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자의 믿음, 마가복음 5:25-34, 272장
신명기 28-34장
인간은 고독한 존재입니다.
태어날 때도 혼자 태어났고 갈 때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나기는 하겠지만 저희 부부도 누군가는 먼저 가고
혼자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성숙함은 그가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영적으로 약한 사람들의 특징은 혼자 있는 것을 못 견뎌합니다. 밤낮 사람들과 어울려서 지내려고 합니다. 계속해서 무리 속에 머물러 있으니 묵상할
시간이 없고 독특하고 창의적인 생각이 떠오르지를 않습니다.
반면에 영적으로 강한 사람들의 특징은 홀로 있는 그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그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대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대하기에 힘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 어디에도 소속되지를 못하고 스스로 고독하게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달랠 길이 없습니다.
이래도 불편하고 저래도 불편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은 불쌍하고 고독한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교부들의 전승에 의하면 이 여인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온 이방 여인이었고 혈루증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혈루증이 무슨 병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의학자들에 따르면
자궁암 같은 부인병이었으리라고 짐작을 합니다.
또한 그는 12년이란 긴 세월을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중이었다고 합니다.
만약 그가 20세에 병을 얻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32세가 되는 셈입니다.
아름다운 청춘을 몹쓸 병으로 다 허송한 불쌍한 여인입니다.
병을 앓고 있어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만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에게는 그 병이 나을 것이라는 희망이 거의 없었습니다. 본문은 그녀가 많은 의원들로부터 치료 받는 중에 낫기는 커녕 오히려 더 괴로움만 받고 병은 더욱 위중해 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병이 고쳐져야 의사도 고마운 것이지, 고쳐지지 않는데 치료를 계속한다면 치료 자체가 불편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게다가 가진 재산마저 허비한 비참한 형편이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극히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여인의 입장은 말 그대로 철저히 버려진 존재였습니다.
그 누구의 위로의 말도 이 사람에게는 조소처럼 들립니다.
욥기를 보면 욥이 매우 어려운 일을 겪고 있을 때에 세 친구가 찾아와서 그를 위로한답시고 위로합니다. 저들 딴에는 위로를 한다고 하는데 욥에게는 다 상처가 됩니다. 여러분, 내 딴에는 위로한다고 하는 말들 상대방에게는 상처가 되지는 않는지 조심할 것입니다.
그 여자가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 속에 끼여 있습니다만은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많다 보면 그만큼 개인은 무시되기도 하고 또한 서로서로 관심을 갖지 않아 개개인의 소중함이나 소원은 묻혀 버리기가 쉽습니다.
이와 같은 무관심 속에 있기에 완전히 소외된 형편에서 그 여자는 지금
다가서고 있습니다.
성경, 특히 복음서를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병이 낫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삶이 새로워지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이적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적들을 소개하고 있는 기사들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듣는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입니다. 즉 ‘듣고’라는 단어와 ‘믿고’라는 단어가 반드시 등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게 됩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마가복음 5:27 상반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소문을 듣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바로 그 소문을 들은 것이 여인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여인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노력을 다 동원했지만 병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문이 들려오는데 나사렛의 예수라는 사람이 장님의 눈을 뜨게 했고 문둥병도 고치셨으며 죽은 자도 살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문의 주인공이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라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병을 고친다는 소문을 그대로 믿고 그리로 달려온 것입니다.
이 여인의 훌륭한 점은 듣고 예수께로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의심하려고 든다면 ‘말도 안된다. 어떻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나?’하고 반문할 수도 있고, 설사 그런 병을 다 고쳤다고 해도 나같은 혈루병은 고친 일이 없으니 나는 안 될 것이라고 마음을 먹으면 예수께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께서 저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나에게도 은혜를 베푸실 것을 믿었습니다.
은혜의 현재성, 구체성을 믿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구원을 얻었다는 간증을 들으면서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이지 내게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은혜가 임하는 것을 보았으면 내게도 있을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믿고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문제는 내 문제만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문제는 너무 지독해서 예수님도 어쩌지를 못할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전도서에서는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5:9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내 문제는 곧 다른 사람의 문제요,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해결을 보았으면 나도 믿음으로 해결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여인은 다른 사람에게서 일어났던 기적을 자신에게도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믿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 속에 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는 유일한 소망을 가지고 주님께 가까이 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두 가지 문제가 그 여자를 난감하게 하였습니다.
첫째는 외적인 조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옹위하고 있기에 환자 된
몸으로 이것을 뚫고 나아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구름 같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주님께 나아옴에 있어 방해되는 외적인 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귀는 성도가 예배드리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공격합니다. 마귀가 목표로 하는 공격 대상 일순위가 바로 예배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했든지 간에 아무리 어렵고 밑바닥 생활을 한다 해도 예배가 생명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갈까 말까?
둘째는 내적인 조건으로, 이 여인 자신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의 병명을 말하며 그들의 환부를 보일 수 있었습니다.
장님은 ‘눈을 뜨게 해 주세요’ 문둥이는 ‘내 몸을 깨끗하게 해 주세요’라고 자기의 사정을 주님 앞에 내어 놓고 고쳐주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지금 부끄러운 병에 걸려 있습니다.
특히 여인으로서 많은 사람 앞에 내놓을 수 없는 숨겨진 병이기에 남다른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그는 소외된 사람입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모든 고난은 특별히 질병은 죄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지고 교육되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5장 25절 이하를 보면 이와 같은 여인은 회당에도 들어오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그 당시는 위생 조건이 좋지 않아 자주 옷을 갈아입거나 자주 목욕을 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특히 소독할 수 있는 형편은 더더욱 아니므로, 이런 환자가 성전에 들어가면 그 냄새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환자들은 회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회중 가까이에도 가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여인에게서 바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말못하는 자기 나름의 내적인 고민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아무에게도 말 못할 자기들만의 고민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죄를 지으면 고독해 합니다. 양심이 저를 심판하고 있으니까
고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옵니다.
이 불행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나옵니다.
예수님만은 내 사정을 아실 것이라고, 그 분에게만은 가능할 것이라고,
이제 이 여인은 드디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게 됩니다. 자기의 부족을 느끼지만 그래도 주님을 만지기만 하면 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 순간 병에서 낫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도 고통스럽던 몸이 순간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을 직접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이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열려 있고, 또한
그 능력을 힘입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찾으십니다. 나를 만진 자가 있다 하십니다.
옆에 있는 제자가 한 마디 합니다. “아니,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서 서로 밀고 밀치니, 손이 좀 닿을 수도 있고 옷자락이 스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뭘 그렇게 짜증내고 그러십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가며 오며 스쳤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 만나고, 어쩌다 옷자락에 손이 닿았다는 것이 아니라, 단적으로 말하면 믿음으로 나를 만진 사람, 종말론적으로 나를 만진 사람, 경건한 마음으로 나를 만진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생에 단 한 번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를 만진 바로 그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내 일생에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종말론적으로 경건하게 이 자리에 앉았을 때에 주께서 그를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오늘 여러분들의 예배입니다.
이 여인은 절박하게, 종말론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만졌습니다.
그때 그는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당장에 몸이 깨끗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자 이제는 부끄러움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 앞에서 고백을 합니다. 나는 과거에 이랬는데 주님께서 이렇게 만져주셨고, 그래서 나았습니다. 이 세 가지입니다.
나는 12년 동안 이렇게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나니 내가 이렇게 깨끗해 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부끄러움이 없이 당당하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여인은 집에 돌아가서 자기 집 앞에 예수님을 만났다는 비석을 세워 놓고 어느 어느 날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 하고 가고 오는 사람에게 그 사실을 증거하면서 한평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단 한 번에 변화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십 년을 다녀도 변함없이 자리만 채우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서 비롯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은 단 한 번에도 얼마든지 변화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변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는 자는 단지 고침을 받을 뿐 아니라 놀라운 구원의 은혜까지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주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 여인과 같은 깨끗하고 겸손한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설 때에 비로소 나의 귀는 열릴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
이 은혜가 언제나 함께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