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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고할 때에 (역대하 28: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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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의사와 건축가와 정치가가 한 자리에 모여서 서로 자기 직업이 

가장 오래되고 고전적인 직업이라고 자랑하면서 입씨름을 벌였습니다. 

의사가 먼저 이렇게 주장합니다. “인간 역사는 외과수술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이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들어내고 그것으로 하와를 만들었던 일은 바로 외과 수술에 해당되는 것이다.”  

건축가가 이 말을 듣더니 반박했습니다. “아담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아름답게 창조하신 것은 설계행위이고 건축행위다. 그러므로 창조가 의료행위보다 앞서 있다” 

그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정치가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결정적으로 

종지부를 찍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창조 이전은 정말 완전한 혼돈상태였지요. 그렇다면 세 분께서는 이 혼돈과 혼란을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혼란 상태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바로 우리와 같은 정치가 밖에 없지요” 

정치란 원래 이 땅에 질서와 조화와 풍요를 바르게 세우기 위한 것인데, 질서와 조화를 세워야 할 정치가 무질서와 타락을 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제가 느끼는 심정입니다. 신중하게 판단을 해서 

대한민국을 잘 이끌어 나갈 후보를 뽑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그래서 한자 사람 ‘인’(人)자는 서로가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형상입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나에게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나에게 도움을 주는 그 사람에게도 도움은 필요한 것입니다. 상호 도와주어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의 도움이나 세상의 그 어떤 도움도 불완전하고 제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가장 확실한 도움은 하나님의 도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결코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님을 제쳐놓고 엉뚱하게 세상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먼저 바뀌는게(brain wash)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로. 

 

오늘 성경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제쳐놓고 세상만 의지하다 실패한 인생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유다의 제12대 왕, 아하스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사울, 다윗, 솔로몬의 통일왕국시대가 있었고, 솔로몬 사후 솔로몬의 뒤를 이은 르호보암이 왕이 되어 실정을 하는 바람에 

BC 930년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그 후 북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남 유다는 BC 586년에 바벨론에게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스라엘이란 단어는 두 가지로 사용됩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언급할 때도 있고, 반쪽인 북 이스라엘을 언급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한국이란 말을 남북한 전체를 언급할 때도 사용하고, 남쪽만 언급할 때도 사용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하스는 남 유다 왕국의 제12대 왕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과 짝했기 때문에 자기 인생도 망치고 나라도 망치고 말았습니다.

세상과 짝하면 세상이 제 편이 되어 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가서 보니까 모두가 등을 돌려버립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좋을 때 좋은 겁니다. 

내가 좀 잘 될 때에는 사람들이 주위에 밀물처럼 모여듭니다. 

반대로 내가 조금 어려워지면 마치 썰물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배신은 인간의 기본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번 관계를 맺으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항상 함께 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한 마디로, 신실하신 분입니다. 

흔한 표현으로 말하면, 의리가 있는 분입니다. 

민수기 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그러면 어떤 인생이 가장 복된 인생일까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인생이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줄기차게 이것을 증명합니다.  

신명기사관이 이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형통하고 하나님과 가까와지고, 불순종하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인생이 힘들어지고. 

오늘 말씀의 주제도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꼭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아하스 왕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나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대하 28:1-2 보시면 “아하스가 왕 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2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성경에서 선한 왕을 표현할 때, 다윗의 길로 행하였다고 하며 악한 왕을 

표현할 때는 여로보암의 길로 혹은 이스라엘 왕의 길로 행하였다고 합니다.

다윗의 길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신앙의 길이고, 여로보암의 길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숭배하는 불신앙의 길을 가리킵니다. 

다윗의 길을 갔던 왕은 모두 형통했으나, 이스라엘 왕의 길을 갔던 왕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아하스도 그랬습니다. 

 

아하스가 계속 하나님을 거역하자 참고 참으시던 하나님께서 결국 진노하십니다. 남 유다 왕국에 하나님의 징계가 임합니다. 고난의 연속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여러 모양으로 다가오는데 먼저 전쟁으로 닥쳤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싸고 있던 국제 정세는 마치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남북이 분단되어 있고, 주변의 열강들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과 북이 열강들과 동맹을 맺고,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먼저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함께 남 유다를 침공합니다. 

그 내용이 대하 28:5-7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5 그러므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이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쳐서 크게 살륙하였으니 6 이는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유다에서 하루 동안에 용사 십이만 명을 죽였으며 7 에브라임의 용사 시그리는 왕의 아들 마아세야와 궁내대신 아스리감과 총리대신 엘가나를 죽였더라” 

‘그러므로’ 이 말은 “아하스의 우상숭배로 인해” 그런 뜻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 베가의 군대가 무려 12만 명을 살육하는 비극이 벌어졌고,  20만 명의 포로를 끌고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는 아하스에게 하나님께서 계속 징계를 내리십니다.  이번에는 에돔과 블레셋이 침공해 옵니다. 본문 17-19절을 보시죠. 

“17 이는 에돔 사람들이 다시 와서 유다를 치고 그의 백성을 사로잡았음이며 18 블레셋 사람들도 유다의 평지와 남방 성읍들을 침노하여 ... 점령하고 거기에 살았으니 19 이는 이스라엘 왕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여호와께 크게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유다를 낮추심이라”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말씀이 바로 

“하나님께서 유다를 낮추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유다에 내린 모든 환란의 원인이 바로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아하스 때 남유다는 북이스라엘과 아람 사람들에 의해 징계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지만, 하나님의 긍휼로 다시 돌아오는 은혜도 입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징계와 긍휼을 경험한 후에도 아하스는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계속해서 에돔이 와서 공격하고, 블레셋이 침노하여 아예 유다의 여러 마을에 진치고 살았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는 아하스가 망령되이 행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하스가 우선해서 해야 할 일은 바로 망령된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해결의 지름길 입니다.  

 

내게 허락하시는 환난과 문제는 하나님 앞으로 나오도록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커다란 문제를 만났을 때 누구 때문인지 묻기보다 나를 먼저 돌아봐야 합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탓하기보다 이런 문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내게 닥친 곤경과 위기는 오히려 은혜의 기회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계속 하나님에게서 엇나갑니다. 16절 보세요! “그 때에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와주기를 구하였으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엎드려야 하는데, 반대로 하나님에게서 멀리멀리 떠나갑니다. 

외세의 도움을 구합니다. 당시 강국인 앗수르에게 원병을 요청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나요? 앗수르가 순순히 도와줘서 위기를 모면했나요? 승리했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20절-21절을 보십시오. “20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그에게 이르렀으나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공격하였더라 

21 아하스가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방백들의 집에서 재물을 가져다가 앗수르 왕에게 주었으나 그에게 유익이 없었더라” 

앗수르 왕에게 와서 도와달라고 했더니 와서는 오히려 공격합니다. 

심지어 앗수르 왕에게 아하스가 뇌물을 바쳤는데 유익이 없었다고 성경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왕궁에서, 방백 관리들의 집에서 공출해서 몽땅 바칩니다. 그러고도 당한 겁니다. 

그런데요, 아하스의 태도를 보세요. 22절입니다.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고난 가운데 더욱 범죄합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오라고 말씀하시는데, 아하스는 더욱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심지어 다메섹 신(아람의 우상 신)에게 제사합니다. 백성들이 신앙 생활을 방해합니다. 각 성읍에 우상을 세웁니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촉발했습니다. 25절(하).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더라” 

아하스만 이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렇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살다가 하나님 앞에 잘못 할 수 있습니다. 

연약해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히 돌아와야 합니다.

요엘 2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해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영원히 기다려주시지는 않으십니다. 물리학에서 탄성한계라는 게 있습니다. 금속에 힘을 주면 늘어납니다. 힘을 빼면 다시 복원됩니다. 그런데 힘을 너무 많이 주면 복원되지 않습니다. 복원될 수 있는 범위를 가리켜 탄성 한계라고 부릅니다. 

용수철을 예로 생각하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용수철을 힘을 주어 당기면 늘어나죠. 다시 놓으면 복원됩니다. 그런데 탄성 한계를 벗어날 만큼 힘을 너무 세게 주면 늘어난 것이 복원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실수 할 수 있고 잘못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 앞에 나아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고 게다가 축복까지 해 주십니다. 

그런데 계속 고집을 부리고 회개치 않은 채 고질화되면 죄 가운데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가룟 유다는 지난 날의 잘못된 것을 후회했습니다. 후회하고 스스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제 힘으로 해결해 보겠다고 애쓰다가 절망하고 자살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엄청난 실수를 범했습니다마는 

회개하고 그 문제를 예수님께로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회개와 후회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후회는 비극적, 절망으로 끝나지만 회개는 구원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하스는 인생을 치욕적으로 마감했습니다. 대하 28:27 

“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이스라엘 왕들의 묘실에 들이지 아니하고 예루살렘 성에 장사하였더라 ... ” 

얼마나 백성들의 원성이 컸던지 죽어서 왕의 묘역에 들어가지 못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어떻게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아하스처럼 하나님을 멀리한 채 

인간적으로 기를 쓰고, 세상만 의지하다가 실패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 하다가 다윗처럼 승리하시겠습니까? 

때때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을 의지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오히려 고립무원이 됩니다. 조심해야 됩니다. 요즘처럼 사방이 뒤숭숭할 때는 세상이 더욱 두려워지고 세상 염려가 밀려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께 집중해야 됩니다. 

그게 진정 승리의 길입니다.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흔들리는 이 세상 속에서 변치않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헌신하며 살아감으로 풍성한 승리의 축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79-90편

 

79편 바벨론의 침공으로 인한 예루살렘 멸망 및 성전 파괴를 그 배경으로 지은 시로 하나님께 민족의 구원을 호소한 민족 애가입니다. 

 

80편 요셉의 두 아들은 므낫세와 에브라임,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대표.

앗수르의 침략에 의한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배경으로 한 민족 애가.

 

81편 초막절이나 유월절과 같은 절기를 맞아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보호와 은총을 잊지 말고 기억할 것을 요청하는 시. 10잘

 

82편 불의한 재판장들에 대한 고발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적 공의의 실현을 염원하고 있는 시. 

 

83편 에돔을 비롯한 10개국의 이방 동맹국들이 여호사밧 통치 하의 유다를 침공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쓰여진 시. 

 

84편 이스라엘의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 떠난 순례자가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여 지은 찬양시. 11절.

 

85편 바벨론으로 잡혀 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귀환하게 된 데 대한 감사시. 

 

86편 다윗이 사울의 위험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께 호소하며 구원의 은총을 간구한 시. 5절 이하.

 

87편 예루살렘 성전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해 절망에 빠지자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주기 위하여 지은 시온시.

 

88편 ‘마할랏르안놋’의 뜻은 질병 중에, 고통 중에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여 지은 시. 

 

89편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다윗에게 언약하신 대로(사무엘하 7:8-16)

이스라엘의 영원한 통치자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시. 15절 

 

90편 유일한 모세의 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적 행동으로 저들 모두가 광야에서 진멸되리라는 하나님의 진노의 선고가 있을 때 당시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지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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