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네 명의 왕 시대에 활동했던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주신 영감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망해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갈 것과 70년 후에 다시 돌아올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기다리던 메시야가 이 민족 가운데서,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는 영광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먼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이라고 선포합니다. 여러분들, 이 하나님의 선택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을 선택해서 이 땅에 오셨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로마를 선택하셨고, 독일을 선택하셨고, 영국을 선택하셨고, 미국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날에 이르러서는 우리 한민족을
선택하셔서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한 가정을 구원하실 때도 먼저 한 사람을 선택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한 이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을 충실히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1960년대에 큰 변화가 있었던 대표적인 나라들이 싱가포르, 필리핀,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입니다.
싱가포르는 1965년에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하여 나라를 새롭게 세우게 되었는데 리콴유가 초대 수상이 되어 26년간 장기 집권을 했습니다.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하던 해인 1965년에 필리핀은 마르코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20년간 장기 집권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박정희가 1961년에 5·16 쿠테타로 정권을 잡고 1963년에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18년 동안 장기 집권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경제 상황을 보면 세 나라 가운데 필리핀이 가장 부유한 나라여서 우리나라가 필리핀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장충체육관.
그런데 60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매우 달라졌습니다.
가장 가난했던 싱가포르가 가장 부자 나라가 되었고, 우리나라에 경제적인 지원을 했었던 필리핀이 가장 못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자원이나 인구를 보면 당연히 필리핀이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고, 싱가포르가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오늘 우리들은 이 부분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사람이 나라를 다스렸느냐?’의 차이입니다.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싱가포르는 리콴유가 총리가 되어 청렴결백하게 나라를 다스려 부정과 부패가 자리를 잡을 수 없도록 정직한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공무원의 비리는 결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싱가포르에 가 보시면 얼마나 깨끗하고 질서가 잘 지켜지는지 모릅니다.
거리에는 담배 꽁초 하나가 없고 택시도 정해진 구간에서만 손님을 태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불편할 것 같은데 그 시스템을 알고 나니까 정말
편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필리핀은 마르코스가 대통령이 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만큼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삶을 살다가 결국은 해외로 추방되고 맙니다.
나라 곳곳이 부정과 부패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이멜다라는 부인이 한 몫을 톡톡히 합니다. 그래서 지금 필리핀을 가 보면 못사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 이렇게 큰 것입니다. 결국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일도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여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따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즉, 쉬운 말로 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란 무엇엔가 미쳐 살아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직도 덜 미쳤고, 미칠 만한 그 무엇을 찾지 못해서 불행을 느끼고 불안을 느끼고, 사는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나라와 이스라엘의 수난사는 참으로 비슷합니다.
그래서 일제시대 목사님들의 설교를 연구해 보면 4분의 3이 구약성경을
분문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 당시 목사님들이 이스라엘의 수난사를 보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읽었던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이 많은 민족적 시련 속에서 우리가 선택받고, 교육받고, 강하게 되어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 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이 선택은 목적적인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택하신 백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오늘 이사야가 고백하는 것은 보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내다보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의 결말이 절망이 아니고 아름다운 찬송을 부르는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말씀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고난이 찬송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전제조건으로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특별히 억울했던 것, 분했던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행기는 공기를 뒤로 밀어 내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공기를 뒤로 밀어 내지 못하면 비행기는 날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거를 밀어내셔야 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모든 어두운 과거, 열등의식 등 모든 잔재를 깨끗이 쓸어버리고 새롭게 나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때때로 사회에서 교회나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교회에 대해서 이런 잘못된 평가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자신의 안일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증언하지 않습니다.
한국기독교는 누구보다도 애국심을 가지고 현실에 참여하였고, 역사의식을 가진 종교입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1919년 3.1운동입니다.
오늘은 3·1절 103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3년 전 1919년
자주 독립을 외치며 우리 조선 민족이 모두 궐기했던 날입니다.
일본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나라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1910년에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국제적인 관심은 한반도가 일본에 귀속된다 할지라도 일본이 남하해 오는 러시아의 세력을 막아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입장이었기에 한일합방에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나라를 빼앗기고 자유를 잃었음에도 호소할 데가 없는 불행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3.1운동은 이러한 우리 민족이 민족적 생존권을 주장함과 동시에 자유를 선언한 운동입니다.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그 당시에 자신의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기독교인이 그 절반인 16명이었습니다. 50%
전체 인구 중에 기독교인이 1%내지 1.5%밖에 안 되는데 33인 중 절반.
이것만 봐도 한국에 기독교가 얼마나 우리 민족의 현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참여하고 있는가를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태안반도에 기름 유출 사고가 나서 우리 교인들하고 갔었는데
스님들은 안 보여.
3·1절을 대표하는 인물은 최남선, 이상재 누구 누구 하지만 유관순입니다.
그를 가리켜 한국의 잔 다르크라고 합니다.
유관순은 1902년 11월 17일 천안군 병천 마을(아우네 마을)에서 유중권씨와 이소제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태어난 유씨 가문은 의병장의 가문이었고 교육가의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가문은 신앙의 가문이었습니다.
영특한 유관순은 애리사(Alise H. Sharp) 선교사의 주선으로 14살의 나이로 이화학당 3학년에 편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만나 감화와 감동을 받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너무나 중요한데 유관순은 이화학당에서 공부할 때 정동교회의 손정도 목사와 이화학당의 박인덕 선생에게서 큰 감화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두 분의 공통점은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을 늘 강조하였다는 것입니다.
유관순이 이 두 분의 영향으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워져 불타고 있을 무렵 일제는 3월 10일 임시 휴교령을 내려 서울시내 학교들은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유관순은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병천 아우네 마을에 내려와 보니 고향은 너무나 조용했습니다.
유관순은 서울 만세운동 소식을 온 동네를 뛰어 다니며 전했습니다.
나라 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독립만세를 불러야 된다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야기를 했지만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유관순은 매봉산으로 올라가서 살을 에이는 추운 날씨였지만 3일간 하나님께 나라를 위하여 통곡을 하면서 몸부림치며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산 기도를 마치고 내려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잃은 나라를 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때 듣는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면 하나님이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유관순의 말에 동의를 하고 4월 1일 장날 정오에 만세를 부르기로 했습니다. 4월 1일 장날 정오에 아우네 장터에 모인 농민들이 힘을 합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아우네 장터의 만세 사건이었습니다.
일본은 만세시위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하거나 회유하였지만 유관순은 매수도 회유도 되지 않았습니다. 유관순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일본의 갖은 잔악한 술책에 저항하다 마침내 1920년 10월 12일 18살의
꽃다운 생을 마쳤습니다.
유관순은 비석이 없어 무덤을 찾을 수 없고, 유품하나 남겨 두지 않은 채, 오직 수의를 입은 사진 한 장만을 남겨두고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애국과 신앙을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순국이 곧 순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상재 선생이 감옥에 갇혀서 모진 고통을 치룰 때에 누가 이 일을 시켰냐고 매질을 할 때에 그는 시종일관 하나님이 시켰소라고 하고 만세 운동 본부가 어디냐가 하면 하늘에 있소 라고 당당하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이 신앙고백이 한국 교회의 부흥의 뿌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정말 살기 힘든 나라였지만 기독교가 들어와서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짧은 시간에 경제대국이 되고 교육 강국이 되었습니다.
복음이 들어와서 이렇게 잘 살게 되었습니다.
5000년 역사에서 이렇게 잘 산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것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고마움도 잃어버려가고, 국가에 대한 고마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나라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잘 아시지요?
외국에 나가도 대한민국 여권만 가지고 가면 어디 가서도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렇게 좋은 나라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나라를 위해 더욱 깨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민족복음화에 앞장서야 됩니다. 도산 안창호선생님이 일찍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경찰서 10개를 세우는 것보다 교회 1개를 세우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교회는 이 사회의 정신적 지주인 것입니다.
이 민족이 복 받는 길은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민족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어느 역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3.1.운동이 없었다면, 2차대전이 끝났다 하더라도, 우리는 일본에 편입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3.1.운동이 있었기에, 우리가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목숨으로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어린 유관순의 마음으로
오늘도 이 나라를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 사랑이, 애국이 신앙으로 승화되어 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91-104편
91편 본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인해 안전을 보장받는 사실을 찬양하는 시. 14절
92편 성도들은 악인들의 일시적 형통으로 인해 불평하고 원망하기 보다는 그들의 결국이 멸망임을 깨닫고 더욱 진리 안에서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께 순복하고 감사하며 헌신하는 생활을 해야.
93편 예부터 견고히 선 주의 보좌
94편 하나님의 백성들이 압제자의 폭압으로 말미암아 고통으로 신음하는 속에서 압제자들의 악행을 하나님께 고발하고 공의로운 심판을 요청하는 시.
11, 12절
95-100편 전 우주를 다스리는 신정 사상을 찬양 선포하는 시.
95편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께 무릎을 꿇자
96편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97편 공의로 보좌의 기초를 삼으시는 하나님
98편 땅끝까지 미칠 하나님의 구원
99편 여호와 그는 거룩하시도다
100편 감사와 찬양으로의 초대
101편 신정 국가 왕으로서의 다윗의 바른 통치 자세
102편 바벨론 포로 시기에 지은 시로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고
선민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절히 열망한 시. 24절
103편 본시에서 다윗은 그가 체험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인자하심에 대하여 실로 감격하면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찬양. 5절
104편 하나님의 일하시는 일터로서의 대자연을 찬양.