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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있는 사람(시편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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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이 지나가고 우리는 지금 2022년이라는 강 앞에 서 있습니다. 

강을 건넌다는 것의 의미는 때로는 정신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때로는 역사적으로 큰 전환점을 통과하게 하는 경우도 벌어집니다.

줄리어스 시저가 갈리아 지방 정복에 출정했던 자기 휘하의 군단을 이끌고 로마를 향하여 진군해오다가 루비콘 강을 만납니다. 

생과 사가 걸려 있는 그 중차대한 기로에서 루비콘 강을 바라보던 시저는 저 유명한 말,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외치면서 자신이 제일 먼저 말을 몰고 강물 속으로 뛰어 들어서 건너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일단 그 강을 건너간 순간, 그의 인생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한 장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저희도 이미 2022년이라는 강에 뛰어든 것입니다.

이제는 승리를 향해 힘차게 달려 가야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푯대를 향하여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합니다. 

이 말은 ‘디오코’ 즉 온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뛴다는 뜻입니다. 

운동선수가 경기장에서 뛰는 모습을 가리킨 것입니다. 생각도 마음도 모든 힘을 모아서 앞으로 기울이고 달려가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달릴 때는 뒤도, 옆도 안 보이고 저 끝에 있는 푯대만 보여야 하는데 볼 것이 많은 선수들은 목표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여러분! 무슨 이야기입니까? 목표를 한 번 정했으면 온 힘과 온 정열을 다해서 뛰어야 합니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뛰어야 하는 것입니다. 

 

2022년도 새해에는 목표가 내게로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맙시다. 

내가 목표를 향해서 뛰어가야 합니다. 

세상이 내게로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맙시다. 

내가 세상을 향해서 뛰어가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희생해주고 새로운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맙시다. 내가 희생을 하여야 내 앞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법입니다.  

 

한 해를 시작하는 이 아침 주님과 더불어 벅찬 기대와 소망을 안고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기로 합시다. 하나님은 오늘 이 아침에 우리 모두에게 찾아와서 ‘이제 우리 새롭게 다시 시작해 보자!’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너는 끝났어. 네까짓게

그러나 새 언약의 백성인 우리들은 언제나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넘어졌어도 아무리 망가졌어도 아무리 실수를 많이 했어도,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말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 속에는 시작하기 전 결정에 대한 갈등과 고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시작을 했다는 것 자체가 큰일을 해 낸 것입니다. 

이제 다시 믿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2022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실로암.

 

올해는 정말 우리 새하늘 교회 모든 형제, 자매님들이 행복해지는 그런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행복이라는 단어가 나하고 얼마나 관계가 있는지 어디 한 번 진지하게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분들이 뭐만 되면, 뭐만 이루어지면 행복해 질 것이라고들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시험만 합격하면, 돈이 많아지면. 

분명한 것은, 이러한 여건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환경이나 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여건 속에서도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복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인간 존재 자체와 그 인격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된 사람’이 핵심인 것입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겨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겨울이 좋다. 쨍하게 코끝 시린 날도 좋고, 흰 눈을 볼 수도 있어서 

겨울이 좋다” 봄이 오면 또 이렇게 말합니다.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피고 따뜻하니 봄이 좋다” “초목이 우거지고 활기에 넘치는 여름은 또 그 나름대로 좋다. 하지만 풍성한 열매 맺는 가을도 좋다” 

이런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봄이 되면 꽃샘추위도 싫고 노곤해서 싫다. 여름이 되면 덥고 땀이 나서 싫다. 가을이 되면 처량하고 허무해져서 싫다. 겨울은 추워서 싫다” 

이런 사람은 겨울이면 어서 여름이 왔으면, 여름이면 어서 겨울이 왔으면 하는, 어디에 가져다 놓아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느 때, 어느 여건에 처해도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행복할 수 있는 여건이 따로 있습니까? 

행복한 사람은 여건에 관계없이 항상 행복합니다.  

일이 생기면 기회가 주어졌다고 좋아하고, 혼자일 때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고 좋아하고, 건강하면 일할 수 있다고 좋아하고, 병들면 조용히 기도할 시간이 주어졌다고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복의 문제는 복된 사람의 문제이지 복된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금년을 어떻게 살아가실 작정이십니까? 

어렵고 곤란한 일 살살 피해가면서 기회주의자처럼 살 것입니까? 

아니면 이 사람 저 사람 원망하며 살 것입니까? 

2022년에는 그러지 맙시다. 부동자세로 서서 누가 나에게 복을 갖다주기를 바라고, 복된 여건이 와 주기를 바라면서 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아담과 하와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에덴 동산처럼 좋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들이 복된 사람들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낙원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실낙원.

하지만 요셉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가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갖가지 어려운 일을 당하지만 그는 묵묵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서 그를 애굽의 국무총리로 삼아 주십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말씀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있는 사람의 환경이 전혀 복스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 생각 같아서는 복된 사람의 환경이란, 악인도 없고 죄인도 없고 유혹도 없고 교만한 사람도 없는 곳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의 성경 본문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복된 사람은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사람들 속에 그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 시편 1편은 “복있는 사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복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여기서 복있는 사람의 문제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고, 여건의 문제가 아니고, 소유의 문제가 아니고 이렇게 시작됩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이렇게 말씀을 시작합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한다’는 말을 히브리 원문대로 보면 ‘걷지 아니한다’라는 뜻입니다. do not walk. 악인들의 꾀를 따라서 걷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do not stand.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do not sit.

악인과 함께 가지도 않고, 악인과 함께 서지도 않고, 악인의 무리에 섞여 앉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복이 넉넉하니까요. 복있는 사람은 자기 복과 행복에 충만한데 악인의 꾀를 따를 까닭이 없습니다. 가끔 스스로 속았다고 탄식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내가 속았다’하며 억울하다, 분하다 하지만 억울할 것도 없습니다. 

왜 속았습니까? 속인 사람도 잘못이지만 속은 죄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욕심이 있으니까 속았습니다. 유혹에 빠진 것은 소극적으로 말해서 거기 빠지게 될 수 밖에 없는 허점이 내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내가 넉넉지를 못했습니다. 

내 행복으로 충만하다면 악인의 꾀를 좇을 이유가 없습니다. 

내 행복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면 악인의 꾀에 빠질 필요도 없고 죄인의 길에 서서 서성거릴 필요도 없고 오만한 자와 같이 앉아서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왜? 내 행복으로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넉넉한데 뭐가 답답해서 죄인의 길에 선단 말입니까?

이것이 복의 소극적인 면입니다.

 

적극적으로는 본문에 보는 대로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이제 행복관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즐거워하는고 하니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율법을 사랑하고 율법 듣기를 즐거워합니다. 

하나님 말씀 듣는 것, 설교 듣는 것, 예배 드리는 것, 이것이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주일 이 시간에 가고 싶은 데가 많을 것입니다. 

마지못해 나온 것도 복되지만 그러나 거기보다 예배드리는 이 곳이 더 행복합니다. 그래서 여기 나왔습니다. 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이 행복을 아는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복된 사람이다. 그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또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한다고 하였습니다. 묵상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딴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받았다고 합시다. 남들이 볼 때에는 

하찮은 것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준 선물이니 썩 기분이 좋습니다. 

이걸 볼 때마다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 사람이 생각이 납니다. 

이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사람 가운데는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만 하면 괴로우니까요. 

생각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명상을 합니다. 

하루 종일이라도 가만히 생각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 생각만 해도 좋은 것입니다. 

이 생각 속에서 즐기는 이것이 인간적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있으면 그 속에서 내게 주신 은혜가 생각납니다. 내게 주신 약속이 생각납니다. 바로 이것이 묵상입니다. 

말씀이라고 하는 프리즘을 통하여 우리는 무한한 세계를 바라봅니다. 

앞으로 주실 하나님의 축복을, 요단강 건너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를 환하게 바라다 보는 것입니다. 

묵상할 때 여기서 지혜가 생기고 능력이 생기고 활력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초월합니다. 

자기 욕심, 자기 약점, 자기 나약함을 다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금년에도 과거가 그랬듯이 앞으로도 깜짝깜짝 놀랄 일이 계속될 것입니다. 놀랄 것 없습니다. 그렇게 역사는 흘러 왔습니다. 

다만 우리는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스스로 복된 사람이 되도록만 힘쓸 것입니다. 내가 복있는 사람만 되면 어디 가서 어떠한 환경에 놓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고, 나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복된 자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월 2일 성경 일독

 

시편은 ‘찬양의 책’이란 뜻으로서 총 150편의 시들은 1,000년 이상의 오랜 세월에 걸쳐, 시대와 지역을 달리하는 수십 명의 저자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각각 모두 다 그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여호와와의 관계 안에서 체험한 

다양한 신앙의 교감을 노래한 책입니다.  

 

7-25편

7편 공의의 실현을 구하는 다윗의 기도시

8편 다윗의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감사 찬양

9편 공의에 입각한 여호와의 구원 찬양

10편 저자 미상, 악인의 횡포 고발과 가난한 자의 구원 호소

11편 여호와의 구원에 대한 확신 선언

12편 거짓이 만연한 세태에서의 구원 호소

13편 악한 원수들로부터의 구원 호소

14편 무신론자의 타락과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 선언

     악인들의 악행이 근본적으로 그들의 무신론에서 비롯.

15편 주의 장막에 거할 자

16편 죽음을 초월한 의인의 확신과 기쁨

17편 압제하는 원수로부터 구원을 호소하는 다윗의 비탄시

18편 다윗의 즉위 감사

19편 여호와께 온 영혼이 열납되기를 바라는 자

20편 암몬, 아람 연합군과의 정복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출정시

21편 정복 전쟁의 승리를 감사하는 개선시

22편 메시야의 수난과 영원한 승리의 예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

24편 법궤의 예루살렘 안치에 즈음한 다윗의 감사

25편 원수들의 핍박으로 인한 고난 중에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비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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