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설교말씀

마침내(창세기 26:12-15)

목사님 0 899

  

 

       

    창세기 12-50장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4명의 족장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한결같이 복 

받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복받을만한 이유와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께서 어느 날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실 때 그대로 순종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네 아들 이삭을 내게 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 그것까지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또 야곱을 봅시다. 야곱은 너무 너무 복을 사모했던 인물입니다. 

어느 정도로 복을 사모했느냐 하면 형의 급한 성질을 이용해서 형의 장자권을 가로챘고, 병든 아버지를 속여서 아버지의 축복권을 가로챌 정도로 복을 사모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형과 아버지를 속인 것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복에 대한 사모함, 복에 대한 열정만큼은 우리가 인정해야 할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할 때도 야곱은 천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나는 당신을 놓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고백입니다. 환도 뼈가 부러지면서까지 복 받기를 원했던 인물이 야곱입니다. 그는 충분히 복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요셉 또한 그렇습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의 사랑받던 아들에서 하루아침에 노예의 신세로 전락했지만, 성경에는 그가 단 한 번도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들을 다 용서하고 맞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8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요셉은 그 성품이 의롭고 정결하고 정말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셉의 성품을 예수님의 성품에 비교하곤 하는 것입니다. 

그는 노예로 끌려갔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 많은 고난의 세월 후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누가 봐도 요셉은 복받을만한 사람입니다.

앞에서 열거한 것과 같이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요셉은 뭔가 복받을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특별히 그렇게 매력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저 이삭이 한 일이라곤 우물을 열심히 판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우물도 열심히 파서 샘이 터지면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또 빼앗아 갑니다. 그러면 그것을 내주고 다른 데에 가서 또 우물을 팝니다. 

그게 그가 일생에 한 일입니다. 

 

이삭이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길을 재촉하다가 그랄이라는 지역, 블레셋 땅에  잠시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26장 2, 3절을 보면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그러면 내가 네게 복을 줄 것이다.” 

이삭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그랄 땅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이 그랄이란 동네는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예쁜 여인이 있으면 

그 여인을 빼앗기 위해서 그 남편을 죽일 정도로 아주 포악한 동네였습니다. 이삭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미인이었기 때문에 이삭은 자기 아내에 대해서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 부끄러운 믿음의 조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실수는 이미 아브라함도 행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 흉년을 당해서 애굽에 내려갔다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하면서 바로를 속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0장에서는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또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들 이삭이 똑같은 거짓말을 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정말 가장 좋은 교육이란 무엇입니까? 

부모가 몸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부모는 도둑질을 하면서 “야! 너는 절대로 도둑질 하면 안 된다.” 아무리 타일러도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모범은, 모범 중에 모범은 집에서 성경 열심히 읽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안에도 어떤 내력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질병은 유전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나쁜 습관들이 그 자녀에게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법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알코올중독이었는데 아버지가 그랬고 그것을 비난했던 그 자식이 그대로 알코올 중독이 되는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저지른 실수가 이삭에게도 반복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책 제목.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나의 잘못된 생활을 내 자녀가 그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잘못된 악순환을 끊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지로는 되지가 않습니다. 성령님을 내 마음 속에 자꾸만 채워야만 합니다. 

오늘은 술 안 마셔야지 하면 그날은 영락없이 마십니다.

오늘서부터는 컴퓨터게임하지 말아야지 하면 그 날 더 합니다.

예수님으로, 성령님으로 채우셔야 합니다.

 

12절을 보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어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증언입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던 해에. 26:1절에서 말하는 바로 그 해, 흉년이 든 해를 말합니다. 흉년이 들었던 해! 아무도 농사지을 엄두도 못 낸 그 해에 이삭은 농사해서 대풍을 맞았습니다. 100배나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 성경의 기록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면, 흉년이 장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어떠한 장애도 하나님의 복주심을 방해 할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욥기 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그리고 이삭이 거부된 사실 속에 한 가지 눈여겨 볼 말씀이 있습니다.

13절에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마침내는 그냥이 아니라, 쉽게가 아니라는 겁니다. 뭔가를 하다가 안 되고 쓰러지고 넘어지고 하다가 마침내 이루었다 그 말입니다. 

신명기 8:16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그래서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시는데 13절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이런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자 14절 후반부에서 16절을 보니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우리를 떠나가라’ 

17절 ‘이삭이 그 곳을 떠나’

이삭은 바로 온유한 자의 삶이 어떠한 것을 보여주는 신앙적 인물입니다.

성경은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는 사람이 변하는 것. 

그가 만약 어떻게 판 우물인데 하고 우물 때문에 다투었다면 우선은 우물을 지킬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불레셋 사람들로부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전쟁보다도 양보를 택했습니다. 

결과 그는 더 넓은 우물과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궁극적인 승리는 양보하는 자의 것입니다. 안 믿어지겠지만.        

향나무는 상처를 입을 때 진한 향기를 발한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상처를 줄 때 더 진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온유한 자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핵심은 이삭이 양보를 해서 더 넒은 우물을 얻었다는 것도 아니고 거부가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의 핵심은 이삭이 브엘세바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브엘세바는 이스라엘의 국토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쪽 끝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종종 ‘브엘세바에서 단까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국토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한라에서 백두까지’와 같은 말입니다. 

브엘세바는 이삭이 어릴 때 아버지 아브라함이 장막을 치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이삭이 결혼할 때까지 신앙적으로 양육 받은 장소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브엘세바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말씀과 가까워지면 올라가는 것입니다. 

말씀과 멀어지면 내려가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에 가까워지면 올라가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멀어지면 내려가는 것입니다. 

예수에게로 가까워지면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로부터 멀어지면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때 이삭은 25절에 그곳에 제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고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한 해 농사의 백배나 얻어 마침내 거부가 되는 것이고 더 넓은 곳에서 평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신앙의 회복과 성숙에 있다는 것입니다.

25절에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단을 쌓았다는 것은 어디 가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여호와의 권위를 인정하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을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 중심적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이 제일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 우선적인 삶인 것입니다. 돈 버는 것도 좋고 장소 넓히는 것도 좋지만 예배보다 우선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바른 기도생활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성숙은 그 사람의 기도생활과 비례합니다. 신앙의 성숙은 반드시 

기도생활로 이어지고 기도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25절에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했는데    

앞에 우물을 팠다라는 말은 ‘하파르’라 해서 땅을 탐지하며 힘들어 팠다라는 말이고 브엘세바에서 종들이 우물을 팠다는 것은 ‘카라’라 해서 단순히 파기만 했다는 뜻입니다.

이삭이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물을 쉽게 구할 수가 있었음을 말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삭이 브엘세바에 올라가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니 우물을 절로 얻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이삭에게 사람과의 회복도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에게 놓인 인간 관계의 갈등의 문제는 그 자체로는 해결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예배하며 기도할 때 그 시련과 위기에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삭이 두려워 했던 불레셋이 26절 이하에 화평을 청해온 것입니다. 왜? 그들은 이삭이 하나님이 함께 함을 본 것입니다. 

우리들은 크리스찬입니다. 우리들에게서 하나님이 함께 함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너나 나나 똑같은데’라고 놀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기적 일으키는 것을 보고 마술하는 유대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아 물러가라!’ 사도행전 19: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삶을 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의 승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물과 부는 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삭이 우물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다닌 것이 아닙니다. 

이삭이 이사를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우물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이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입니다. 

복의 근원이 가는 곳마다 사막에 강이 납니다. 꽃이 핍니다. 샘이 터집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의 결론이 여기에 있습니다. 브엘세바로 올라가자. 

브엘세바로 올라가면 산다. 죽지 않는다. 브엘세바로 올라가면 모든 것이 새롭게 될 것이다. 거기에 역사가 있고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브엘세바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 창조 전에 생각하시다가 택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는 부자 되는 것보다, 평안히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브엘세바에서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이삭과 같이 

우리의 신앙의 고향인 이 새하늘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가복음 10-16장

 

10장

1-12절 이혼에 관한 교훈

13-16절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신 예수님

17-31절 영생을 위한 부자 청년의 질문

32-34절 수난 예고

35-45절 섬김의 도에 관한 교훈

40절, 인간은 그 영광의 자리를 주도적으로 요구하지 못함.

46-52절 소경 바디매오를 고치신 예수님 

52절 믿음은 병을 고치는 필요한 수단

 

11장

1-11절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12-19절 무화과 나무에 대한 저주와 성전 정화

이 두 사건은 다같이 예루살렘 멸망의 예언적 성격을 가짐

20-26절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

27-33절 예수님의 권위에 관한 논쟁

 

12장

1-12절 불의한 농부의 비유

13-17절 납세에 대한 논쟁 

17절 국가 권력과 하나님이 서로 반목 관계가 아님

18-27절 부활에 관한 논쟁

28-37절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논쟁과 메시야 신분 논쟁

38-44절 서기관들의 위선과 과부의 바른 헌금

수입이 많으면 십일조 많이 한다고 기뻐함. 감사 헌금

 

13장 

1-13절 성전 파괴 예언과 말세의 징조

11절 박해에 대하여 미리부터 근심하지 말라..

14-23절 대환난에 관한 예언

24-37절 그리스도의 재림 및 종말을 맞는 제자의 자세

35절 깨어 있으랔!

 

14장

1-11절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과 가룟 유다의 배신

12-25절 최후의 만찬

26-31절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심

32-42절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43-52절 체포당하신 예수님

53-65절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당하신 예수님

66-72절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

 

15장 

1-15절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

16-32절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33-41절 예수님의 죽음

42-47절 예수님의 장례

 

16장 

1-8절 예수님의 부활

9-14절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

15-20절 예수님의 지상 명령과 승천

15절, 17,18절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