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난은 예견된 고난도 있지만 갑자기 찾아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아무튼 고난은 다 힘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수요일에 주차장에서.
오늘은 이 힘든 삶 속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파악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나리오를 빨리 파악하는 것입니다.
모든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에도 대본이 있습니다.
대본 속에는 극작가의 아이디어, 사상, 계획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기획하시는 극작가이시고, 내 인생의 연출가이십니다. 그런데 이 땅에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시나리오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연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를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험한 이 세상을 살아가며 내 인생을 계획하신 그 분의 시나리오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분의 의도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한 하나님의 자녀들 일겁니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문제를 놓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겁니다. 문제는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자녀문제로, 가정의 문제로, 사업의 문제로 아파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서서 쩔쩔매시는 분이 계십니까?
지금이야말로 부르짖어 기도해야 될 때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하시겠습니까? 썩은 새끼줄 같은 세상 줄을 붙들고 살아가시겠습니까? 생명줄인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분이 여러분들이 상상치도 못한 방법이나 상상치도 못한 것들로 여러분들의 인생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서 1장을 같이 읽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로부터 시작해서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에 이르기까지 무려 다섯 명의 왕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보면 예레미야가 참 장수한 사람이로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기는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서 가장 어둡고 힘든 시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인 강국 애굽과 신흥 강대국인 바벨론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외교가 중요한데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악수를 둡니다.
다들 애굽에 붙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바벨론에게 빨리 항복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애굽인데 하나님의 응답은 바벨론.
이래서 예레미야의 별명이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는 강북삼성병원과 독립문 사이에 새로이 지어진 아파트입니다. 흔히 말하는 재개발 아파트입니다.
원래 살던 집들을 헐어 버리고 새 아파트를 지은 겁니다.
재개발, 이거 대단히 깊은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주후 5세기에 로마 제국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기 시작합니다.
영원히 그 영광이 건재할 것이라고 여겨졌던 대로마제국이 서고트의 오도아케르의 침략으로 무너집니다.
생각지도 못했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로마가, 그 화려한 도성이 어찌 저 야만족에 의해서 무너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
화려했던 로마의 영광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 어거스틴의 마음도 함께 무너지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크게 고민합니다. 신앙적 번민에 빠진 것입니다.
‘오! 주여 어째서 이런 일이?’ 깊은 고민 끝에 그에게 영안이 열리고 그는 영적인 세계를 바라봅니다. 거기서 그는 사람들이 세워놓은 세상나라가 무너지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유명한 ‘City of God,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을 씁니다.
세상 나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이 영광을 그는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형통하고 발전하는 것만을 바랍니다.
그런데 역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는 흥망성쇠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나라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새로운 나라의 건설 전에 그 무자비한 파괴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서 죄악의 도성 예루살렘에서 외치라고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대로 가면 망한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 외치라!’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들으면서, 회개하지 않는 백성을 보면서,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을 보면서 예레미야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망했습니다. 그 화려했던 솔로몬의 성전이 이방 민족인, 바벨론에 의하여 불타고 맙니다.
이 파괴가 없이, 이 무서운 멸망이 없이 아름답고 밝은 미래가 있기를 바랬습니다만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백성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 이 엄청난 사건을 그는 경험해야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마음을 더욱 괴롭혔던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심판을 받는데
어째서 하나님을 모르는 느부갓네살, 이방 왕을 통해서 역사하시느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을 징계의 막대기로 사용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눈 앞에서는 느부갓네살이 나타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 성은 무너집니다. 예레미야가 그렇게 부르짖었음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파괴와 건설, 뽑으시는 하나님과 다시 심으시는 하나님,
헐어버리시는 하나님 그리고 다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그는 믿어야 했고,
몸으로 경험해야 했고 전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 자신도 애굽으로 끌려가서 돌에 맞아 죽는 비참한 생을 살았습니다.
이사야 59장 1절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절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죄로 인해서 심판은 있을 것이고 파괴가 있을 것이라고 예레미야는 눈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놀라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속된 것을 헐어버리시고 신령한 것을 세우시고, 교만한 것을 없애버리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 주시고, 세상적인 것을 헐어버리시고 거룩하고 영원한 것을 세워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 911테러가 발생했을 때도 그 똑똑한 사람들, 그 많은 전문가들이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합니다.
꽝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이 든 겁니다.
사람들은 미처 모르고 있지만 작으나 크나 현실 안에 사인이 있고 의미가 있더라 하는 것입니다. 흥망성쇠, 망하고 흥하고 살고 죽고 그 많은 사건을 겸손히 받아 들이면 그 속에 메시지가 있더라는 것이 그 위대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방대한 역사 연구의 결과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개연성도 있고, 목적도 있고, 뜻이 있었습니다. 반드시 있을 것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얼마나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입니다.
또한 그 속에 있는 의미를 내가 얼마나 듣느냐, 아느냐가 문제입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십자가는 파괴하고 건설하는 역사의 중심이자 대표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뽑고 심으십니다. 여러분은 십자가 앞에 섰을 때 내가 무너지는 경험을 해 보셨습니까? 십자가 앞에 섰을 때 나 자신이 죽어야 비로소 내 안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삶이 시작됩니다.
성 마카리우스라는 분에게 제자들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는 대답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죽어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완전히 죽는 것입니까?”
그는 대답합니다. “공동묘지에 가서 ‘이 나쁜 놈들아!’라고 욕을 해 보아라”
제자들이 다녀와서 말합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가서 ‘훌륭한 분들이어’라고 칭찬을 해 보아라.
또 다녀와서 말합니다.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제야 그는 답을 가르쳐 줍니다. “바로 그것이 죽은 사람이니라”
예수 믿는 사람은 모진 비난을 받아도, 극진한 칭찬을 들어도 말이 없다.
죄인 보고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 세상에 대하여 죽은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요 그리스도인의 마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 유명한 말씀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십자가를 볼 때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또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 끈끈한 정, 죽여버립니다. 그 많은 욕심, 깨끗하게 십자가에 못박아버립니다. 그때부터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그때부터 그리스도의 생명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기에 죄에서 해방된 가운데 살아갑니다.
사면도 본인이 그것을 받아들일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며 만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종이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용서한다는 말도 감사한 마음으로 진실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면 나도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죄로부터 온전히 해방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아직도 우리들의 마음속의 문제는 끊을 걸 못 끊은 것입니다.
버릴 걸 못 버렸습니다. 아직도 덜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심판적 요소를 띄었습니다.
옛 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살아나게 합니다.
중생이란 성령 안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소원을 이루어 가는 곳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새로 태어나서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곳.
옛 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살아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내가 전에 좋아하던 것, 내가 전에 소중히 여기던 것을 이제는 배설물로 여기고 해로 여긴다.’고 말씀합니다.
왜? 빌립보서 3:8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그것이 참된 크리스찬인 것입니다.
내가 했다 하는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여지없이 파괴하십니다.
그리고 파괴하고 이후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과거 위에다 신앙을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싹 헐어 버리고 새로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파괴 자체도 축복입니다. 은혜입니다.
바르게 예수 믿는 사람은 병들어도 저주가 아니요, 잠깐의 실패는 있어도 주저앉는 법이 없어집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수용하는 이 사람이 진정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상과 교만과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죄악을 파괴하시고 새롭게 건설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십니다.
오늘도 파괴없는 건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부득이 이러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아픔이고 괴로움입니다.
파괴하시고 또 세우시는 하나님, 뽑으시고 새롭게 심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그 거룩하신 역사를 바로 수용하고
주의 말씀에 온전히 응답하여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