든요. 베드로는 아람 말을 하고 고넬료는 라틴어를 합니다. 말도 통역 없이는 통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제가 중국에 가서 중국 사람들을 모아 놓고 통역을 놓고 강의를 해 본 적이 있는데 참 힘듭디다. Zoom 예배.

44절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성령이 내려 오시니 통역없이 다 알아듣게 됩니다. 

이래서 사도행전 10장을 ‘이방인의 오순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잘한다 못한다가 아닙니다. 무슨 말을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으로 통합니다. 성령이 통역을 해 줍니다. 그래서 오늘 고넬료의 가정에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벽에 부딪칩니다. 이제는 끝이라고,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도록 끝입니다.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을 넘어서는 것이 믿음이요 마지막을 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이것으로서 끝이다, 할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시작을 하십니다. 인간 궁극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끝났다는 말 쉽게 하지 마십시오. 인간으로서는 끝이로되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일이 있습니다. Here and Now.

여러분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의 사람이라면 모든 사건이 주의 뜻 안에 있고 모든 역사가 주님의 섭리 속에 있고 내게 일어나는 일 전부가 기도 응답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라는 바로 그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바른 신앙으로 이 진리와 불의가 혼재한 이 세상을 하나님 주시는 능력으로 잘 헤쳐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3-9장

3장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세례식

1-12절 회개를 외치는 세례 요한     세례 요한은 말라기 4:5-6에 의해 

예언된 바 선지 엘리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17절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4장

1-11절 사단의 시험과 예수님의 승리

12-17절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18-22절 예수님의 처음 네 제자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

23-25절 예수님의 갈릴리 초기 사역 

 

5장 산상수훈, 천국 시민의 새로운 법

산상수훈은 진리와 불법이 혼재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성도들이 

지켜야 할 가장 차원높은 윤리적, 종교적 기준들을 제시한 것.

1-12절 산상수훈 서문과 팔복

13-16절 세상의 빛과 소금인 성도

17-20절 율법의 완성자인 예수님

21-48절 예수님의 새로운 교훈들 

 

6장 산상수훈

1-18절 종교적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

19-24절 재물의 올바른 사용법

25-34절 하나님 나라 시민의 가치 기준

 

7장 산상수훈

1-6절 비판하지 말라.

7-11절 응답받는 기도의 자세

12절 황금율  율법이요 선지자, 구약을 가리키는 관용적인 표현

13-14절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

15-29절 실천적인 믿음

 

8장 백부장의 종을 치유하신 이적과 풍랑을 잠잠케 하신 이적 및 

가다라 축사 사건

1-17절 예수님의 치유 이적, 나병 환자, 백부자의 하인, 베드로의 장모

18-22절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자세, 핑계

23-34절 권능을 행하신 예수님

 

9장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마태를 부르시고, 한 관리의 딸을 고치시고,

혈루증 여인, 두 소경,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다.

1-8절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9-13절 마태의 소명

14-17절 금식에 관한 논쟁

18-34절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 혈루증 여인을 고치신 사건, 

두 소경이 눈을 뜨게 하신 사건, 귀신들려 벙어리된 자를 고치신 사건

35-38절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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