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생이란 계속적으로 선택하며 결단하는 것입니다. 선택과 결단의 긴장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 중에서 부득불 하나만을 선택해야 합니다. 또한 그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 여타의 것들은 다 포기하는 결단도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26장 3절을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라고 합니다. 심지가 견고한 사람의 마음 속에 평안이 있습니다.
흔들리는 마음에는 언제나 불안이 따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결정을 해야 하는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완벽한 결정을 내리기는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고로 어느 순간까지, 어느 달 어느 날 몇 시까지만 걱정하기로 하자, 하고 딱 정하고 말아야지 한평생 이럴까 저럴까 해서는 곤란한 것입니다.
학생들을 보니 이 대학을 갈까 저 대학을 갈까, 시험당일까지 걱정을 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입학시험에서 앞에 번호 사람들의 합격률이 뒤 번호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높다는 것입니다. 결혼에 있어서도 어느 순간에는 한 남자, 여자를 골라야 합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따르려면 끊어버려야 할 것이 많습니다. 골프치러 갈까 교회갈까 하다가 ‘나는 주일은 안돼’ 딱 끊어버리셔야 합니다.
이러한 결단이 없이 신앙생활 못합니다. 여기도 좋게, 저기도 좋게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이 세대가 흔들리는 겁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아 그럴거야, 그래 맞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멘’을 백번하면 뭐합니까? 문제는 여기에 운명을 걸어야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에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감상적인 생각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분명한 결단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훼퍼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값싼 은혜를 구하는데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 희생의 값은 지불하지 않고, 오로지 싸구려 은혜만을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때로는 헌신을, 때로는 인내를, 때로는 겸손을, 때로는 희생을 요구하십니다.
자기 희생 없이 되어 진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작은 일이건 큰일이건 간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결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요구에는 단 한 마디도 응답하지 않고 싸구려 은혜만 구하고, 그것만을 달라고 소리지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어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내게 비장한 선택과 비장한 결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에스더가 중요한 결단을 해야 하는 시점에 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아서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 간 때였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하여 망하고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을 때입니다.
이 에스더라는 여자는 아버지 어머니가 안 계셔서 사촌오빠인 모르드개가 자기 딸처럼 키운 처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용모가 아름답고 단정해서 발탁되어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가 되게 됩니다.
노예 신세에서, 고아 신세에서 왕후가 되었습니다. 팔자가 열렸습니다.
이렇게 됐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아말렉 족속이 등장합니다. 행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르비딤에서 싸운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팔을 들면.
그 아말렉의 후손인 하만의 간계에 넘어가서 왕이 잘못된 결정을 하는 바람에 온 유대인들이 하루아침에 몰살되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왕후로서 에스더가 왕의 실수를 바로 잡기 위하여 왕에게 들어가서 그래서는 안됩니다, 라고 하는 것을 간해야 되겠는데 이게 위험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이거 자기밖에 할 사람이 없는 거 같은데.
오늘 성경 11절이 이걸 자세히 말해줍니다. 이 왕은 아주 정말 옛날에 전제군주기 때문에 뭐 생사권을 손에 쥐고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왕의 허락 없이 안뜰에 들어서면 그대로 목을 치게 되어있어요, 누구든.
그런데 허락 없이 들어올 때 왕이 그를 기쁘게 보아서 홀을 들어주면 살지만은 만일에 그렇지 못하면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위험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에스더가 고백하는 대로 벌써 30일 동안이나 왕의 부름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순간에 그는 중요한 결단을 해야 하게 됩니다.
모르드개는 그에게 강하게 말합니다.
14절,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굳이 에스더를 통하지 않고서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구원해 주실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사람인 하만은 그들을 몰살시키고자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보호하신다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아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언약만 확실하다면 우리는 그 언약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흔들리고 다 나에게 등을 돌리는 것 같지만 사람을 믿는 우리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언약을 가슴에 품고 다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이제 에스더가 할 일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하는 것 뿐 이었습니다. 영광의 순간에 참여하느냐? 아니면 딴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말 것인가? 이게 ‘자유의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봉사.
그리고 말합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왕후가 된 것이 바로 오늘을 위하여, 바로 이 순간을 위하여, 바로 이 사건을 위하여 예비된 일이 아니겠느냐, 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오늘은 어떻습니까? ‘바로 이 순간, 내 앞에 놓여있는 이 사건을 위하여 내가 세상에 존재한다’ 라고 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가장 성공적이고 가장 용기있는 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과거에 잘한 일도 있고 못한 일도 있고, 실수한 일도 있고, 무엇인가 운명이 잘못된 것 같은 그런 과거가 있겠지만은 이제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과거가 있어서 오늘 내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이라고 하는 현재를 그 과거가 만들어낸 것이요. 그 과거에 의해서 오늘 내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는 현재 속에 그 의미가 살아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라고 하는 것도, 오늘 현재의 연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점치는 사람들의 심정은 미래를 알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미래는 내가 지금 어떻게 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현재와 관계없는 미래가 하늘로부터 덜렁 떨어지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저 밝은 미래는 오늘 이때 우리의 자세에 우리의 할 일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45장을 보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이 자기 형님들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난날, 형님들은 열일곱살 난 동생 요셉을 팔아먹었습니다.
그것도 처음에는 죽이려고 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팔아먹은 것입니다.
갖은 고생 끝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세월이 흘러, 애굽왕 바로의 꿈이 요셉이 해몽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애굽은 물론 다른 온 나라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요셉의 형님들은 양식을 구하려고 애굽으로 오게 됩니다. 애굽의 총리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런데 자 앞에 있는 총리가 누구입니까? 자기들이 노예로 팔아먹은 요셉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저들은 벌벌 떱니다.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 45:5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여러분, 요셉은 자기가 팔린 것이 아니라 보냄을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현실관입니다.
사실 형들은 그를 분명히 팔아먹었고 그는 팔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팔려온 자로 살지 않았습니다. 보냄받은 자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받아들이는 현실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처지에 놓여 있습니까? 내가 처한 현실이 어떻습니까?
그저 팔자와 운명이 기구해서 그렇게 살아갈 뿐입니까?
할 수 없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팔려가는 생도 아니고 끌려가는 노예도 아닙니다. 보냄받은 사명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사명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말합니다.
창 45:8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나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이지 당신들의 손으로 팔려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당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너무나 아름다운 시구입니다. 국화꽃은 가을에 핍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국화 꽃 한 송이를을 피우기 위해서 봄이 있었고, 그 긴긴 여름이 있었고,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던 것 같다, 라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 현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피안의 세계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을 떠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현실에 관심을 갖고, 현실에 대하여 적극적 자세로 임하며, 현실의 의미와 목적을 앎으로써 우리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우리 인생의 어려움을 같이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오늘 예배에 출석하신 여러분들께 묻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마음에 어려움을 안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남이 모르는 좌절감과 열등감으로 씨름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런 어려움과 좌절감과 열등감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 믿어 봐야 나에게 그렇게 유익이 되지 못한다. 내 신앙생활이 나의 고민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한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계십니까?
내가 어려울 때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믿음이라면 왜 내가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이 해답이 될 것입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그분을 꼭 붙드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우리를 꼭 도우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께 펼쳐 놓은만큼 해결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비밀이 많으신 분들은 그 고민을 다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힘 빼고 맡기셔야 합니다.
오늘 에스더는 이렇게 결단합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그 시간 다 포기했습니다. 명예고 지위고 뭐고.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들어갑니다. 여기에는 이성적 판단도 없습니다.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이다 하는 순간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오늘도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에스더는 이 믿음과 이 신앙 안에서 새로운 결단을 합니다.
나를 버리고, 죽으면 죽으리이다 다짐합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사람들은 무엇을 이루었는가?를 가지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내게 주신 날들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순간 순간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같은 사도는 한 번의 설교로 수천 명을 주께로 돌아오게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같은 사람은, 한 차례 설교를 하다가 돌에 맞아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그의 설교로 인해서 감화를 받고 예수를 믿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돌맹이만 날아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을 그렇게 사용하시기를 원하셨고, 베드로 또한 그들 나름대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세워두신 그 자리에서 나에게 허락하신 그것들 속에서 하루 하루, 순간 순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실존의식을 가진 자들만이 에스더와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에스더도 아니고 요셉도 아닙니다. 그러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의 현실도 오늘 내가 당하는 현실만큼 절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도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향하여 지금도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바른 선택, 바른 결단이 있을 때에 바로 당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펼쳐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