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설교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태복음 14:13-21)

목사님 0 853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 40년을 지낸 후,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 떨기나무 불꽃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이나 치고 있던 모세에게 

나타나 애굽으로 가서 내 백성을 구원해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모세의 심정은 부담을 느낀 정도가 아니라 어처구니 없었을 것입니다. 

목동으로 40년, 40년 전이면 1982년, 많은 변화

미국에 있으면서 homeless 사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반인이 homeless가 돼서 일주일이면 사람 모습이 완전히 변합니다. 

40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모세에게는 왕자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힘없는 양치기의 모습만 남았을 겁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서 가나안 땅으로 옮기는 대사역을 맡기신 겁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도 하나님이 노를 발할만큼 거절을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몰랐던 것이 있습니다. 모세의 착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있는 아주 보편적인 착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고 말씀하시니까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해내어야만 하는 줄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자기가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당연히 답은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으로 가라 할 때 모세는 알았어야 합니다. 가서 내 백성을 구원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그냥 가면 된다는 것을 알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힘 좀 쓰시겠구나 하고 믿었어야 합니다. 눈치를 챘어야만 합니다. 

그 눈치가 믿음이고, 그 믿음이 기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12 정탐꾼들이 여리고를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열 정탐꾼들의 보고는 절망적이었습니다. 

저들이 보기에 가나안 족속과 자신들을 비교해 보면 가나안 족속들은 거인들이고 자신들은 마치 메뚜기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니 가나안 정복은 논리적으로 미션 임파서블이라는 결론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착각은 저들이 그 일을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탐 결과 가나안 사람들은 거인과 같고 자기들은 스스로 보기에 메뚜기 같아 보였어도 하나님이 가나안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셨다면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외쳤어야 합니다. 

‘올라가자. 저들은 오늘 우리의 밥이다.’

이성과 논리만 있고 믿음은 없었던 저들은 저들의 확신대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구경도 하지 못하고 결국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황하다 거기서 죽어야만 했습니다. 

모세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애굽에 가지 않았었다면 모세도 그냥 미디안에서 양만 치다가 초라하게 죽었을 것입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은 도전하는 삶입니다.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저는 기적을 믿습니다. 기적이 없어도 하나님을 믿지만 저의 삶에서도 기적이 나타난다면 사양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저에게, 저의 삶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믿고 사는 삶에는 언제나 기적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제 삶에도 언제나 간증할만한 기적이 늘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흥분하고, 그것 때문에 감격하고 그것 때문에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기적이 늘 있어 왔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기적을 기다리며 기대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기적을 경험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신 사건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오병이어의 사건만이 유일하게 4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겠지요?

‘오병이어’란 보잘 것 없는 보리 떡 다섯 덩이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신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물고기에 해당하는 단어는 ‘옵사리온’인데 보통 물고기를 의미하는 ‘익투스’와는 차이가 납니다. ‘옵사리온’은 아주 작은 송사리 같은 고기를 의미합니다. ‘익투스’는 헬라어로 물고기라는 뜻.

예수스, 크리스투스, 테오스, 휘오스, 소르메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구원자이십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대표적인 이단이 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란 영혼만이 중요하기 때문에 육체는 무시합니다.

두 극단 쾌락주의와 금욕주의(고행)

그러나 기독교는 영, 혼, 육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쓴 C.S 루이스라는 작가는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입니다. 

그의 저서 중에 스쿠르테이프의 편지 중 

“사람들은 자신이 동물인 것을 잊어 버립니다. 따라서 육체가 반드시 영혼에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는 점을 자주 잊고 삽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었으면 우리 몸도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몸을 소중히 여기고 피곤하지 않게 하시기 바랍니다. 운동도 중요.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빵이 필요한 현실을 분명히 인정합니다. 

요즘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사는 경제인 것 같습니다. 

유가가 어떻게 되나? 환율은 어떻게 되나? 물가는 어떻게 되나? 

종종 우리가 믿음생활을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상적인 가르침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사람들은 무조건 오천 명분을 벌어들이는 사람을 능력있는 사람이다, 잘 사는 사람이라 하지만 하나님은 그 능력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쓸 줄 아는 사람을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개인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와 보상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한 사람이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것을 누리며 사는 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은 건강치 못한 

사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청부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독교는 언제나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섬김과 배려에 대하여 끊임없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고아, 과부, 나그네, 베드윈 족.

성경은 밭의 네 귀퉁이를 남기는 것과 떨어진 나락과 볏단을 줍지 말고 버려두어 가난한 사람들이 주워 가게 하는 것 등을 말씀함으로 구체적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에 대한 배려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공동경작과 공동분배를 하는 사회주의와 같이 

인간을 ‘공동’이나 ‘단체’의 개념으로 묶지 않습니다. 

철저히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개인의 성공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거기서 끝을 내지 않습니다. 정당한 승리와 성공을 인정하면서도 이유는 어쨌든 그와 같은 승리와 성공을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대한 배려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들을 함부로 무시하거나 깔보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정당한 누림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시지만 그것을 성공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보시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성공의 궁극적인 목적을 나눔과 섬김에 둡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섬김은 우리가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 왔던 유교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유교는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을 언제나 강한 자, 높은 자로 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정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40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가장 작고 가장 낮고 가장 불쌍한 사람을 섬겨야 함을 천명하셨습니다. 

며칠 전에 프랑스에서 오신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이 Tolerance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 지하철에서 쓰러진 두 사람.

오늘 같이 나누고자 하는 내용도 그것입니다.

참으로 미미하기 짝이 없는 작은 떡과 물고기를 기꺼이 내어 놓았을 때 

바로 그 현장에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벳세다 광야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도 오 천 명이나 되었던 사람들이 좇아 왔습니다. 제자들은 저들이 허기 져서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만 말씀하시고 이제 저들을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라고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아주 엉뚱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저들에게 먹일 떡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때에는 하나님을 계산에서 뺍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면 할 수 있는 일이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면 당연히 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단정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오병이어 기적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없다고 모든 것이 다 안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모든 것이 다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은 가난은 나라도 못 구한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나라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나라가 못하는 일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오늘 본문의 어린 아이처럼 예수님의 손에, 하나님의 손에 올려 지면 나라가 못할 일을 우리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가 먹을 점심인 오병이어를 내 놓은 아이처럼, 그것을 들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 제자들 처럼 우리도 그렇게 한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오늘도 일어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기적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입니다. 보리 떡 다섯 개와 물 고기 두 마리로 오 천 명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와 같은 기적이 일어났을 때 가장 기뻤을 사람이 누굴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구보다도 자기의 도시락을 내 놓은 어린 아이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 도시락을 내 놓으면 점심을 굶어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점심을 굶는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헌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작은 헌신을 귀히 보시고 오 천 명이 먹고도 남는 기적을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아이의 헌신이 없었다면 기적도 없었습니다. 

그날 벳세다 광야에서 있었던 기적의 주인공은 오병이어 자신의 점심을 내 놓은 아이였습니다. 그날 그 아이는 예수님의 능력을 덧입어 자신의 작은 헌신으로 오 천 명을 먹이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또 한 번 의외의 분부를 내리셨습니다.18절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정말 속된 표현으로 ‘택도 안 될’ 것을, 예수님께서는 일단 당신 앞으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적은 자원, 바로 이것을 가져오라고 명하십니다. 우리 쪽에서는 그 자원이 사용되어 

나타날 결과에 대해 미리 계산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 같은 얕은 계산, ‘이것 주님께 바친다 해도 교회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나?’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나타날 길목을 미리 막아 버리는, 실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단순하셔야 합니다. 분석.

하나님이 가져 오라고 하면 그냥 가져 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교회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풍성히 넘치기 위해서는 감사해야 합니다.

19절을 보면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는 

그 음식물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고 (give thanks)

만 수천 명이 모인 그 자리에 겨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밥상에 올랐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두고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오병이어가 엄청난 양으로 불어난 후에 감사드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직 오병이어에 불과한 상태에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오병이어 위에 축복하신 후에 그것을 나누어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도록 거두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실로 처음의 오병이어만 가지고서는 상상도 못할 엄청나게 풍성한 잔치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기적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 기적을 목도한 사람이 있고 그 기적의 중심에 선 기적의 당사자들도 있습니다. 

저는 기적의 구경꾼이 아닌 기적의 당사자가 되고 싶습니다. 

특별히 저는 여러분들이 오병이어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첫 번째 이적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그 기적을 행하시기 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종들에게 미리 한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종들은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빈 포도주 항아리에 물을 가져다가 부으라고 하셔도 그렇게 했었고. 그 물을 떠다가 주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오늘날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병이어 보잘 것 없는 것으로는 오 천 명을 먹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에 그것을 들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순종이 

기적을 낳았던 것입니다.

그 진리를 깨닫고 함께 실천하는 복된 새하늘 공공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에 도전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26장~로마서 4장

 

26장

1-23절 아그립바 앞에서의 바울의 변론

24-32절 바울의 무죄 증명과 로마 이송 결정

 

27장

1-8절 바울의 로마 여행 시작

9-26절 광풍 속에서의 하나님의 보호 약소

27-44절 광풍에서의 구원

 

28장

1-10절 멜리데 섬에서의 두 이적

바울이 독사에 물렸으나 죽지 않은 사건

원주민 지도자의 부친을 치유한 사건

11-15절 멜리데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16-29절 바울의 로마에서의 전도 사역

30-31절 바울의 로마 사역 결론

 

로마서

본서는 저자는 바울이나 더디오에 의해서 대필(16:22)

3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집필

 

1장

1-7절 인사말

8-17절 본서 집필 동기와 이신득의의 원리 제시

18-32절 이방인의 죄와 형벌(24, 28절)

 

2장

1-16절 하나님의 심판 원리

17-29절 율법주의적인 유대인의 죄성

 

3장

1-8절 유대인의 반론

9-20절 본래적 죄인으로서의 인간

21-31절 이신득의의 설명

 

4장

1-8절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

9-12절 할례와 무관한 칭의

13-25절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