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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걸어가라!(요한복음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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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셀로나는 우리하고는 인연이 많은 도시.

 특히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마라톤에서 금메달.

 몬주익 언덕에 황영조의 동상과 태극기가 있어서 우리들에게 더욱 감동을 

 줍니다. 가서 잘 청소해야지.

 스페인이라는 나라를 표현할 수 있는 두 단어, 제가 본 경험

 먹기 위해서 산다, 보통 4-5끼,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화를 낸데요.

 또 다른 단어는 축구, 하루 종일 축구만 나오는 방송이 있는데 아직도 

 메시가 나와요. FC 바르셀로나 운동복

 그런데 거기 뉴스를 보니까 손흥민이 레알 마드리드에 오기로.

 그래서 옷 사는 걸 포기.

 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행복하게 축구해라, 살아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 행복.

 

 그런데 그 행복은 그냥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성경에도 운명을 바꾸고 개척해 나갔던 많은 인물들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야곱입니다. 그는 둘째로 태어났지만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스스로의   운명을 바꿔 나간 사람이었습니다. 

 네덜란드도 그런 나라입니다. 국토의 1/4이 해수면보다 낮아 뚝을 쌓아 그곳   에서 경작해서 꽃을 가꾸고, 젖소를 길러 치즈를 생산하는 나라입니다.

그들은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인생을 삽니다. 그들은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마음속이 불꽃같은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운명을 변화시키며 개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 인생의 변화를 원하십니까? 

원하시는 분들은 오늘 설교를 잘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기적의 책입니다. 그 기적 사건들이 4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도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상징적이고 영적인 의미가 분명한 일곱 가지 이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 가지 이적 가운데 세 번째 나타나는 이적입니다. 첫 번째 이적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이고, 

두 번째 이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오늘 살펴보는 세 번째 표적은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명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흔히 우리나라에서는 명절만 되면 고향으로 내려가느라 한바탕 귀향전쟁을 치루곤 합니다. 

도시에 올라와 있던 사람이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이 우리들의 명절 의식입니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그 반대입니다. 고향에 있던 사람들이 성전이 있는 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명절을 지내는 것이 저들의 명절의식이었습니다. 

우리의 명절이 고향중심이라면 이스라엘의 명절은 성전중심이었습니다.

 

1절의 “그 후에”는 4장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마리아 사역 이후에” 그런 뜻입니다. 무대는 예루살렘으로 옮겨집니다. 

수십만이 몰려든 작은 도시 예루살렘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축제를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잔치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와 가장 외롭고 불쌍한 환자를 만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시대 교회도 고독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믿는 우리들의 본분은 소외되고 고독한 사람들을 찾아가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곳을 찾아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기다리는 예수님이 아니라 찾아 오시는 예수님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누구를 찾아 가셨습니까? 

세상에서 버린바 된 그곳, 중환자들의 수용소를 찾아 가셨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무기력해 보입니다. 

자기들 스스로 자기들의 병을 고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뭐 좀 가졌다고, 좋은 옷 입었다고 으스대고 폼 잡을지 모르지만 사실 별 것 아닙니다. 장염만 걸려도 꼼짝 못하고 누워있는 것이 인간 아닙니까?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내가 별거 아닌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이 시간 마음의 고통과 상처를 안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민하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까? 

두 손 두 팔 들고 항복해서 나오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주님이 당신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2절 말씀에 의하면 오늘 사건은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 “베데스다”라는 연못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은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데군데 출입할 수 있는 성문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 중에 양문(Sheep Gate)이라 불리는 성문이 있었는데, 이 문은 성전에 

속죄 제물로 드릴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곳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고,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 연못가 행각(정자 비슷한 것)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3절에 의하면 많은 병자들, 맹인, 다리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등입니다. 한 마디로 난치병, 불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베데스다 연못에 특별한 전설이 있었습니다. 

3절 후반부터 보십시다.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죠? 

성경의 괄호부분은 성경 원어에는 없는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괄호안의 말을 추가하지 않으면 본문의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을까봐 후대 교부들이 삽입해 놓은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사실이 아니고 전설이지요. 그런데 잘못 전해진 전설을 믿고 은혜의 집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난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는 병자들은 아마 유명하다는 병원, 용하다는 의사 다 찾아다녀 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좋다는 약은 다 써봤을 겁니다. 

그러나 별 효험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인간의 의술로는 가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절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베데스다 연못가는 마지막으로 실오라기 같은 한 가닥 소망을 붙잡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헛된 소망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헛된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소망이라고 붙들고 있지만, 

그 소망이 헛된 것임을 남들은 다 알아.  

우리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소망은 주님 밖에 없다고 단언합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그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처럼 같은 처지끼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마땅한데, 

살벌한 경쟁을 벌이며 서로를 경계해야 됩니다.

세상에서 밀리고 밀려 막장과도 같은 그곳에 온 사람들인데, 거기서도 자기들끼리 경쟁을 벌여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헛된 소망’을 위해서 말입니다. 베데스다라는 이름이 무색합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란 뜻인데, 자비는커녕 살벌한 경쟁만 난무하는 곳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세상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또 다른 모순은 은혜는 아무 대가나 노력 없이 받는 것인데 은혜의 집에 

와서도 은혜와 상반되는 짓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물이 동할 때 재빨리 몸을 날려 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은 

물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언급하고 있는 환자는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마른 자들입니다. 맹인이 어떻게 물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다리 저는 사람이 주섬주섬 일어서면 이미 몇 사람은 물 가운데서 수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몸을 딩굴딩굴 굴려 보면 이미 사람들은 수건으로 몸을 닦고 나오고 있을 것입니다. 정작 난치병 환자들은 들어갈 힘이 없습니다. 

이게 베데스다의 모순이요 인생의 딜렘마입니다. 

절망, 좌절, 낙심, 포기, 낙망... 그곳이 베데스다요 인생의 현장입니다. 

이 문제의 현장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다만 생존경쟁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은혜를 베푸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도 아무도 예수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오직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며 동하기만 해봐라 이번에는 내가 들어간다 하고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은혜의 집에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까? 

지금 은혜의 집, 교회에 모여 있는 오늘 신앙인의 영적인 상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되었음에도 삶의 능력을 잃어버린 자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에는 예수님을 만나러 오셔야 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친히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여기 한사람은 이천년 전 그 환자이거나 저기 저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나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응시하셨단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내 아픔을 보십니다. 나의 문제를 살피십니다. 이 세상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문제들이 우리 주님과 눈만 마주치면 그 문제는 해결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눈길과 마주치시길 축원합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가까이 걸어 오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얼마나 엉뚱한 질문입니까? 

자 38년 동안 앓아 누워 있던 이 환자를 보십시오.

그 눈에는 희망의 빛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몸은 거동할 힘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는 물음에 이 환자는 ‘아이구 선생님 살려주세요’ 한다든지 ‘낫고싶고 말구요’ 한다든지 ‘한번만 걸어본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동문서답을 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여보시오. 내가 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나를 좀 밀어 주시오. 내 손을 좀 붙들어 주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 이 말을 영어로 보면 

"I have no one to help me"입니다. 

나를 도와줄 그 어떤 사람, 단 한사람도 가지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한줄기 희망마저 살아졌을 때 단 한사람의 소망마저 사라졌을 때 바로 그 순간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하나도 붙들 수 없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늘을 우러러 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주님이 당신을 찾아 갈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한계(limitation)를 그어놓는 습성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자기를 고정시켜 놓습니다. 자기 조건을 따지고 환경을 따지면서 움츠러듭니다. 그러다 보면 그 심령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고 서서히 죽어갑니다. 그러므로 그 한계를 깨뜨려야 합니다. 그게 곧 믿음입니다. 믿음이 생길 때 심령은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의 부정적인 생각의 틀을 깨뜨려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심령이 치유되고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이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전에 심령을 먼저 치유해 주십니다. 

심령이 살아나니까 38년된 병자의 마음 속에 믿음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아니, 38년 동안 누워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라니 도대체 말이 됩니까? 

그런데 이미 그 사람의 심령이 살아났으므로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먼저 심령이 치유되고 살아나니까 육신의 문제도 순조롭게 해결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란 자기를 부정하고(No) 하나님을 긍정하는(Yes)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조건을 보고 형편을 보면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면 긍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긍정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원을 아시고 그 소원의 근원자체를 들어주십니다. 

물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도 결국은 걷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예수께서는 그를 물에 들여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다리를 아주 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힘을 내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38년 된 병과 같은-영적인 무기력,  상처로 남은 패배감,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좌절감을 다 씻어내도록 합시다. 우리들 모두 지금 바로 이 예배시간에 주님을 붙잡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헌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펼쳐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레위기 16-22장

16장 대속죄일에 관한 규례

대속죄일은 일년 중 오직 한 날로(7월 10일) 대제사장이 성막 안의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죄를 대속하고 죄로 인해 분리되었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는 날입니다. 

10절 아사셀, 광야로 보내어진 숫염소를 가리킴.

 

17장 단일 성소 지정 및 피의 금지 규례

 

18장 택한 백성의 성적 순결

1-5절 이방 관습에 대한 금지 5절

6-18절 근친 상간 금지 규례

19-23절 부도덕한 성교와 우상 숭배의 금지 22절 남색 금지

24-30절 율례의 순종 촉구와 그에 따른 상벌

 

19장 택한 백성의 생활 원리

1-8절 하나님을 향한 규례

9-18절 이웃과 사회를 향한 규례  9절 

19-37절 여러 가지 도덕률   32절

 

20장 성결을 범한 자에 대한 중형 선고

1-5절 몰렉을 숭배하는 자에 대한 규례

몰렉은 어린아이를 불에 태워 제사드리는 암몬의 우상.

6-9절 무당 추종자와 부모를 저주한 자

10-21절 음행하는 자에 대한 규례

22-27절 정한 백성의 법도

 

21장 제사장과 그 가족들의 정결 규례

 

22장 성물 규례

1-9절 성물을 먹을 수 없는 자의 신체 조건

10-16절 성물을 먹을 수 있는 자의 신분

17-30절 완전한 제물  21절 화목제, 서원제, 낙헌제, 감사제

화목제를 드린 자가 예외적으로 그 제물의 일부를 먹을 수 있다(7: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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