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인 모세 오경으로 시작됩니다. 모세 오경의 마지막인 신명기 34장은 모세의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움과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모세의 죽음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를 세우시고 그에게 ‘일어나서 가고 땅을 밟고 차지하라’ 하시면서 가나안 땅을 정복케 하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여호수아서입니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의 구조를 보면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신약 또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라는 사복음서로 시작이 됩니다.
사복음서에는 예수님에 대한 모든 기록이 담겨져 있는데, 복음서의 마지막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믿었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비참하게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두려움과 절망감에 마가의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두려워 떠는 그곳에 성령님께서 임하셔서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마가 다락방의 문을 박차고 일어나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여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성경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어 생명의 활동으로 이어집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종교가 아닌 역동적이고 구체적인 종교입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 신앙은 일어나는 신앙입니다.
여호수아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도 일어나라고 동일하게 명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인생을 가리켜 여러 가지로 비유합니다.
“인생은 광야와 같다” “인생은 농사를 짓는 것과 같다” “인생은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등등. 이런 말씀들은 나름대로 인생의 특징을 잘 설명해 줍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인생은 전쟁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이 말씀대로 인생을 사노라면 끊임없는 문제들과 씨름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앙생활을 전쟁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적인 전쟁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Spiritual Warfare)입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에 보면 전쟁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1차적으로 과거에 실재했던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들의
‘인생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영적 전쟁 가운데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는지 가르쳐줍니다.
즉, 인생의 승리 비결을 제시해 주는 모형인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1절은 ‘모세가 죽은 후에’라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모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애굽에서 430년간 노예 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출애굽 시켰습니다. 40년 광야 생활을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여 곡절 끝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세는 죽고 그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항상 모세라고 하는 위대한 지도자의 조수에 불과하던 여호수아가
과연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여호수아 자신도 백성들도 의문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여호수아가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호수아서를 연구해 보면 그가 33번의 전투가 있었는데, 전승합니다. 33전 33승!
물론 ‘옥에 티’ 같은 아이성 사건이 있었지만은 결국 승리합니다.
여호수아는 무적의 장군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를 전승케 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전승케 하십니다. 가르쳐 주는 대로 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가슴이 뛰는 일입니까?
여호수아는 우리에게 ‘무적인생의 모델’이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일평생 ‘무적 인생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던 약속을 재확인하십니다. 4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그리고 여호수아 개인에게는 아주 특별한 약속을 주십니다.
5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무적 장군의 약속을 주셨지만 정작 여호수아 자신은 긴가민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자기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있잖아!”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주의 해서 보아야 할 사항이 바로 이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 그들 자신이 위대한 게 아닙니다.
그들은 연약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위대하신 겁니다. 이 중요한 원칙을 놓치면 안 됩니다.
모든 성도들의 능력의 근거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면,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무적 장군으로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적 인생을 약속해 주십니다.
무적 인생은 막연한 기대나 희망 사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체적이고 분명한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약속인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살아간다면 반드시 성취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로마서 8:31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로마서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들에게 들려주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아멘으로 화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적인생을 약속하셨어도 우리가 감당할 몫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여호수아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6절(상). “강하고 담대하라”
7절(상).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9절(상).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 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전쟁에 나설 때 담대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객관적인 전력 이상으로 사기(정신무장)가 중요합니다. 영적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겁을 주고 포기하게 만듭니다. 내 앞에 닥치는 문제가 엄청 커보이게 하고 질리게 만듭니다.
그때 중요한 게 바로 나와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담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용기’입니다. 다윗은 온갖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이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담대한 용기를 가졌습니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리고 3절을 보면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가서 땅을 밟아야 자기 것이 된다는 겁니다.
지하에 엄청난 석탄이 매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저절로 뜨뜻해 지나요?
실제로 캐내서 불을 붙이지 않으면 에너지가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은혜를 쌓아두고 계신다 할지라도 인간이 자기의 몫을 감당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게 무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담대한 믿음과 더불어 반드시 지킬 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제일 중요한 ‘말씀 중심의 삶’의 원칙입니다.
8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그런데 이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우리가 말씀 중심에서 이탈해서 좌우로
치우치게 되는 이유는 한 마디로 세상 욕심 때문입니다.
세상의 욕심에 우리 마음이 미혹되고 중독되다 보니까 무감각해지고 둔해져서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깨달아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15-17 17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에스키모인들은 늑대를 사냥할 때 아주 날카로운 칼에 피를 발라 얼린 후 늑대가 지나가는 길목에 놓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피 냄새를 맡고 늑대들이 와서 혀로 핥아먹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얼음에 자기 혀마저 얼얼해지고 무감각해집니다.
그래서 결국 칼날에 혀가 잘리고 피가 흘러나와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욕심에 중독이 되면 죽는 줄도 모르고 자꾸 세상으로 갑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늘 정신을 차리고 말씀을 가까이 해야 됩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특별히 묵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이 동행하신다는 담대한 믿음으로 약속하신 땅을 밟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대로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거칠 것이 없는 형통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실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같이 무적 인생의 주인공이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5-21일
에스더 8-10 예레미야 1, 2, 23, 24
므깃도 전투 B.C 609 요시야 전사
갈그미스 전투 B.C 605 바벨론 승리
살라미스 해전 B.C 480 그리스 승리
에스더서는 예루살렘 성전 함락 이후 바벨론 땅에서 살아가던 유대인들은 이방인과의 교제를 통하여 이방신을 받아 들이고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잃어가고 있던 시기에 신앙의 고취를 위하여 쓰여진 책.
특히 부림절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사랑을 후세에게
증거하며 부림절을 준수함으로써 신앙 각성의 기회를 삼을 것을 권면하고자 기록. 아하수에로 왕은 세계사의 크세르크세스 왕으로서 그리스와의 살라미스 해전을 치루게 되는데 에스더서에 나오는 잔치는 그리스 원정을 준비하기 위한 사기 진작을 하고자 베풀었는데 무려 6개월 동안.
결과는 패배. 이후 세계 역사의 패권은 유럽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고 룻기와 더불어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
8장 유대인들을 위한 새 조서
12월 13일에 유대인들이 자위권을 행사하여 적들과 맞서 싸움.
9장 3월 23일 새로운 조서 발표 이후 9개월 후 12월 13일에
하만의 아들을 포함하여 대적들과 싸워서 대승.
17-32 부림절 제정 이웃과 더불어 기쁨을 나누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절기로 오늘 날까지 준수
10장 모르드개의 높임과 유대 백성의 안위
예리미야는 유다 멸망 전 므낫세 왕 시기에 태어나 선지자로서 소명을 받은 것은 약 20세 때인 요시야 왕 13년 곧 BC 627년.
요시야는 바로 느고와의 므깃도 전투에서 사망(BC 609)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는 한결같이 예레미야의 권면을
무시하여 결국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
바벨론에게 항복을 권했던 그에게 돌아온 것은 핍박과 매국노.
그리고 유대인들에 의하여 애굽으로 끌려가 거기서 생을 마감
앗수르와 바벨론의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이 승리했을 때 그 여세를 몰아 바벨론의 제 1차 유다 침공,
제 1 장은 예레미야의 소명 기사.
제사장 가문 출신 소명 시기가 요시야 왕 때
활동기간이 요시야 왕을 제외하고는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악한 왕들의 통치 기간. 그의 선지 활동은 남유다 멸망 후에도 수년간 계속.
4-9절 소명 받는 과정
10절 사역의 특성
모세와 기드온의 소명 거부
11-19 예레미야가 본 두 가지 환상과 하나님의 격려
살구 나무 가시 환상
북쪽에서부터 기운 끓는 가마 환상
17-19 하나님께서 승리와 보호를 약속하심
2장 유다의 배신에 대해 심판을 경고
1-8절 여호와를 배신한 유다에 대한 책망
9-13절 우상 숭배에 대한 행위를 고발
14-19절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기 위하여 애굽과 앗수르를 의뢰
20-28절 유대의 배도 행위
29-37절 심판 선포
23장
1-8절 유다의 회복 약속
9-40절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경고
24장 무화과 두 광주리의 비유
1-3절 환상을 보여 주시고
4-10절 여호와께서 해석
익은 무화과 바벨론에 포로 나쁜 무화과 유다 땅에 남은 자
끌려간 자들은 자기들이 축복받았다고 생각
포로된 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요 유다에 남은 자가 버림 받은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