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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교회(데살로니가후서 1:3-5)

목사님 0 891

 

 

       오늘은 576번째 맞이하는 한글날입니다. 

그런데 자기 나라 글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남미국가들은 대부분 스페인어를 씁니다. 

그리고 브라질이 축구는 잘하지만 포르투칼어를 씁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훌륭한 조상들의 덕분에 한글을 가지고 있고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한국어를 씁니다. 민족이란 같은 언어를 쓰는 집단.

한국어 금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영어를 공용어로.  

오늘부터 한국어는 사용할 수 없다는 지시가 내려온다면 어떤 심정이 들까? 그런데 그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일제는 조선 땅을 정치・경제적으로 지배했을 뿐 아니라 강력한 동화정책을 시행하여 조선인으로 하여금 일본어로 말하게 하고, 천황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천황의 신민으로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조선의 정체성은 소멸되어야 할 대상이었고, 조선어와 조선 글자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조선 역사와 문화의 정수였습니다.

1929년에 ‘조선어학회’를 만들어 우리 말을 보존하려고 노력.

발기인 108인은 문화의 기초가 되는 언어를 정리하고 통일하는 것이 독립의 지름길이라 선언하면서, 사전을 만듦으로써 민족어를 보존하고 문화의 기초를 세워 독립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특히 기독교와 한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당시 한글 보급 전파의 일등공신은 외국인 선교사들과 국내의 기독인 학자들이었습니다. 

1893년 1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모든 문서는 한문을 섞지 않고 순전히 한글로 인쇄한다”는 방침을 정했습니다. 

그후 1911년 신구약 전체가 한글로 번역돼 ‘성경젼서’가 출간되었습니다. 

서울 연동교회 초대 담임목사를 지낸 게일 선교사가 1909년 기고한 글에는. “이런 문자(한글)가 400년 동안 긴 잠을 자다가 자명종 소리에 깨어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명을 전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 이후 교회에서도 일본어로 설교하도록 지시했지만 

교인들은 계속 한글 성경과 찬송가를 사용해 예배들 드렸다고 합니다. 

참으로 복받은 민족입니다. 

 

오늘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소개하면서 칭찬하고 있습니다. 3-4절

그 까닭은 환난과 핍박 중에도 그들의 믿음이 더욱 자랐고 또한 서로 열심히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곧 그 믿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믿음을 잃고 교회를 떠나기 쉽지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오히려 그 믿음이 더 자랐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핍박이 오고 환란이 오면 믿음을 잃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이 자라나는 것을 본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감사하고 자랑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주는 '아빌퀼리테'라고 하는 조개의 몸속에서 만들어지는 보석인데 

그 조개의 몸속에 모래가 들어가서 진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아빌퀼리테'의 조개가 다 진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조개에게 있어서 자신의 몸속에 모래알이 들어온다는 것은 큰 고통이며 아픔입니다. 그런데 이 모래알이 준 이 아픔에 대해서 조개 자신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진주를 만들어 내느냐? 아니면 썩어 죽느냐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진주가 되려고 하면 '라카'라고 하는 특수한 물질을 몸에서 발산하면서 진주를 만들어 간다고 합니다. 

문제는 '라카'를 낼 때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반면 썩는 것은 

간단합니다. 모래알이 들어올 때 그냥 가만히 있기면 하면 됩니다. 

우리 인생이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역경과 어려움이 올 때 '라카'를 발산해서 진주를 만드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역경이 올 때 '이제 끝이다'라고 

생각하고 썩는 조개처럼 파멸하는 인생이 있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사도 바울은 겨우 삼 주 동안 데살로니가에서 활동했습니다. 

불과 삼 주 동안의 활동이었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를 따르는 사람들 중에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도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불량배들을 시켜서 바울 일행을 해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뢰아로 피했고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거기까지 따라온 유대인들 때문에 아덴으로, 그리고 고린도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튼 불과 삼 주 동안의 선교 활동으로 교회가 생겼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그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 바울이 궁금하게 생각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었고  

그 디모데가 가지고 온 소식이 오늘 본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큰 믿음을 갖기를 다 원하고 있지만 그러나 믿음은 그냥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가 음식을 먹어야 자라듯이 믿음도 영적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저도 큰 믿음을 갖게 해 주세요 큰 믿음을 주세요 하고 기도들을 하지만 그 믿음을 자라게 하는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렇게 관심이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믿음이 자랄 수가 있겠습니까?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믿음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되고 또한 그 양식이 내 몸의 자양분이 되도록 흡수하여야 합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을 보면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단지 목회자가 전해주는 설교 말씀만으로 우리의 믿음을 지켜나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스스로 성경을 스스로 읽고 묵상함으로 내 

믿음을 자라게 하여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선생의 자리에까지 이르러야 

하는데 여전히 가르침만 받으려고 한다면 그건 마치 몸은 다 컸는데 여전히 어머니에게 젖을 달라고 보채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쓰셨고, 믿음이 있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켰고,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을 정복하게 했습니다. 능력 있게 쓰임 받았고,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가 다 믿음으로 살고 믿음을 지키며 살아갔던 사람들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두 번째 자랑할 조건은 서로 사랑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근본적 관계는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어서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데로부터 우리의 신앙이 시작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다음 단계는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4:7-8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 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기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동시에 같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고 남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른 분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으며 그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계십니까? 이것이 자랑스러운 교회가 되기 위한 기본 조건입니다.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어요. 냉랭해요” 이것이야말로 미숙한 사랑입니다. 

그 분은 자기가 사랑받는 것에 먼저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랑은 사랑을 주는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나는 이미 주님께로부터 사랑을 넉넉히 받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합니다. 

이런 교인들이 많은 교회가 자랑스러운 교회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인내로 말미암아 자랑한다고 합니다. 사실 인내할 수 있는 것은 특히 믿는 우리들에게는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없이는 어려운 시간들을 이겨낸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가운데 유난히 불평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끔은 타당한 이유로 불평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기 판단이 옳다는 생각에서 불평하는 때가 더 많습니다. "교회가 이래야 되지 않느냐, 저래야 하지 않느냐"라고 말은 하는데 정작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주변에 긍정적인 언어로 소망을 심어줍니까? 

아니면 부정적인 언어로 절망을 심어줍니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독일의 폭격을 당했을 때 영국의 모든 신문들은 정부와 군대를 비난하는 글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 신문들을 보는 순간 온 국민들은 절망감에 휩싸여 패배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때 한 저널리스트가 신문기자들을 불러 놓고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정부와 군대의 잘못으로 폭격을 맞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계속 이렇게 비판만 하면 우리 국민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지금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국 국민들이 신문을 보면서 희망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비판하는 것도 틀리지는 않지만 소망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문기자들은 그 자리에서 합의를 했고 그 다음날부터 신문 기사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가 실려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군대에 가는 젊은이들의 모습,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내는 아내의 모습, 그리고 남은 가족들은 저녁마다 예배당에 보여서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들, 전쟁에 승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실었습니다. 

이러한 신문들을 보는 순간 영국의 국민들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희망을, 그리고 승리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는 저와 여러분들이 아는대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핍박과 환난 중에 믿음이 더욱 자랐고 서로 사랑함이 풍성해졌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인내한 부분에 대해서 

자랑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교우 분들의 모습 또한 이러기를 바랍니다. 지난 몇 년간 함께 하면서 여러분들의 믿음이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말고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 높은 곳에 소망을 두고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그 맑고 밝은 하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서 하나님이 친히 자랑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18장

 

12장

1-11절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나사로의 누이)

12-19절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20-36절 예수님을 찾아온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

37-50절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

 

13장 

1-20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

21-30절 가룟 유다의 배신 예고

31-38절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  34-35절

 

14장

1-7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8-15절 성부와 하나이신 예수님

16-31절 성령님에 대한 약속

 

15장

1-11절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

12-17절 사랑의 새계명

18-27절 세상의 핍박 예고

 

16장

1-15절 성령 강림에 대한 약속

16-33절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

 

17장 

1-5절 예수님 자신과 성부를 위한 기도

6-19절 제자들을 위한 기도

20-26절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

 

18장

1-11절 체포당하신 예수님

12-27절 예수님에 대한 안나스(가야바의 장인)의 심문과 베드로의 예수 부인 

28-40절 예수님에 대한 빌라도의 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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